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 일기 세라 망구소 에세이 2부작
세라 망구소 지음, 양미래 옮김 / 필로우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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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일기를 써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쓰기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쓰지 않고는 시간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 방법을 단 한 가지도 떠올릴 수 없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한 기억, 일기, 망각에 관해 이야기하는 에세이다.


저자는 일기 쓰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누군가가 자기의 일기를 읽기 바란적은 단 한 순간도 없으면서 일기를 고쳐쓰는 저자의 습관을 다른 사람들은 납득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나는 충분히 납득한다. 고쳐 쓰는 이유는 시간적 거리를 두면 당시 나의 감정을 나 스스로도 잘못 판단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때와는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해서 종종 첨언을 달아놓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세라 망구소는 누가 자신의 일기를 읽건 말건 신경쓰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건 나랑 좀... 다르네. 나는 누가 내 일기를 읽는 건 내키지 않는다.  


다시 읽은 일기 중에 1996년 일기에는 중요한 일이 하나도 없었던 것 같아서 일기를 통째로 날려버리고, 고등학생 시절에 쓴 일기는 그 자신이 보지 못하게 하고 싶어서 찢어버렸다고 한다.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일만 기억하고 싶다는 바람, 이게 가능할까?


세라 망구스는 전날과 비교해 달라진 점을 일기에 기록해 두었는데, 만약 달라지지 않은 점만 기록한다면 어떨지 궁금해 한다. 나도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 곰곰 생각해보니 그날이 그날같아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면 꽤 시간이 지난 뒤에는 무엇이 반복되고 있는지 모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말처럼 어쩌면 달라지지 않는 점을 기록하는 것이 더 진실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ㅡ 


저자는 유독 기억에 집착한다.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재미있는 에피소드 정도로 남게 될테지만, 어쩐지 본인에게는 씁쓸함으로 남을 것 같다. 어느 때부터인가 점점 기억해야할 것들을 놓치고 두통이 잦아져서 2주 전에 건강검진할 때 뇌 MRI(MRA)를 했는데, 내 뇌(혈관)의 나이는 실제 나이보다 10년도 넘게 젊다는 결과가 나왔다. 다행이군. 그런데 기억력은 왜...? 세포의 문제인가?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최초의 기억은 무엇일까? 잘 모르겠다. 여섯 살 이전의 기억은 파편적으로 혹은 단편적으로 떠올려지는데, 그때가 정확히 몇 살 때인지는 대체로 확실하지 않다. 이는 중학교 시절도 마찬가지. 인간의 뇌와 그 뇌에 저장된 기억의 세계는 오묘할 따름이다. 



사실 일기를 쓴다고 해서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다. 만약 일기를 솔직하게 기록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기억은 충분히 왜곡될 수 있다. 그 기록이 거짓이라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할테니 말이다. 


저자는 출산과 양육의 경험을 통해, 그리고 자신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아이를 통해 비로소 망각의 효용성을 깨닫는다. 그런데 우리의 뇌가 창고에 남겨놓는 기억의 기준은 무엇일까? 난 이것이 늘 궁금하다.  



책을 덮고, 늘상 일어나는 일들 혹은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일상, 그리고 가족과 기억에 대해 생각하다가 나는 그동안(미취학 아동이었던 시절부터) 써왔던 일기를 찾아 읽은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물론 찾아야할 기록이 있다던가, 갑자기 떠오르는 추억팔이로 아주 가끔 뒤적거린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많은 분량과 세월을 따져봤을 때 시쳇말로 일기는 가성비가 현저히 떨어지는 글쓰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왜 이렇게 열심히 일기를 쓰는 걸까?  


세라 망구스는 일기 쓰기에 있어서 '쓰는 행위' 자체,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말한다. 어쩌면 무목적성의 글쓰기야말로 진정한 글쓰기의 이유일지도 모를 일이다.   



일기에 멋을 부려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영화 <메멘토>가 머릿속을 휙 지나간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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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처미 다이어리 I&ME - 인문학과 경영철학이 담긴 성장일기
스타북스 편집부 지음 / 스타북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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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동안 쓸 수 있게 구성된 다이어리. 
만년형이라서 아무때나 시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보통 세 권의 다이어리를 사용하면서 날짜형은 한 권만, 나머지는 만년형을 사용하는 나로서는 딱 좋은 구성이다. 





 



내가 이 다이어리를 넘기다가 깜짝 놀란 건 사실 다른 데에 있다.
보통 다이어리에는 명문장이나 격언 혹은 잠언 등이 쓰여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물론 이 여기에도 있다. 사자성어까지), 이 다이어리에는 단편 소설 세 작품ㅡ어린 왕자, 노인과 바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ㅡ이 완역본으로 실려있다. '설마... 다...?' 라는 마음이 들어 앉은 자리에서 읽었는데, 정말 전체 내용을 다 실었다. 다이어리에 세계문학 세 작품이 들어있다니,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   


ㅡ 


전체적으로 살펴본 결과, 용도를 결정했다.
독서목록으로 사용할 요량이다. 매일 읽고 있는 책과 완독책을 기록하고 100자 전후로 한줄 정리를 해보려고 한다. 


예를 들어 2023년, 2024년, 2025년, 2026년 5월 5일에 읽은 책과 그 순간의 소감을 초간단 기록으로 한 장에 남겨놓는 것도 꽤 재미있는 일이 될 것 같다. 4년의 독서 기록을 한 권에 담는 것도 나름 의미있을 것도 같고.  


올해는 다이어리를 간단하게 가자했는데, 어째 더 많아진 것 같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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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심장 가까이 암실문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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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행복해지는 건 무얼 위한 거예요?" 
 


버지니아 울프의 <파도> 초독 당시 오십 여 페이지를 읽고 처음부터 다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처음으로 접했던 진정한(?) 의식의 흐름대로 쓴 소설이었는데, 그 작품을 능가하는 '의식의 흐름'이 등장했다. 


이 소설은 3인칭시점으로서 주아나, 오타비우, 리디아 각각의 관점에서 서술하며, 세월의 순서대로 전개하지 않고 무작위적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고간다  









이른 나이에 죽은 어머니의 부재, 아버지와의 짧은 삶, 숙모집에 얹혀 살았던 날들, 사는 법을 가르쳐 준 선생님, 사춘기, 기숙학교, 오타비우와의 결혼. 주아나가 살아온 길이다.  


숙제도, 혼자 놀이도 다 했다. 끊임없이 아빠에게 "나 뭐 해요?"를 묻는, 살아있는 작은 알 같은, 너무 마르고 조숙한 아이. 그녀를 세상 속에서 지탱해 주는 건 연민이다. 연민은 주아나 방식의 사랑이고 증오이고 소통이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공포와 고통에 대한 두려움과 무기력함을 순순히 인정했고, 살아 있는 모든 순간들이 고난 혹은 고통스러운 경험의 정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버지의 죽음은 크나큰 상실과 슬픔이었고 무거운 피로였다. 자신을 향한 숙모의 동정심을, 그리고 앞으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모든 동정심을, 그녀는 혐오했다.  


주아나는 자신의 유년시절이 불행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그녀는 자신의 불행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자신을 향한 섬뜩한 폭언이 마치 자신의 잘못인 양 제 뺨을 때리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벌을 내리는 것으로 불행을 상쇄한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묻는 선생의 질문에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소녀는 선은 사는 것이고, 악은 살지 않는 것이며, 죽음은 선악과는 다른 거라고 대답한다. 이렇듯 소녀는 살아야할 명분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학교 선생에게 느끼는 감정, 2차 성징 시작, 육체적 갈망. 주아나는 삶 자체를 발견하기 위해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고독 속에 던져놓는다. 그녀 자신조차 무엇을 갈망하는지 명명하지 못한다. 그녀가 고독 안에서도 귀를 기울인 건 내면의 행복. 주아나는 행복했던 순간 순간을 잊어선 안 된다고 되뇌이지만, 늘 잊는다. 주아나 뿐이랴. 모든 인간이 그렇다. 


ㅡ 


오타비우는 주아나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발가벗은 채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에게 끌렸다. 매혹적인 혐오감을 느끼면서. 인간의 관계 맺기에 큰 신뢰가 없는 주아나. 여기에는 사랑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다고 타인들과의 결속에서 과감하게 벗어나기는 어렵다. 주아나는 거짓된 사랑, 사랑하지 못하는 혹은 사랑받지 못하는 두려움에서 자유롭고 싶다. 고통을 감수하고 매일매일 순간순간 각성했으나, 오히려 더 깊이 가라앉는다. 


누구나 한 번쯤 그런 경험이 있지 않나? 목표 또는 목적한 바대로 가는 과정에서 희열을 느끼다가 막상 마지막 관문을 눈앞에 두었을 때 오는 왠지 모를 두려움과 불안,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닥치면서 막상 그것에 도달한 후 밀려오는 주체할 수 없는 허무감. 어쩌면 이 거추장스러운 감정들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것이 인간의 숨겨진 욕망이 아닐까.  


ㅡ 


오타비우는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약혼녀 리디아를 저버리고 만난지 얼마 안 된 주아나와 결혼했다. 리디아는 오타비우가 떠나는 걸 원하지 않지만, 떠난다고 해서 두렵지는 않다고 말한다.  


약혼자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떠난다해도, 그 이별이나 약혼자의 다른 여자와의 사랑까지 먼 훗날에 공유하게 될 소재에 불과하다는, 어떻게 되건 전 약혼자의 삶에 참여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사랑인가, 집착인가, 미련인가. 아니면 그와의 사랑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절대적 운명이라는 믿음인가. 자신이 그 흔적을 간직할 것이기에 그가 자신과 함께 한 순간을 잊어버리더라도 상관없다는 리디아의 말. 어떻게 하면 이러한 확신을 가질 수 있지?  


리디아의 힘이 '확신'에 있다면, 주아나의 힘은 '부정확성'에 있다. 주아나는 리디아가 평생 품었던 '작은 가족'에 대한 소망을 비웃는다. 결혼은 불행할 자유와 권태와 고독조차 허락하지 않는, 공동의 죽음을 향하는 것이라고. 자기가 결혼을 한 이유는 '오타비우가 원했기 때문'이며 자신은 오타비우의 생물적인 몸으로서만 그를 원한다고, 리디아에게 허세를 부린다. 그러나 리디아는 알게 된다. 주아나는 아직 진정으로 사랑을 한 적이 없고, 사랑을 통해 깨달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주아나가 갖는 사랑에 대한 갈망은 고통보다 더 우위에 있지만, 오타비우와 리디아는 그녀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도구로써 같은 선상에 있다. 더구나 사랑이 삶을 연장시키는 수단이 되기에 주아나는 태생적으로 집착하는 고립과 사랑을 동시에 갈망한다. 주아나에게 있어서 이 모순의 열쇠가 남편 오타비우에게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일찍 주아나를 떠났거나, 혹은 그녀를 불신했던 사람들. 끊임없이 종말을 향해 가는 주아나가 그들에게 바랐던 것은 그녀가 겉으로 드러내는 바와는 다르게 신뢰와 관심이었다. 주아나는 끊임없이 삶을 살아가기를 열망했다. 오타비우는 주아나를 떠나면서 작별을 고하는 편지를 남기는데, 그 편지에는 돌아올테니 기다려달라는 말을 남긴다. 그는 정말 돌아올 생각이 있었을까?  


ㅡ 


소설에는 주아나가 해리성정체장애가 있는 건 아닐까 의심되는 부분이 꽤 여러 군데에서 보인다. 악과 강인한 힘과 세상을 향한 차가운 복수를 갈망하는 주아나, 다른 한편에는 여성스러우며 단단한 애정을 통해 평온하고 따뜻한 삶을 소망하는 주아나.   


삶의 고리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그 연결이 늘 행복과 만족이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어느 누구의 인생도 그렇게 순탄치만은 않다. '난 계속해서 삶의 고리들을 열고 닫으며, 그것들을 내던지고, 시들고, 과거로 가득 채워진 채, 새로 시작한다 (p160)'.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숙명 아니던가.   


그녀가 찾아다녀야할 존재는 진심으로 사랑을 주고 받을 '연인' 혹은 어떤 대상이기 전에 스스로를 사랑해주어야만 하는 '그 자신' 아닐까.   


책을 덮으면서 주아나, 그녀의 소리없는 절규가 들리는듯 했다.
살고 싶다, 강하고 아름답게.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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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의 사랑 문지 스펙트럼
뱅자맹 콩스탕 지음, 김석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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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나는 여전히 불안하게, 엘레노르는 여전히 슬프게, P 백작은 여전히 우울하게. 



위의 발췌문이 아돌프와 엘레노르의 전반적인 감정선이다. 이 한 문장만으로도 이 소설을 짐작할 수 있다. 







   
아돌프의 일방적인 애정 공세로 시작된 사랑은 점차 상호관계로 흘러간다. 아돌프는 엘레노르가 자신과 비슷한 성향과 처지에 놓여 있어 동질감을 느껴왔었는데, 그와 상호작용을 한 이후로 엘레노르가 점점 외향적으로 바뀌어어가자 불만을 터뜨린다. 아돌프는 그녀에게 자신의 사랑만이 진정성 있다고 설득하며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막아서는데, 아돌프는 본인이 인식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녀의 약점을 잡아 가스라이팅하고 있는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의 관계가 시간이 흐를수록 입장이 바뀌어간다는 것이다. 아돌프의 욕망과 이기심, 엘레노르의 불안과 죄책감은 부적절한 두 사람의 관계에 끊임없이 충돌을 만들어낸다. 그것도 연애를 시작한 직후부터.


아들프는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마치 자신이 피해자인 양 행세한다. 그녀로 인해 자신이 얼마나 고통을 겪고 있는지를 강조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자식과 스스로에게 지운 엘레노르의 죄의식을 자극한다. 아돌프는 엘레노르가 자신과의 만남에 죄의식과 불편함을 느낄수록 그녀의 도덕성을 신성시하며 엘레노르를 향한 사랑에 더 불타오른다. 이러한 아돌프의 모순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은 아돌프는 엘레노르의 애원에 6개월간의 체류 연장을 부탁하고, 아버지는 의외로 아들의 요청을 승낙했다. 그런데 체류를 허가한 아버지의 편지를 받은 아돌프는 기쁨보다는 이 불편함과 답답함을 여섯 달이나 더 견뎌야 한다는 사실에 짜증스러워한다. 매사 이런 식이다보니 아돌프의 이중성은 독자로 하여금 분노를 유발시킨다는.  


아무튼 끊임없이 다투고 화해하기를 반복하는 연인은 행복을 가장하며 관계를 지속시킨다. 혹여 이 두 사람의 사랑이 결실을 맺는다고 하더라도 이 모습이 그들의 미래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마침내 P 백작이 아돌프와 관계를 끊으라고 명령하자 엘레노르는 아예 집을 나와버렸다. 물론 그녀는 아돌프에게 아무런 책임감을 가질 필요도 없고, 자신은 그에게 희생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이와 같은 결정은 그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생각이 나눠진다. 엘레노르가 속사포같이 쏟아낸 말들은 진심일까?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 급조한 변명인지, 아니면 아돌프와의 관계를 통해 자아감을 각성한 것인지... .


P 백작과의 별거로 엘레노르는 10년에 걸쳐 쌓아온 헌신과 정절의 결실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렸다. 자식을 버린 비정하고 헤픈 여자라고 손가락질을 당했으며 뭇 남성들의 노골적인 흑심에 노출됐다. 결국 그녀는 평생 동안 노심초사하며 조심했던 수렁에 스스로를 빠트린 셈이다. 여기에서 연인이 선택한 방법은 '모른 척 하기'였다. 괴로움과 고통을 함께 나누며 의지하고 위로해야하는 상황에서 서로를 비난하고 상처를 남기게 될까봐 침묵을 선택한 두 사람에게 감정적 연대란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아돌프는 자신을 선택한 엘레노르를 혐오하기까지 한다. 비밀과 가식으로 겨우 관계를 이어가는 그들의 미래는 불 보듯 뻔하다.   


두 사람의 도피는 계속 이어진다. 도망치듯 살아온 3년여의 시간 뒤에 아돌프에게 남은 것은 애틋한 추억도, 절절한 사랑도 아닌 후회였다. 사랑은, 엘레노르는, 이제 그에게 있어 멍에에 불과했다. 아돌프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인생을 되찾기 위해서 넘어야할 장벽은 엘레노르다. 그러나 정작 그가 넘어야할 것은 그 자신이 아닐까. 제 인생 어느 것 하나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아버지, 애인, 주변 시선에 의해 휩쓸리는 주제에 엘레노르를 이해하지 못하는 불공평한 세상에 맞서 언감생심 그녀의 기둥이 되어주고, 힘이 되어주겠다는 말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한 마디로 똑똑한 척은 다 하지만 제 분수와 깜냥을 모른다고 할 밖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돌프는 엘레노르를 원망했고, 그녀에 대해서는 권태와 연민만이 남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과 감정, 관계만 소비하고 있다. 아돌프의 결정적인 잘못은 엘레노르에 대한 감정이 의무감에 의한 동정만 남아 있을 뿐 사랑의 감정은 조금도 없다는 고백을 연인의 친구에게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친구를 통해 전해들은 엘레노르의 분노는 둘째치고 아돌프는 연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갖추지 않은 꼴이다. 


적어도 이들 사랑에 있어 용기 있는 사람은 엘레노르였다. 스스로 둘러쳤던 장벽을 벗어난 순간부터 그녀는 오롯이 자신의 감정과 욕구에 충실했다. 아이를 버린 비정한 어미라고 손가락질 받았으나 남편이 아이를 사랑으로 책임감 있게 돌볼거라는 확신이 있었고, 상당한 재산 증여도 과감하게 포기했으며, 바닥으로 끌어내려진 모욕과 평판을 감수했다. 그러나 그들 사랑에, 아돌프는 단 한 가지도 버리지 못했고, 지키지도 못했다. 심지어 자신의 처지와 장래에 대한 소망을 들먹이며 헤어져 달라고 간청하며 끝까지 피해자 코스프레를 했다.  


아돌프가 비겁하고 치졸하게 느껴지는 더 큰 이유는 엘레노르의 불행은 관습과 사회적 시선에 대항해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사랑, 그 하나만으로는 사회에서 작용하는 굴레와 운명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아돌프가 모를 리 없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강자가 약자에게 가해자 프레임을 씌우며 벼랑에서 밀어버린 격이다.  


ㅡ 


이토록 현실적이고 냉절하며 이성적인 치정소설이라니! 읽다보면 <마담 보바리>가 생각날 수 있으나 결이 확연히 다른 두 작품이다. 공통점이라면 무모하리만큼 사랑에 충실하고 그 책임을 다 한 사람은 여성이라는 것인데, 쓰다보니 어쩌면 더 절실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도 불현듯 든다.  



작가의 직업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소설 곳곳에서는 작가의 정치적 감각이나 성향이 나타난다. '속물적인 패들이 도덕이나 관습이니 종교니 하는 것에 관해 이론의 여지조차 없을 만큼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진 진부한 견해들을 마치 오랜 사색 끝에 찾아낸 가설이라도 되는 듯이 떠들어대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나는 그런 꼬락서니를 면박하고 싶어서 욕지기가 날 지경이다.(...) 오로지 그들이 확신하는 그 우둔한 신념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예외도 없을 만큼 당연하고 약간의 견해차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자명한 일반론을 듣다 보면, 무언지 모를 본능적인 반발심이 솟아나 그것들을 경계하라고 나에게 속삭이는 듯했다.(p2-23)'. 이 부분의 앞뒤를 읽다보면 정치 구조 특히 입법을 맡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된다. 이외에도 두 연인의 관계가 현대 사회의 정치적 구도와도 비슷해 보이는 점이 꽤 많다. 


이 소설, 엉뚱한 지점에서 흥미롭고, 적은 분량에도 할 말이 많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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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해의 철학 - 부패와 발효를 생각한다
후지하라 다쓰시 지음, 박성관 옮김 / 사월의책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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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를 읽어보면 자연에서 시작해 교육, 사회, 인문 등 다각도에서 사유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과잉 시대에 생산력이 아닌 분해력에 촛점을 맞춰야한다는 학자의 지적이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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