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태왕 담덕 1 - 순풍과 역풍
엄광용 지음 / 새움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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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아홉 해의 인생을 불꽃처럼 살았던 담덕. 한국인으로서 광개토태왕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으나 사실 사료는 많지 않다. '광개토대왕 능비'에 나온 내용 외에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했으니 결국 멸망한 나라의 왕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우리는 '광개토태왕'이라는 다섯 글자에 늘 가슴이 뛴다(어쩌면 억압 당했던 근대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371년, 고국원왕 41년. 소설은 고국원왕 재위 마지막해 봄에서 시작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재위 12년 당시 연나라와의 전쟁, 근초고왕의 왕자 시절과 즉위 과정 등을 간략하게 짚으며 동시에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당시의 국제 정세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중원의 시대 상황을 복잡하지 않게 설명하고 있다.  


1권은 대왕 사유가 벼르고 벼르던 수곡성 전투를 중심으로 고구려 태자 구부와 왕자 이련, 야심가 하대용과 하대곤, 숨겨진 왕족 해평, 한순간에 왕자비에 오른 하연화, 연화를 연모하는 추수, 대상을 꿈꾸는 두충과 사기 등 다양한 인물들이 저마다의 욕망을 드러내며 시작한다.  



첫 장을 펼치면서, '고국원왕 41년'을 읽고 1권은 고구마 좀 삼키겠구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책장은 막힘없이 넘겨졌다.  


대왕 사유는 백제와의 전쟁에 있어 반대론자들의 수가 만만치 않고, 농사철에 모병으로 인한 민심이 흉흉하다는 사실, 무엇보다 태자 구부가 백제와의 전쟁은 국력 소모일 뿐이라며 전쟁불가론을 주장했음에도 2년전 백제 대왕 구에게 당한 수모를 잊지 못해 끝까지 전쟁을 밀고 나가면서도 자기가 일면 과하다는 것을 알기에 마음 한편으로 못내 불편하다. 거기다 한 달 이상 계속되는 가뭄으로 민심은 갈수록 흉흉해졌고, 국상을 비롯한 대신들은 가뭄과 곧 닥쳐올 우기를 이유로 전쟁을 반대하면서 정히 하겠다면 원정을 수확기가 지난 다음으로 미루자고 얘기한다. 그러나 대왕 사유는 요지부동이다. 이렇게 벽창호같은 자가 왕을 하고 있으니... . 전쟁이란 국가적 사안이다. 그런데 왕이라는 자가 앞뒤좌우 따지지 않고 오로지 복수혈전만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안타깝다. 예순 살 늙은 왕의 아집은 독일 뿐이다(이런 면에서 쉰 살이 넘은 백제 대왕 구(근초고왕)는 사유와 아주 다르게 그려진다). 


파계승 석정은 사막의 소소초에 빗대어 고구려가 현 상황에서 우선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간언한다. 뿌리를 튼튼히 하고 미래를 대비해 내실을 다지라는 것. 나라의 기틀을 재정비하고, 장유유서와 군신유의를 지키며, 인재 배양과 백성의 풍요를 우선해야 한다. 석정은 사유에게 불교를 통해 백성을 통합하고 국가의 기틀을 굳건히 해야 한다고 말한다. 석정은 태사 구부를 만나 불교가 고구려에 정식으로 인정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백 년 전에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온 과정과 백성들 사이에서는 널리 펴져 있음을 알린다. 또한 불교의 유래와 불교가 국가에 미칠 영향까지 얘기하면서 사유에게 그랬듯 불교를 통한 단합된 강력한 국가를 세우고 대덕의 군주가 되어야함을 설파한다. 우리가 알고 있듯 소수림왕의 치세가 벌써부터 보이는 듯 하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든 권력자들의 결혼은 단순한 결혼이 아니다. 왕자 이련의 혼사는 연나부 대 계루부, 왕권 대 신권, 그야말로 정치 싸움이었다. 거기다 왕위 탈환을 꿈꾸는 숨겨진 왕족 해평과 그를 추대하고자 하는 하대곤까지 이들의 싸움에 전략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개인적으로 앞으로의 전개가 궁금해지는 인물은 두충과 사기다. 각자의 신분을 벗어던지고 대상이 되겠다는 두 사람 또한 적대적 관계이자 고구려 동부욕살 하대곤과 백제 태자 수에게 각각 적籍을 두고 있으므로 이들 역시 정치판에 엮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또 한 사람, 파계승 석정. 나는 이 사람의 정체와 의도가 진심 궁금하다. 


사유는 단 한 번도 구를 이기지 못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질만도 한데, 심지어 적의 코앞에서 죽음에 이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역사상 왕으로서 가장 참담한 죽음이 예견된 평양성 전투를 목전에 두고 1권을 마무리 한다. 역사란 어느 관점에서 읽느냐에 따라 기분이나 느낌이 달라진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사족.
1. 고구려의 전렵, 천제 의식, 형사취수제의 폐해, 동맹제 등도 사이사이 서술하는데, 이러한 관습이나 문화에 대한 내용도 재미있다.
2. 백제 태자 수는 전술면에서 탁월한 인물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2. 무술, 무예, 무도의 차이를 이제야 알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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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의 여행 페이지터너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빛소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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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역에서 만난 두 남녀. 시작부터 이 남자, 참 애틋하기도 하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과하지 않은 절제된 애절함. 하이델베르크로 향하는 만원 급행열차 안에서도 그들만의 공간에 있는 두 사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지 얼마 되지 않아 헤어져야만 했던 그들은 10년 만에 재회했다.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던 불가피한 사정으로 그들은 서로를 잊었다고 여겼다. 아니 의식하지 못한 상태로 안정적이고 평온한 삶을 살아갔다. 그러나 장막이 거두어진 순간, 남자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ㅡ 


호텔에서 젊은 남자와 눈이 맞아 달아난 부인으로 인해 투숙객들 사이에서 격한 논쟁이 벌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달아난 부인의 행실을 두고 천박하고 비도덕적이라며 비난할 때, 유일하게 그녀의 입장이 되어 얘기하는 화자는 마지못해 결혼 생활에 이끌리기 보다는 열정적으로 본능에 충실한 여자가 더 정직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거센 논쟁이 주먹다짐으로까지 번지기 직전, 노년에 이른 영국인 C부인이 나서서 이 문제를 중재한다. 화자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얼마 후, 그녀는 화자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꺼낸다. 



■ ■ ■



두 편의 중편소설을 담은 이 책은 과거 한 때의 추억을 잊지 못하는 남자와 짧지만 이후의 삶에 영향을 미쳤던 사건을 가슴에 묻어 둔 여인의 이야기다.  


[과거로의 여행]은 유부녀를 사랑하게 된 한 청년이 긴 세월 동안 그녀를 잊지 못하다가 재회하고, 그 간절한 마음이 한 치도 변하지 않았다는 확신으로 밀회를 떠나지만 불결한 호텔방에서 순간적으로 과거는 그저 과거에 불과할 뿐임을 깨닫는다. 그런데 루드비히는 왜 그토록 그녀에게 집착할까? 유년시절부터 가난으로 인한 결핍과 굴욕감을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성인이 되어서도 벗어버리지 그에게 그녀의 따뜻하고 섬세한 배려와 진솔한 다정함은, 어쩌면 살면서 처음이자 유일하게 편견없이 받아들였던 호의였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드비히를 보고 있으면 언제나 자기편을 들어줄 절대적 사랑에 대한 갈망이 느껴진다. 박제된 지난 과거가 현재에도 변함없을 거라고 여겼던 한 남자의 어리석음이여. 



[어느 여인의 삶에서 24시간]은 태어날 때부터 아무런 부족함 없이 유복한 삶을 살다가 남편의 죽음을 계기로 빈둥지증후군으로 인한 심한 상실감과 우울증을 겪고 있는 여인이 등장한다. 여인은 카지노에서 돈을 탕진한 생면부지의 젊은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게 되고, 소설은 그녀의 내밀한 심리를 따라간다. 여인은 그 청년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건 아닐까? 상실감과 존재감의 혼란에 시달리며 삶을 포기한 채 권태와 외로움에 빠진 현실을 헤쳐나오지 못해 허우적대는 자신이, 욕망과 탐욕으로 모든 것을 잃고 절망에 빠져 삶의 의지를 놓아버린 젊은이의 모습과 닿아있다고 느껴 그를 구원해주고자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자신의 역할을 찾아 스스로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나, 타인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설령 도박중독자 청년을 구원해 돌려보낸다고한들, 그가 떠난 빈 자리는 또 어떻게 채우겠는가. 그녀에게 있어서 이 고백은 흐릿하게 남아있던 마지막 한 줌의 회한이 아니었을까.  



ㅡ 



어떤 악의 없는 외도나 신분 혹은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진 것(그것도 첫눈에)을 두고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는가? 작가는 이에 대해 사법기관은 보편적인 윤리와 관습에 따라 판결을 내리겠지만, 개인적으로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얘기한다. 소설 속 화자의 주장처럼 정숙한 아내였던 앙리에트와 청년과 눈이 맞아 달아난 앙리에트 사이에는 인간 자체로서의 차이는 없다. 그들을 바라보는 타자의 시선이 달라졌을 뿐. 사실 도덕성에 대한 잣대 또한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고, 도덕과 윤리는 시대에 따라 번하고, 또한 그에 있어 절대성을 강요할 순 없지 않나.  


아무튼, 아직 겪지 않은 미래의 내 마음을 장담하지 않는다면 쉽게 남을 비난하지 못할 터다.
또 아무튼, 문장과 분위기가 상당히 매력적인 소설들이다. 




74.
더는 현실이 아닌 과거를 향해 애매모호한 질문을 던지는 그림자, 살아남으려고 하지만 더는 그럴 수 없는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그녀와 그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지만, 끊임없이 과거의 흔적을 찾으려고 애썼던 것은 아니었을까? 발아래 드리워진 저 검은 유령처럼 그들은 헛된 노력에 힘을 탕진하며, 달아나고 멈추는 유희를 계속한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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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예술 - 포스터로 읽는 100여 년 저항과 투쟁의 역사
조 리폰 지음, 김경애 옮김, 국제앰네스티 기획 / 씨네21북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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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사슬에 묶여 있다면 우리 모두가 사슬에 묶여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난민(이민자), 페미니즘, 반전 및 반핵, 전쟁 학살, 노동자, 성소수자 차별, 인종차별, 기후 위기 등 지난 100여 년 동안의 인권과 환경에 대한 저항 운동에 관련한 포스터와 그 설명을 수록한 화보집이다. 포스터는 190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당시의 사회적 이슈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포스터도 포스터지만 이 책을 통해 몰랐던 사실이 의외로 많았다는 것(강제 불임 수술,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저항과 시위 등)과 과거 전쟁에 대한 반대 운동과 시위가 적지 않았음에도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정확한 용어 표기를 잘 모르겠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거의 없다는 점이 떠올랐다(나만 모르는 건가?) 





 




수록된 작품들 대부분이 무척 인상적이지만 그중 몇 가지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1994년부터 1997년 사이에 유엔난민기구에서 전 세계에 배포한 홍보물은, 난민과 '우리'가 어디가 다르냐는 질문을 제목으로 레고 피규어를 이용해 직접적이나 거부감없이 제작되었는데, 포스터 아래를 보면 '제발 난민에게 화재지 마세요 (후략)'라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제발 화내지 마시라. 


조시 맥피가 2016년에 사람들의 이동을 제한하는 데 저항하기 위해 디자인한 딥틱에서 '그 누구도 불법인 사람은 없습니다'라는 문구를 썼는데, 존재 자체가 불법인 사람은 없다는 의미가 와닿았다. 각국 정부가 자국민의 안전, 보건, 질서 유지를 목적으로 이동을 제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바다. 그러나 현재의 국제 사회를 둘러보면 누가 '불법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여성 참정권에 대한 포스터 중 로즈 세실 오닐이 디자인한 작품도 눈에 들어온다. 'Give Mother the Vote, We Need It.' 이 포스터에 오닐의 서명이 독특하다. 뒤쪽 큐피의 발 뒤쪽에 마치 걷고있는 다리처럼 보이는 사인이 있는데, 설명처럼 행진에 동참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 재치있다. 


ㅡ  


좋아하는 화가 케터 콜비츠의 작품도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그의 작품이 포스터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는데, 이 포스터에는 노동자와 어머니(여성)이라는 두 요소를 담고 있다. 전쟁이 초래한 참혹함을 어머니와 아이들로 표현했는데, 산 자보다는 죽은 자에 더 가까운 어머니의 표정에는 강인한 저항의 힘이 느껴진다. 


반전 포스터 중에 전쟁은 인간만이 아닌 모든 생명 차원에서 접근하는 로레인 슈나이더의 해바라기 포스터, 반핵 포스터 중 더크 베터의 콜라주 포스터가 무척 인상적이다. 1982년에 제작된 폴란드 단결 운동 포스터는 붉은 색 바탕에 부리에는 올리브 가지를 물고 있고 몸통 아래에 무한궤도가 돌고 있는 기계 비둘기가 그려져 있는데, 상당히 임팩트있다. 이 포스터에 담겨 있는 내용은 삽화에서 보여지는 것 이상으로 안타깝다. 


"지친 자여 모두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착취하겠노라..." 자본주의를 넘어 신자유주의를 대변하는, 더 이상의 적절한 문구가 있을까 싶다. 1978년 루스 스텐스트롬이 제작한 삽화가 없는 포스터인데, 이 포스터의 전체적인 설명을 읽어보면 지금 당장에 이 포스터를 사용한다해도 괴리가 없을 듯 하다. 


시민권 운동가 프랭크 시에시오르카가 제작한 포스터는 비도덕적이고 외설적인 작품이라고 비난받는데, 자유의 여신과 정의의 여신이 여덟 명의 경찰에게 둘러싸여 윤간당하는 장면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설명에는 당시 흑인을 상대로 한 경찰 폭력의 현실을 지적하고 있음인데, 제목은 역설적으로 '모두를 위한 자유와 정의'다. 사실 이러한 포스터를 보면 생각이 많아진다. 주장하는 바를 강력하게 전달할 수 있겠지만, 정작 전달하려는 바를 인지하기 전에 불편함에 외면당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평등은 인간의 권리」 라는 이 흔한 말, 초등생도 학교에서 교육받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 말이 실현되는 게 이토록 어려운 세상이다. 


ㅡ 


이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아니시 카푸어가 서문에서 쓴 문장들에 공감할 수 밖에 없다. 시위는 결사의 자유를 주장하는 방법이다. 개인의 목소리가 모여 다수의 목소리, 더 나아가 한 세대 전체의 목소리를 담아 낸다. 이는 자유와 권리에 대한 의지, 억압과 강요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결연하고 절박한 몸부림이다. 그래서 말한다. 단결하라. 


포스터에 대한 설명도 상당히 구체적이라서 포스터와 당시 시대상을 연계해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고, 사이사이 각 분야의 사회운동가들의 글들도 기억에 남는다. 이 책은 포스터이기 전에 좀더 나은 세상으로 변화하고자 저항하는 예술인들의 작품집이다. 삽화와 문구가 어느 작품은 재치와 위트로 무장하기도 하고, 어느 작품은 암울하고 충격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다양한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공통하는 부분은 인간 존엄성, 정의와 평등, 종차별 없는 생명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현재는 이 포스터 이면에 보이지 않는 이들의 저항과 투쟁으로 얻어진 것이라는 사실, 그래서 이제는 그 역할을 우리 모두가 함께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회적 문제를 다룬 그 어떤 문헌보다 직접적이고 사실적으로 와닿은 책이었다. 가능하면 한 번은 읽어보기를 권한다.  



113.
모든 사람과 모든 사회는 저항과 거역의 문화가 필요하다. 자본가,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비폭력 저항주의자를 통틀어 국가기관을 운영하는 이들이 권력을 남용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아룬다티 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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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 과학, 어둠 속의 촛불 사이언스 클래식 38
칼 세이건 지음, 이상헌 옮김, 앤 드루얀 기획 / 사이언스북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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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과학은 지식을 추구하는 완벽한 도구라고 할 수는 없다. 과학은 우리가 가진 최선의 도구일 뿐이다.
 



우리는 2019년말부터 2021년까지 '코로나19'라는 캄캄하고 긴 터널을 지나왔고, 현재에도 완전한 종식은 커녕 수그러들었던 확진자 수가 다시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그 몇 년 사이 온갖 소문이 나돌았더랬다. 코로나19의 원인부터 예방.치료에 이르기까지 어처구니 없는 말들이 떠돌았고 이로인해 생명을 위협받는 이들도 있었다. 작금의 시대에 이 책이야말로 새삼 시의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유사 과학이 정치, 경제, 종교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짚으면서 유사 과학의 폐해에 대해 심도있게 얘기한다. 또한 과학과 유사 과학의 차이를 이야기하며 과학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위해 과학의 비판적 방법론을 소개하면서 동시에 과학을 역사, 종교, 사회, 교육 등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한다.  


저자가 과학자로서 가장 노력하고, 이 책에서 강조하는 점은 과학의 대중화다. 그런데 정작 과학과 기술이 극소수의 사람 손에 들어가 공공의 이익과 대중의 비판 능력을 저하시키는 동안 대중 매체의 콘텐츠들이 앞서 미신과 유사 과학을 조장하고 있다. 저자는 긍정적 의심의 정신을 강조한다. 이는 과학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데, 문제는 이러한 의심의 정신을 가르치는 곳이 없다. 그 이유는 회의주의, 의심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으로만 사용되어 일반적으로 기피 대상이고, 금전적 이득을 취하려는 자와 여론에 영향을 미치고 싶어하는 자들, 그리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이를 이용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일례로 UFO에 대한 환각을 대표하는 것은 상업성이다. 이 둘은 맞물려 요정, 괴물, 마녀 등 어린 시절의 기억을 소환해 다각적으로 돈벌이에 이용한다. 심령 치료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의 약점을 파고들어 이를 먹이 삼아 증식한다. 과학의 오류는 명확해서 실패할 경우 교정이 가능하다면 심령 치료는 오류 자체도 모호하고 이를 드러내지도 않는다. 이처럼 헛소리와 속임수는 정치, 사회, 종교,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은 사실들에 열광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악마를 숭배하고, 누군가를 제물 삼아 위기를 넘기려는 시도는 불안정한 시대와 맞물려 나만 무사하면 된다는 사고 방식과 닿아있다. 그래서 과학보다는 유사 과학에 더 가까워지는 것이라고 내 나름으로 짐작해 본다. 


ㅡ 


저자는 무엇보다 회의주의(의심성)의 가치에 대해 역설한다. 확증을 잡고, 실질적인 논쟁이 가능하도록 해야하며, 권의주의에 빠지지 않아야 하고, 반증 가능성을 점검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신중하게 설계된 실험이다. 또한 인간으로서의 약점을 인식하고 최대한 폭넓게 여러 의견을 들으며 자신이 저지른 오류나 실수를 거울삼아 자기 비판을 하는 것이 과학자의 임무다. 인간이 갖는 한계를 인지하고 더 나은 데이터를 찾으려 노력하며 기회주의에 물들지 않고 지속할 가치를 잃지 않아야 한다.  


과학의 핵심은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는 것과 모든 아이디어를 회의적인 시작에서 철저히 조사하는 것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다. 이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만 헛소리로부터 심오한 진리를 구별해 낼 수 있다. 즉 창의적인 사고와 회의적인 사고의 합작이 필요한데, 이 슬기로운 합작이 과학을 성공으로 이끄는 열쇠다. 의심할 줄 아는 정신과 경이를 느낄 줄 아는 감성이 필요하다. 저자는 이 두 가지를 결합시키는 것이 공교육의 역할이라고 얘기한다.   


과학적 사고는 인류의 태동부터 함께해 왔고, 과학적 성향은 어느 시대, 장소, 문화에서든 우리 안에 깊게 자리하고 있다. 이는 과학이 생존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누구나 과학적 소질을 타고 났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과학은 어려운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어린시절의 뜨거운 과학적 호기심이 지속되지 않는 것에 대한 원인을 무관심, 부주의, 회의주의에 대한 불안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과학을 대중화하기 위해서는 일반 청중에게 이야기할 때 쉬운 어휘를 사용해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대중매체나 일반 대중을 위한 강연, 초중고등학교의 교재에서 과학의 핵심 내용과 그 방법을 전달하기 위해 애써야한다고 말한다. 과학은 과학자만의 것이 아니라 인류 공동체 전체에 의해 이해 및 수용되어야하고, 그러한 일들은 과학자가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ㅡ 


과학은 경이의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만, 대중화를 소홀히 한 까닭에 틈새를 허용했고 그 자리를 사이비 과학이 채웠다. 어떤 것이 지식임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수용되기 위한 적절한 증거를 제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널리 이해했다면 유사 과학이 발붙일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나쁜 과학이 좋은 과학을 몰아내고 있다.  


질병, 의학, 에너지, 농업 등 어느 한 분야도 과학과 기술없이는 실현될 수 없다. 과학을 포기한다는 것은 단순히 삶의 편리성 저하가 아니다. 물론 무기, 생체 실험, 상업적 이용 등 부정적 측면도 있다. 이러한 과학의 힘은 과학자와 정치인에게 책임을 요구한다. 저자는 기술 발전이 가져올 장기적인 결과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고, 전 지구적 관점과 미래 세대의 관점을 가지고 민족주의 및 쇼비니즘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 우리 모두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자 의무라고 지적한다. 좋든 싫든 우리는 과학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러려면 차라리 과학을 최대한 이용하는 편이 낫다. 미신과 유사 과학의 방해를 이겨내고 과학의 본성을 신뢰하고, 과학을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과 여전히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전쟁(무기)로 인해 과학이 불온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과학이 추구하려는 본질적 진실은 민족적.문화적 편견과 대체로 무관하고, 국경을 따지지 않으며, 과학 자체는 국적을 초월한다. 그래서 오히려 이러한 요인들로 과학자 대부분이 정치 및 사회 비판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음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과학과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공교육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전달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럼으로써 더 나은 공동체 의식을 함양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5장의 속임수와 비밀주의를 군사와 무기, 중세 문헌의 사례를 들어 얘기하는 부분에서 무척 흥미로웠고, 12장의 헛소리 탐지기는 격하게 동의한다. 특히 다른 사람과 논쟁하기 전에 자기 주장을 헛소리 탐지기로 점검하라는 말씀이 나 스스로에게도 적용 가능한 일이라 무척 좋았다. 특히 23장에서 기초과학의 예산 축소에 대한 정부를 향한 쓴소리는 깊이 공감하는 바다.   



저자의 과학에 대한 애정을 책 전반에서 느낄 수 있다. 유사 과학과 그로인한 피해, 과학의 대중화와 더불어 인류에 미칠 영향까지 고민하며 과학자가 가져야할 소명 의식을 피력한다. 생각보다 쉽게 읽을 수 있고, 과학자가 쓴 책에서는 드물게(?) 뭉클함까지 전해진다. 과학의 대중화를 강조하는 저자의 책답다라는 생각이 든다.  




사족
그야말로 가독성은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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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터베리 이야기 - 상 을유세계문학전집 119
제프리 초서 지음, 최예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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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우리는 열심히 행복을 추구하지만, 곧잘 길을 잘못 들어선다.



아주 오래 전부터 한번은 읽어야지했던 책이다. 많은 핑계로 밀어놨던 제프리 초서의 책을 기회가 닿아 읽는다. 여러 선입견으로 나름 긴장하며 책을 펼쳤는데, 그야말로 옛날 이야기 한마당이다. 깔깔대며 읽다보니 어느새 한 권을 훌쩍 읽었다.  









4월이 되면 여러 나라의 순례자들은 그들이 아플 때 도와주었던 거룩하고 복된 순교자를 찾기 위해 영국의 캔터베리를 향해 길을 나선다. 화자 역시 캔터베리로 순례길을 떠날 채비를 하고 서더크 지방의 타바다라는 숙소에 묵게 되었는데, 밤이 되자 스물아홉 명 정도의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또한 모두 순례자로서 캔터베리로 가는 길에 운연히 만나 동행하게 된 사람들이다. 기사, 수습기사, 수행원, 수녀, 신부, 수도사, 대학생, 변호사, 시골 유지, 잡화 상인, 목수, 직조업자, 염색업자, 태피스트리 제작자, 선장, 의사, 귀가 약간 먼 어느 부인, 장원 감독관, 방앗간 주인, 법정 소환인, 면죄부 판매인, 식품 조달업자, 청지기 등 직업도, 신분도, 살아온 환경도 다양하다.  


숙소 주인은 그곳에 머무는 손님들에게 순례길 동안 그들을 즐겁게 해줄 게임을 제안한다. 그 제안이란 캔터베리로 갈 때 두 개, 돌아오는 길에 또 두 개씩 각자 가장 교훈적이면서도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 1등을 한 사람에게는 동행했던 순례자들이 돈을 모아 마지막날 저녁을 대접한다. 숙소 주인은 이 순례에 동참해 안내자를 자처하고, 모든 이들은 만장일치로 동의한다. 이제 그들의 유쾌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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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권에서는 법정 변호사, 어느 부인, 수사, 법정 소환인, 대학생, 상인, 수습 기사, 시골 유지가 이야기를 진행한다.  


그들의 이야기에는 고대 아테네가 등장하기도 하고,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해학 넘치는 소동극이 펼쳐지기도 하며, 몽골의 사막, 그리고 이국적이고 환상적인 사랑의 이야기가 아름답게 그려지기도 한다. 서술자들만큼이나 다채로운 이야기들이다. 


부정부패, 사랑과 질투, 삶의 모순, 매순간 우리에게 던져지는 딜레마, 한 치 앞을 모르면서도 부질없는 탐욕과 욕정으로 다투며 제 발등 제가 찍는 인간의 어리석움, 노년의 회한, 당시 여성들에게 강요되어진 인내와 순종 등을 해학과 풍자로 유쾌하게 써내려갔다. 읽다보면 우리나라의 옛이야기를 읽는 듯한 기분도 드는데, 아마도 저자가 독자에게 던지는 교훈적인 메세지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다. 육체와 정신의 족쇄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 사랑은 위대하나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것, 나이가 들어도 꺼지지 않는 허세, 거짓말, 분노, 탐욕 등 네가지를 들면서 노년이 갖는 어리석음은 미래가 아닌 지난 과거에 연연하는 것, 인생사 뿌린대로 거둘 것이니 잘 뿌리며 살라는 것 등 우리에게 무척 익숙한 이야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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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었던 이야기는 <법정 변호사의 이야기>와 <바스에서 온 어느 부인의 이야기> 서문, 그리고 <대학생의 이야기>다.  


먼저 <법정 변호사의 이야기>에서 콘스탄스를 미워하고 위기로 몰아넣는 술탄의 모후들이 악마 혹은 악의 뿌리로 표현되는데, 이는 지극히 기독교적 시각에서 쓰여졌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콘스탄스를 사랑했던 술탄왕과 이교도(기독교도 입장에서)들은 개종하지만, 두 모후와 콘스탄스를 욕망했던 젊은 기사는 개종하지 않았다. 시리아에서 기독교도들과 개종자들을 학살하고 콘스탄스가 3년간 바다를 떠도는 과정은 박해와 순교를 상징하는 듯 보인다. 콘스탄스의 남편은 이교도였지만, 개종자다. 즉 기독교도가 아닌 사람은 모두 신이 버린 악마와 다름없다는 얘기다. 또한 연약한 콘스탄스가 건장한 남자를 상대로 몸싸움에서 이겼다는 설정이 상징하는 것, 신의 전능함을 부각시킨다. 그야말로 지극히 기도교적인 시각에서 쓰여진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는데, 작가가 십자군 전쟁 이후 세대임을 감안하면 납득할만하다.


<바스에서 온 부인 이야기>에서 부인은 서문에서 이렇게 얘기해도 되나싶을 정도로 노골적이다. 가정내에서 남성이 여성에게 갖는 기득권에 대해 비판과 가정 및 사회에서 여성이 가져야할 당연한 권리에 대해 호탕하게 주장하는데, 아이러니는 서문의 마지막에 있다. 네 번이나 결혼하고, 스무 살 어린 남자와 다섯 번째 결혼에 이르기까지 주도적으로 끌고가지만 정작 결혼 이후에는 남편의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는 점이다. 부인의 개인사를 통해 당시 여성에게 있어서 결혼이 갖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그 연장선으로 부인의 본격적인 이야기에서는 가정생활에서 여성의 주도권과 남편의 통제권을 주장하는데, 읽으면서 통쾌함을 느끼기도. 


<대학생의 이야기>에서는 순종의 끝판왕이 등장한다. 아내를 시험하는 후작의 작태는 어처구니 없는데, 초서는 이 이야기를 끝맺으면서 결혼한 남자들에게 그리셀다 같은 여자는 절대 없으니 자기 아내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아내들에게는 겸손 때문에 입에 자물쇠를 채우는 일은 하지 말라고 얘기한다. 또한 여성들에게 침묵하지 말고 말대꾸를 하고, 순진해서 속지 말고, 적극적으로 지배권을 잡으라고 충고하는데, 결정적으로 남자들이 기분 나쁘게 할 때 참지 말라고 강력히 주장한다. 내가 이렇게 맛없이 썼지만, 초서는 상당히 맛깔나게 썼다. 


상권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시골 유지의 이야기>는 조금 씁쓸하다. 아내의 정절보다 약속을 더 중요시 여기며 아내가 한 약속을 지키라고 아우렐리우스에게 보내는 아르베라구스, 도리겐을 가엾게 여겨 경제적 손해를 감수하면서 약속을 무효화해준 아우렐리우스, 아우렐리우스의 고귀한 행동에 감동받아 채무 비용을 면제해준 천문학자. 화자는 이들 중 누가 가장 관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냐고 묻는다. 그런데 그들의 관대함에 도리겐의 의견은 없다. 도리겐의 입장에서 애초에 이들이 관대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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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위에서 언급한 이야기들은 나의 입장에서 흥미로웠을뿐, 더 재미있는 이야기는 그외의 이야기들이다.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밤의 꿈> <베니스의 상인>, 박지원의 <양반전>, 동화 <마법에 걸린 개구리 왕자>, 애니메이션 <슈렉> 등이 떠오를만큼 발랄하고 유머러스한 소동극들이 입가를 끌어올려준다. 무엇보다 그들의 이야기에서 당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도 큰 장점이다. 


하권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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