작은 아씨들 2 열린책들 세계문학 279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허진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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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이 지났다. 메그는 존 브룩과의 결혼을 하루 앞두고 있다. 허영심이 강해 화려하고 낭만적인 결혼을 꿈꾸던 그녀가 소박한(가난한) 신혼 생활을 시작한다. 로리는 짓궂은 대학생이 되었고, 조는 점점 더 글쓰기와 베스에게만 집중하고 있다. 쾌활한 성격 덕분에 로리의 대학 친구들과는 편하게 지내지만, 그들이나 조나 서로를 연애 상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시선이 따라가는 대상은 아름답게 성장하고 있는 에이미다. 



2권을 읽고 있자니 이 소설이 각색된 두 편의 영화가 생각난다. 1990년대, 2019년에 개봉한 <작은 아씨들>. 개인적으로 꼽자면 2019년 영화가 더 마음에 드는데, 워낙 좋아하는 소설이다보니 사실 영화가 잘 만들어졌는지 여부보다는(두 작품 모두 다른 이유로 괜찮았으니까) 영상물로 만들어진 것 자체가 나는 참 좋았다. 2권을 읽을수록 소설 속 조와 배우 시얼샤 로넌이 겹쳐 보인다.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그들이 뛰어다니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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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울수록 풍요로워진다 - 삶을 회복하는 힘, 팬데믹 이후 우리에게 필요한 세상
목수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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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왜 정부의 모든 개혁은 공공 영역 파괴로 귀결되는가?"  



정말 오랜만에 읽는 목수정 작가의 책이다.  


스크린쿼터, 도서정가제, 부동산 개발주의, 생태사회, 저출산, 교육, 경제 및 문화자본에 의한 사회 계급, 미투, 젠더, 노년의 은퇴와 청년 실업, 과거사 청산, 사회 분열, 팬데믹을 통해 들여다본 의료 과학의 현주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거대 자본에 의한 전지구적 전체주의 등 현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짚으며 마크롱 정부를 통렬히 비판함과 동시에 한국 사회를 같은 선상에 놓으며 우리가 지향해야할 바를 제시한다. 기억에 남는 부분과 함께 들었던 몇 가지 생각들을 써본다. 









 
파리 동쪽에 있는 인구 10만의 도시 몽트뢰이에는 유럽에서 제일 큰 공공영화관 멜리에스가 있다. 프랑스의 공공영화관은 지자체가 주민들의 문화향유권을 위해 영화관을 사들여 민간단체에 다소의 지원금을 주고 위탁운영한다. 이 영화관에서는 매달 80여 편의 영화들이 상영되는데 국적으로 따지자면 약 30여개국의 다양한 영화들을 만날 수 있다. 프랑스의 모든 멀티플렉스에서 한 영화는 동시에 두 개 이상의 관에서 상영될 수 없기 때문에 스크린 독과점이 없는 덕이기도 하고 ,멜리에스가 다양성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영화관의 규모나 관람료, 연령을 불문한 직원들의 다정함을 떠나서 상업영화부터 예술실험영화, 독립영화 등을 선택해서 볼 수 있다는 점이 부러웠다. 멜리에스의 매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건물 내의 문화프로그램과 시민 활동가들의 프로그램, 도서운동 단체가 운영하는 도서관 등 다양한 시민운동이 활성화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시선을 끌었던 부분은 대형 상업영화관들의 강한 도전에 멜리에스를 지켜낸 것은 바로 시민들이었는 점이다.  


이어진 라 칼리포니의 탄생 과정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젠트리피케이션이 곧바로 떠올랐다. 저자는 라 칼리포니가 자본주의의 대안을 보여주는 곳이라고 소개했는데, 우리나라였다면 불과 몇 년 안에 라 칼리포니를 탄생시킨 이들은 대부분 자본가들에게 쫓겨났을 것이라고 본다. 


ㅡ 


저자는, 동네 서점은 온라인 서점과는 다른 가치를 지향하고 있음을 들면서 여전히 굳건하게 활성화되어 있는 프랑스 동네 서점에 대해 얘기한다. 파리에서는 지역 주민들의 편의와 정서를 고려해 도서관과 공적인 기관을 분담하고 있음을 덧붙여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경기도의 경우, 주민들이 지역 도서관보다 먼저 동네 서점을 통해 원하는 책을 대출할 수 있는 시스템이 도입되고 있다. 그러나 완전히 정착되기까지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동네 서점의 기능에 대해서는 각 나라, 도시마다의 문화와 정서, 현실적인 주거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생각이다. 우리 동네의 경우 주거 형태가 대부분 공동주택이고, 한 거주지에서 수십 년을 사는 사람이 드물다. 심지어 2년만 살겠다고 작정하는 이들도 있다. 이렇다보니 주민 간의 교류도 제한될 수 밖에 없다(나만해도 사는 동안 위 아래 앞 뒤 집이 여러 차례 바뀌어 지금은 얼굴도 잘 모르는 지경이다). 지역 독서모임 역시 이사 등의 문제로 회원이 자주 바뀌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이 책에서는 부동산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이 부분 역시 한 지역에서 오래 거주 할 수 없는 개발의 폐해라고 할 수 있겠다.  


ㅡ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삶에대하여 - 우리집에는 냉장고가 한 대다. 김장(이라고는 하지만 열다섯 포기를 넘기지 않는다)까지 담그면서 그 흔한 김치냉장고가 없다. 빌트인으로 주방 베란다에 설치된 김치냉장고와 냉동고는 입주할 때부터 전원을 아예 차단했다. 냉동고 역시 냉장고의 한 칸만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냉장(동)고의 원리를 살펴보면 냉장고는 비울수록, 냉동고는 채울수록 전기료가 적게 들고 고장도 방지할 수 있다. 결국 냉동고는 그 안을 꽉꽉 채워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작 한 대 뿐인 냉장고에서도 한 달이 지나면 버려야할 음식이나 식재료가 생긴다. 얼마 전 집에 냉장고만 세 대인 지인의 집을 다녀온 적이 있는데, 식구가 넷 뿐이고 식구 모두가 삼시세끼를 모두 집에서 해결하는 것도 아닌데 이 냉장고에 들어간 음식과 식재료는 언제 다 먹냐고 물었더니 웃으면서 버리는 게 반이라는 말이 돌아왔다. 결국 '내' 돈으로 전기료 내고, 식제료(음식)를 사서 먹지도 않고 음식물쓰레기 비용을 지불해서 버리면, 우리의 세금으로 또다시 이 쓰레기들을 처분해야 한다. 거기다 같이 따라온 플라스틱 자재까지. 건강은 또 어떠한가. 과식하고 소화제 먹고, 다이어트 한다고 굶거나 지방분해 보조식품을 챙겨 먹는다. 노동의 대가가 쓰레기를 양산하고 그 쓰레기를 처분하는 데 쓰인다는 사실, 환경 뿐만 아니라 우리의 건강을 오염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인지한다면, 좀 달라질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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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초등학교 만5세 입학을 두고 심각한 논란이 벌어졌고, 전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교육부장관은 결국 사퇴했다. 그런데 이 논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만 5세' 일까? 일단 유치원이 아닌 초등학교라는 것, 교사와 시설, 교육 선진국의 꼼꼼한 사례와 우리나라 교육 실정의 비교, 무엇보다 교육 체계의 변화없이 입학 순간 입시 지옥의 문에 들어선다는 점에서 '만 5세 입학'은 즉흥적이고 분별없는 제안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유치 단계의 교육을 공립으로 흡수하는 것과 지식이 아닌 다양한 분야에 대한 경험을 머리와 몸이 함께 체험하는 것에 대해서는 검토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차고 넘치지만 입시 제도가 바뀌어야함은 물론이고, '학습과 교육'이 지향해야할 바에 대한 시민교육이 우선해야 할 것이다.  


과감히 '탈 공교육'을 실행하는 이들도 있지만, 모든 부모가 실행 가능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공교육이 더 올바른 길로 가야하는 이유는 대부분의 시민들이 거쳐가는 곳이고, 인권 환경 경제 정치 예술 교양 등 인간 사회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배워야하기 때문이다. 공교육이 살아야 한다는 문구는 그냥 흘러들을 말이 아니다. 교사이자 작가인 다니엘 페나크는 <소설처럼>에서 입시가 아니었다면 프랑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독서를 강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썼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 저자는 중산층 자녀들의 문화예술 체험이 학업 성적에 연계하고 있는 프랑스 사회에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는 단순히 성향에서 오는 차이가 아닌 부모의 경제 및 문화자본에 근거한다는 것. 가능하면 이 격차를 줄이도록 노력할 수 있는 현장이 공교육 뿐임을 감안다면 교육이 가져야할 묵직한 소명 의식을 각성해야할 것이다.  



인상적인 부분은 교육 예산을 축소하고, 교사를 충원하지 않는 등의 문제들로 총파업을 알리는 교사회에서 학부모들의 동참을 부탁하는데,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학부모들이었다. 학교 폭력이 발생하면 수업 분위기를 흐린다는 이유로 학부모들이 피해자 학생과 학부모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내는 우리네 모습과는 아주 다르다. 그리고 정부에서 비유럽권 학생들에게만 대학등록금을 약 열여섯 배 인상하는 방안을 내놓자 대학들은 정부를 향해 반교육적이자 반민주적인 계획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동원해 외국 학생들의 인상된 등록금을 지불하지 않겠다는 방법을 찾아내겠다고 불복종 선언을 했다. 만약 우리나라였다면 어땠을까? 두 손들어 환영까지는 차마 못하더라도 마지못한 척 수긍하지 않았을까. 대학이 공립이기에 가능한 반응인지도 모르겠지만. 


눈에 훅 들어온 부분은, 프랑스가 전범 재판 와중에 좌우합장 임시정부가 제헌의회가 수립되기도 전에 먼저 취한 조치가 사회보장제도 수립이었다는 대목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황에도 불구하고 가장 우선했던 것이 기본적인 인간의 조건을 보장받는 나라를 세우겠다는 것에 감동받지 않을 수 없다. 해방된 조국을 친일파 인사들이 장악한 우리나라에서 인간의 기본 조건은 고사하고 과거사 청산조차 온전하지 못했으니 시작부터 단추가 잘못 꿰어졌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사회 문제에 관련한 책들을 읽다보면 하나의 문제를 하나로만 해결할 수 없음을 늘 깨닫는다. 직업과 교육에 관련한 시민의식과 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입시제도는 변하지 않을테고, 입시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하위 교육 체계 또한 변화에 있어 한계에 부딪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근래에 신자유주의의 도입으로 변화된 프랑스의 교육 제도는 그야말로 아연실색할 만하다. 이제와서 제발로 잘못된 길로 들어선 프랑스 교육 정책이 제 갈길을 찾아가기를 바란다(남의 나라 걱정할 때가 아니지만). 


이 책을 읽고 새삼스레 느낀 부분은 우리와는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이는 시민의식이다. 물론 프랑스 사회의 문제점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묻는 이도 있겠지만, 책에서 언급되는 문제점들이 과히 낯설지 않다. 오히려 아주 익숙할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서도 한창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프랑스 사회(더불어 국제 사회)의 문제점들을 통해 우리가 해결해야 할 사회 문제들을 객관화시켜 볼 수 있다. 사실 언급한 문제들이 개별적으로 개선되기는 쉽지 않다.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시민의식이 필요하고, 정부와 지자체의 유기적인 제도 개선과 협력을 요한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손을 놓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면을 쓰고 승자독식을 지향하는, 그래서 '다 같이 잘 살아보자'는 분배를 허용하지 않는 자본의 프로파간다는 절대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오랜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제도가 개선되고 거대 권력이 움직이는 때는 개인이 모여 목소리를 높일 때 뿐이었다. 


목수정 작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반가웠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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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삶의 음악
안드레이 마킨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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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전, 작가의 <프랑스 유언>을 읽었더랬다. 삶에 있어 기억의 대한 이야기었다면, 이번에는 음악에 대한 이야기인가 보다. 삶과 기억, 삶과 음악. 벌써부터 피아노 앞에 앉은 노인이 보이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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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마음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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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철장, 그럼에도 오늘의 나는 발전하고 있다고 말하는 크리스티앙 보뱅. 조건없이 사랑하고, 구속없는 자유를 아는 작가의 소설은 얼마나 아름다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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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피부 - 나의 푸른 그림에 대하여
이현아 지음 / 푸른숲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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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화가, 그리고 이를 통한 저자의 내밀한 이야기다. 유년 시절을 비롯해 고독과 우울에 대한 감정을 푸른 빛을 머금은 그림들 안에 스미듯 풀어 놓는다. 








1956년,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첫 단독 전시회 당시 도록에 전기적인 내용을 싣는 것을 거부하고 인터뷰도 응하지 않았다는 발튀스는 그림이 스스로 말해야 한다고 믿었던 예술가다. 우리는 간혹 문학을 포함한 예술 작품을 대면할 때 너무 많은 정보와 지식을 끌어안고 대한다. 도슨트의 해설도 무척 재미있지만, 때로는 진중하게 오로지 작품하고만 대면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발튀스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겠더라는. 


루시안 프로이드의 인물화에는 단순한 인상이나 표정을 넘어서 켜켜이 쌓인 세월도 담아낸다. 이런 내용을 읽고 단박에 검색한 그의 그림은 그야말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작가의 표현처럼 그의 그림 안에 있는 이들의 삶이 보이는 듯한 기분은 나만이 아닐 것 같다. 루시안 프로이드는 사회가 규정해 놓은 관습이나 규범을 모두 무시하고 경멸했다.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헉!' 소리가 나오는데, 루시안은 전문 모델이나 모르는 사람을 그리지 않았고 그와 가까운 이들(자식을 포한함)이 모델이 되어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오직 화가로서만 살기를 원해 이기적이고 무책임하며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는 루시안, 거기다 그에 대한 지인들의 평가도 저마다 달라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그런데 책에 실린 루시안의 작품 <잠든 애너밸>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뭔가... 다정한 느낌이고, 연민어린 시선이 느껴진다. 그림 속 애너벨은 루시안의 딸, 이기적이라고는 하나 그도, 아버지다.  


아흔아홉 해를 살았고, 90대에 접어들어서야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는 화가 루치타 우르타도. 예술가 남편과 자식들의 뒤에서, 그가 그림을 그린 시각은 가족이 잠든 밤.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아무도 '그의 것이'라고 인정해주지 않는 그림을 포기하지 않고 그렸음에도 자신의 그림을 보이기를 주저했다는 루치타. 그는 어떤 마음이었던 걸까?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를 볼때면, 나는 예전부터 천왕봉이 떠올랐다. 운무 가득한 산 정상에 서 있는 남자의 뒷모습은 지리산 천왕봉에 서 있던 '누구'와 같았고, 그래서 그의 고독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책에 실린 프리드리히의 <북극해>는 저자의 말처럼 그의 자아같다. 저자는 '산산조각 났지만 침몰하지 않은 배의 모습'을 그와 같다고 얘기하는데, 나는 오도가도 못한 채 갇혀버린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프리드리히는 저자의 말처럼 살아남으려는 것이었을까, 살아진 것이었을까.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를 보면 전자에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조지 클라우슨의 <애도하는 젊은이>를 통해 '의미 있는 상실'을 짚는 저자. 모든 의미 있는 상실이라... . 그렇다면 의미 없는 상실은 무엇이려나. 의미 없는 상실을, 굳이 상실이라고 할 필요가 있을까? 잃어버린 것과 놓아버린 것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는 중(요즘 머리카락을 부여잡으며 읽고 있는 철학책이 있어서 무슨 글이든 그냥 넘어가지지 않는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파울라 모더존 베커의 그림을 좋아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들어 올림'에 대한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들어 올림'은 '여기 있음'을 증명하는 것. 증명을 위해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 소소하고 단정해 더 마음이 간다.   


ㅡ 


어린 시절(아마 대여섯 살 무렵), 우리 두 남매가 가장 많이 한 놀이 중 하나가 동굴놀이였다. 피아노 의자와 스탠드 옷걸이, 책상 의자를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놓고 그 위에 이불을 올리면 마치 텐트같은 형태가 된다. 우리는 그곳을 동굴 기지 삼아 휴대용 랜턴과 간식을 챙겨 들어가 몇 시간이고 나오지 않았더랬다. 마치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어른들이 우리를 못찾을 것처럼.  


어른이 되고 종종, 이렇듯 어딘가로 당당하게 숨어들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한편으로는 누군가 찾아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면서도. 이 책을 덮고 난후 별안간 떠오른 기억이요, 생각이다. 문득, 나는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얼마나 쏟아내며 살고 있을까.   


ㅡ 


읽으면서, 이 작가는 나와 성향이 참 다르구나... 싶었다. 그가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상상한다면, 나는 늘 정착할 곳을 머릿속에 그린다(살면서 이사도 거의 다닌 적이 없으면서). 북향의 집을 선호하는 반면 나는 남서향을 집을 선호한다(이것도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부터이지만). 저자는 식물을 잘 키우는 사람보다는 꽃을 잘 꽂는 사람에게 끌린다는데, 나는 정반대다. 그럼에도 이입해서 읽을 수 있었던 까닭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고독'이라는 공통 명제 때문이 아니었을까. 


저자는 그림 속 마르트 드 멜리니가 언제나 혼자서 부유하는 듯하다고 했는데,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그가 이 글을 얼른 마치고 푸른 내음이 나는 고요한 어느 시간과 공간으로 침잠해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 같다.   


제목이 '여름의 피부'인데, 왠지 늦가을에 다시 읽고 싶다.
모든 색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계절에 푸른 그림을 앞에 두고.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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