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피부 - 나의 푸른 그림에 대하여
이현아 지음 / 푸른숲 / 2022년 7월
평점 :
품절



그림과 화가, 그리고 이를 통한 저자의 내밀한 이야기다. 유년 시절을 비롯해 고독과 우울에 대한 감정을 푸른 빛을 머금은 그림들 안에 스미듯 풀어 놓는다. 








1956년,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첫 단독 전시회 당시 도록에 전기적인 내용을 싣는 것을 거부하고 인터뷰도 응하지 않았다는 발튀스는 그림이 스스로 말해야 한다고 믿었던 예술가다. 우리는 간혹 문학을 포함한 예술 작품을 대면할 때 너무 많은 정보와 지식을 끌어안고 대한다. 도슨트의 해설도 무척 재미있지만, 때로는 진중하게 오로지 작품하고만 대면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발튀스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겠더라는. 


루시안 프로이드의 인물화에는 단순한 인상이나 표정을 넘어서 켜켜이 쌓인 세월도 담아낸다. 이런 내용을 읽고 단박에 검색한 그의 그림은 그야말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작가의 표현처럼 그의 그림 안에 있는 이들의 삶이 보이는 듯한 기분은 나만이 아닐 것 같다. 루시안 프로이드는 사회가 규정해 놓은 관습이나 규범을 모두 무시하고 경멸했다.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헉!' 소리가 나오는데, 루시안은 전문 모델이나 모르는 사람을 그리지 않았고 그와 가까운 이들(자식을 포한함)이 모델이 되어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오직 화가로서만 살기를 원해 이기적이고 무책임하며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는 루시안, 거기다 그에 대한 지인들의 평가도 저마다 달라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그런데 책에 실린 루시안의 작품 <잠든 애너밸>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뭔가... 다정한 느낌이고, 연민어린 시선이 느껴진다. 그림 속 애너벨은 루시안의 딸, 이기적이라고는 하나 그도, 아버지다.  


아흔아홉 해를 살았고, 90대에 접어들어서야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는 화가 루치타 우르타도. 예술가 남편과 자식들의 뒤에서, 그가 그림을 그린 시각은 가족이 잠든 밤.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아무도 '그의 것이'라고 인정해주지 않는 그림을 포기하지 않고 그렸음에도 자신의 그림을 보이기를 주저했다는 루치타. 그는 어떤 마음이었던 걸까?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를 볼때면, 나는 예전부터 천왕봉이 떠올랐다. 운무 가득한 산 정상에 서 있는 남자의 뒷모습은 지리산 천왕봉에 서 있던 '누구'와 같았고, 그래서 그의 고독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책에 실린 프리드리히의 <북극해>는 저자의 말처럼 그의 자아같다. 저자는 '산산조각 났지만 침몰하지 않은 배의 모습'을 그와 같다고 얘기하는데, 나는 오도가도 못한 채 갇혀버린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프리드리히는 저자의 말처럼 살아남으려는 것이었을까, 살아진 것이었을까.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를 보면 전자에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조지 클라우슨의 <애도하는 젊은이>를 통해 '의미 있는 상실'을 짚는 저자. 모든 의미 있는 상실이라... . 그렇다면 의미 없는 상실은 무엇이려나. 의미 없는 상실을, 굳이 상실이라고 할 필요가 있을까? 잃어버린 것과 놓아버린 것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는 중(요즘 머리카락을 부여잡으며 읽고 있는 철학책이 있어서 무슨 글이든 그냥 넘어가지지 않는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파울라 모더존 베커의 그림을 좋아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들어 올림'에 대한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들어 올림'은 '여기 있음'을 증명하는 것. 증명을 위해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 소소하고 단정해 더 마음이 간다.   


ㅡ 


어린 시절(아마 대여섯 살 무렵), 우리 두 남매가 가장 많이 한 놀이 중 하나가 동굴놀이였다. 피아노 의자와 스탠드 옷걸이, 책상 의자를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놓고 그 위에 이불을 올리면 마치 텐트같은 형태가 된다. 우리는 그곳을 동굴 기지 삼아 휴대용 랜턴과 간식을 챙겨 들어가 몇 시간이고 나오지 않았더랬다. 마치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어른들이 우리를 못찾을 것처럼.  


어른이 되고 종종, 이렇듯 어딘가로 당당하게 숨어들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한편으로는 누군가 찾아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면서도. 이 책을 덮고 난후 별안간 떠오른 기억이요, 생각이다. 문득, 나는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얼마나 쏟아내며 살고 있을까.   


ㅡ 


읽으면서, 이 작가는 나와 성향이 참 다르구나... 싶었다. 그가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상상한다면, 나는 늘 정착할 곳을 머릿속에 그린다(살면서 이사도 거의 다닌 적이 없으면서). 북향의 집을 선호하는 반면 나는 남서향을 집을 선호한다(이것도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부터이지만). 저자는 식물을 잘 키우는 사람보다는 꽃을 잘 꽂는 사람에게 끌린다는데, 나는 정반대다. 그럼에도 이입해서 읽을 수 있었던 까닭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고독'이라는 공통 명제 때문이 아니었을까. 


저자는 그림 속 마르트 드 멜리니가 언제나 혼자서 부유하는 듯하다고 했는데,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그가 이 글을 얼른 마치고 푸른 내음이 나는 고요한 어느 시간과 공간으로 침잠해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 같다.   


제목이 '여름의 피부'인데, 왠지 늦가을에 다시 읽고 싶다.
모든 색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계절에 푸른 그림을 앞에 두고. 





♤ 출판사 지원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