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그단스크 - 낯설지만 빛나는 도시에서
고건수 지음 / 효형출판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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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삶에서 공간이 중요한 이유는 그곳에 기억이 깃들기 때문이다. 



유럽 여행에 별 관심이 없는 편인데, 그나마 가보고 싶은 여행지가 대부분 소위 동유럽이라고 불리는 곳에 모여 있다. 지리적 위치와 역사에 대한 관심도 크지만 다른 이유를 들자면 문학 작가들에 있다. 산도르 마라이, 올가 토카르추크, 심보르스카, 헤르타 뮐러, 브루노 슐츠, 보후밀 흐라발 등 그들에게서 전해지는 딱히 정의할 수 없는 정서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정말 궁금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 책이 여느 여행에세이나 건축에세이보다 마음이 들어가졌고, 읽는 동안 무척 즐거웠다. 


건축가인 저자는 어느 도시, 어느 건축물을 일방적으로 찬양하지 않고, 본인이 느꼈던 아쉬운 점도 털어놓으며 도시의 역사와 정서, 그리고 지역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실질적인 문화적 인프라까지 함께 얘기한다. 








읽으면서 즐거웠던 지점들을 꼽아보자면,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의 성 마틴 대성당의 매력이 옆모습이라는 말에 예전에 전주 정동성당과 강화도 성공회성당에서 사진을 찍었을 때가 떠올라 웃음이 났다. 물론 내가 사진을 잘 못찍기 때문일 수 있지만 아무튼, 사람의 매력이 천차만별인 것처럼 건물의 매력도 마찬가지라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그리고 라디오 빌딩이 인상적이었는데 당시 건축계의 유행과 공산주의 이념이 맞물린 건축물로서 호불호가 크다고. 그럼에도 내부 사진은 꽤 매력적이다. 조각상 지도가 따로 있을 정도로 브라티슬라바의 구도심은 소소한 이야기로 가득하단다. 동상이나 조형물들이 유명인이 아닌, 그 시기에 그곳에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잔잔한 감동이 인다. 문득 우리는, 나는,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나... 라는 생각도 들고. 


폴란드 그단스크의 복원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 지금은 박물관이 된 서대문형무소가 생각이 났다. 전쟁으로 상처받은 민족정신을 바로 세우고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기 위해 복원을 선택했다는 도시 그단스크. 우리나라의 서대문형무소 복원 당시 버려졌던 벽돌마저 일일이 찾아냈다는, 그것도 정부가 아니라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손에 의해졌다는 해설사의 말에 깊은 무게감을 느꼈었는데, 폴란드 국민의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 할 수 있었다.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국립 대학 도서관의 서가 설계가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건물이 지어진 1930년대 말과 1940년대 초 사이는 전쟁의 시대였고, 언제 도시가 사라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건축가 플레츠니크는 갑작스런 변고에 대비해 손이 닿을수 있는 높이까지만 서가를 설계했다고 한다. 언어와 글과 책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만이 생각할 수 있는 설계라는 저자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프랑스 릴-메트로폴 부분에서 라 피신 미술관의 진입 구조를 우리나라의 사찰 진입 구조와 비유해 얘기하는데 단박에 이해가 되었다. 나는 평창 월정사, 고창 선운사, 양산 통도사를 비롯한 몇 군데는 사찰보다 사찰까지 가는 길에 더 매료되었기에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더라는.  


여행지로서 라트비아 리가는 큰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는데, 책 덕분에 꼭 가보고 싶은 곳이 되었다. 1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수도 리가, 특히 리가 중앙 시장. 규모가 큰 오프라인 시장을 넘어서 근대 역사가 녹아있는 공간이라는 점이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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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범접할 수 없는 인물의 서사와 관련한 장소에 가면 존경심이 우러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공감하고 이입했던 부분은 평범한 사람들의 대단치 않은 삶의 공간에서 오는 뭉근한 감동이었다. 그단스크의 낡은 성 캐서린 성당을 둘러보면서 다친 마음을 보여 주며 서로 토닥일 수 있는 위로와 공감으로 가득한 곳이야말로 성전이라는 저자의 말이 크게 와닿는다.   


공간은 인간보다 더 오래 시간 흔적을 남기고 후대를 잇는 끈이 된다. 현재의 사람들은 이를 통해 과거를 반추하고 미래를 대비한다. 아마 답사를 다녀본 사람이라면 이 말의 의미를 알 것이다. 나 역시 공산성, 남한산성, 문경새재, 강화도 돈대 등 여러 곳을 걸을 때마다 수백 년 전 그들이 걸었던 걸음을 뒤따라 걷고 있다는, 그리고 나의 다음 세대가 걸어올 것이라는 뭉클함이 있다. 


단순히 오래되어 가치 있는 건축이 아니라 한 시대를 움직였던 문화와 사상의 출발점을 이루는 의미 있는 장소이며, 건축도 자연의 일부이자 예술이라고 말하는 저자.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에 과거의 유산과 현대적인 감각을 아우르며 지속 가능한 도시를 만들어가는 어려움은 도시공학이나 건축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알고 있다. 다만 보통의 시민으로서 단기적인 유행이 아닌 앞서 말한 그 도시만의 풍경과 정서, 건축가의 철학이 잘 어우러져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 가기를 바람한다.   


건축에세이인데 건축가보다는 엉뚱한 곳에 꽂힌 것 같아 살짝 민망하지만, 무척 재미있어 앉은 자리에서 거의 다 읽을 정도로 가독력이 좋았다. 특별한 주제 혹은 소재가 분명한 에세이의 경우 독자마다 호불호가 있기 마련인데, 나는 이런 경우 스토리가 있는 에세이를 선호한다. 그런 측면에서 즐겁게 읽은 책 중 하나다.  



사족 
1. 언론 자유도가 높아 저널리스트의 의식이 높고 시민들이 언론 보도를 신뢰하는 편이라는 네덜란드. 부럽네. 
2. 책의 마지막에 실린 '도시 산책'은 빼놓을 수 없는 서비스. 이 부분이 찐빵의 팥소 같은 느낌?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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