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 일지 열린책들 세계문학 285
다니엘 디포 지음, 서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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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1664년 9월부터 약 1년여의 전염병 기간 동안에 벌어졌던 일들에 대한 기록이다. 이 기록은 전염병 사태를 두고 어떠한 대안이나 개인적인 생각을 서술하지 않고, 심지어 화자 자신의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기껏해야 한두 줄로 슬프다, 끔찍하다 정도). 개인적 묵상이나 소신은 다른 이에게 쓸모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며 대부분 공개하지 않는다고 명시한다. 드러난 상황과 화자가 경험하고 본 것들을 사실 그대로 적어나갈 뿐이다. 전염병에 의한 사명자 수 집계, 페스트 창궐에 따른 사회 현상, 정부 및 공공 기관의 대처, 의료진의 노고와 헌신, 새로운 법령 제정, 정부의 법률 시행에 따른 시민들의 반응, 시스템의 오류와 부작용, 전염병 시기의 산업 실태, 대규모 실업난, 생계 절벽, 전염병 기간 동안의 일상 생활 풍경 등을 여러 사례와 더불어 표와 목록으로 나타내 서술한다.  







작가는 화자의 입장이 되어 유성같은 천체 현상이 전염병, 화재, 전쟁 등의 전조나 예언으로 보았고 미신과 그에 따른 터무니없는 망상이 사람들을 더 공포로 몰아넣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한편, 앞서 자신의 피난 여부를 두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신에게 의탁하는 것이나 비아냥대는 남자에게 페스트가 하느님의 벌이자 신의 섭리라고 말하는 모습, 그리고 끊임없이 신의 자비와 신을 향한 섬김을 확신하는 태도는 과학적 접근에서 벗어난 그의 한계를 나타낸다(아니면 17세기라는 시대의 한계일 수도 있을테고). 


하지만 책을 읽다보니 신에게 기대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인류애이자 사랑이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가혹한 시대에 신조차 없다면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나. 무엇보다 당시로서는 새로운 약이나 치료법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전염병의 종식 자체가 신을 증거하는 것이었을테다. 



전염병을 악용해 도둑, 사기꾼, 협잡꾼 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활개를 친다. 전염병에 대한 공포는 거짓말쟁이들의 처방에 기대는 것이 어리석은 짓임을 알면서도 그 두려움으로 인해 기행을 거듭하는 지경에 이르게 한다.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비록 의무에 따른 행위일지라도 헌신적으로 해야할 일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화자는 이에 대한 많은 에피소드를 나열하는데, 작가는 이들에게 크게 서사를 부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망자 수를 나타내는 표처럼 그저 보여지는 사실을 적어내려가기만 한다. 어쩌면, 감시 하에 격리되어 있는 병든 아내와 자식을 만나지 못하고, 거짓 소문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며, 때때로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버리는 가장 근본적인 연민조차 사라진 이 시기에 살아가고 죽는 것에 무슨 서사가 필요있겠느냐고 말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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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위기 상황 대처에 관련한 관리직 임명과 전염병에 관련한 법령들이 정리되어 있는데 '환자 고지 - 감염자 격리 - 환기 소독 - 주택 봉쇄 - 이동 금지 - 격리 병원 운영 - 시체 매장', '부랑자 관리 - 공연 및 연회 금지 - 술집 영업 제한', 이외에도 외출 및 접촉 자제, 비상 식량 및 생필품 비축, 소독제를 넣은 향수 구비 및 휴대 등 감염병에 따른 사회 시스템 작동은 기술과 방식의 차이일뿐 17세기나 21세기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안타까운 점은 이 시대에도 가난한 사회적 약자들은 고스란히 위험에 노출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누군가의 죽음에 대부분 무덤덤해진다는 점이다. 



소설에서는 각종 범죄를 들어 윤리적 문제를 지적한다. 감염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위로 약탈하고, 환자를 상대로 강도와 살인 행각을 벌인다. 인간이 가져야할 최소한의 도덕도 무시한 채 치안이 불안정한 시기를 노려 폭력과 야만과 탐욕을 드러낸다.  


사실 이보다 더 눈에 띄는 점은 소설 속에서 안전을 권리로 내세운 피난민과 안전을 의무로 내세운 순경의 대치처럼 각자의 입장에서 내세운 권리와 의무가 관점에 따라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개인에 대한 연민과 공동체의 안전, 어디에 무게를 두겠는가(물론 위에 썼다시피 작가는 이러한 지점에서도 개인의 소견이나 고민을 피력하지 않는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감염자가 자신의 상태를 알고도 비감염자들에게 접근하는 것은 의도적 살인이라고 규정함과 동시에 이와 관련한 소문들은 무증상 감염자들에 의해 와전된 것이라고 짐작하면서 화자가 인간이 갖춰야할 최소한의 도덕성에 희망을 갖고 있음을 나타내는데, 과학적 검사 없이 무증상 감염에 대해 생각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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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보다는 르포에 가깝다는 평을 받는 이 작품은 전염병 시기의 영국 사회와 인간들의 면면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우리가 얼마전 겪은 팬데믹 시기에 소설이나 영화에서 있을 법한 일을 실제로 겪었다면, 이 소설은 허구라는 장치를 이옹해 실제화했다.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관찰자이자 기록자의 입장에서 써내려간 화자는 삭막할 정도로 제3자의 입장에서 기록한다. 그의 초점은 인간과 교회(신앙), 도시와 사회에 맞춰져 있다. 삶과 죽음의 방식, 가족에 대한 사랑, 타인을 향한 연민과 애도, 탐욕과 이기, 혼란의 시기에 묵묵이 제자리를 지키는 사람들, 그리고 결국에는 신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존재하는 참혹해진 도시에서 산 자와 죽은 자 모두를 바라본다.  



화자는 여러 헛소문에 대해 단호히 부정하면서 런던은 정부의 철저한 관리하에 모든일이 처리되고, 시 전체와 외곽에서는 치안과 질서가 놀랍도록 유지되고 있으며, 전염병 시기를 감안할 때 전 세계의 도시들의 본보기가 될 정도로 통치가 잘 유지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격리나 봉쇄 등 시민권을 유린한 행위는 비상시기에 있어서 어쩔 수 없는 조치였음을 짚으며 행정관들을 비롯해 시체를 옮기고 매장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전염병 사태에 관련해 여러 분야에서 업무를 맡았던 이들의 노고를 열거하며 치하한다. 


화자는 자신이 남기는 글을 그의 행동의 기록으로 보기보다는 후대 사람들이 같은 시련에 직면했을 때 비슷한 문제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상황에서 지침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썼다. 이런 당부를 썼다는 것은 작가가 앞서 쓴 이유로 런던 시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대니얼 디포가 영국 리얼리즘의 시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이유를 확인하는 소설이다. 서술하는 자가 가능한 한 감정을 자제하고 객관적으로 써내려가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읽는 입장에서도 이 기록들을 비교적 이성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시종일관 감정에 크게 휘둘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것은 사회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 반목과 갈등, 가난한 민간인의 죽음에 갖는 안타까움과 인류에 대한 희망, 그리고 결국엔 이겨낼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마침내 '살아남았다'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교차하는 여러 감정과 의미가 담겨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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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알래스카 샌더스 사건 1~2 - 전2권
조엘 디케르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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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은 미스터리소설을 놓고 종종 '밑밥'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 '밑밥'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회수하는지가 미스터리소설의 재미와 질을 결정한다(초자연적 현상이나 우연의 연속, 개연성 없는 느닷없는 새로운 인물의 등장은 사양해).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이 소설은 백 점 만점의 백 점이다. 상당한 분량만큼이나 수많은 밑밥과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작가는 이것들을 설득력 있게 해결해 나간다(살짝 꼬아놓은 면이 없지 않지만).


​소설은 전반부에서는 알래스카 샌더스 살인 사건에 집중하다가 중반부를 넘어가 또 다른 실종 사건을 줄기로 삼아 두 방향에서 서술하며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소설 구성에서 눈에 들어오는 점은 앞서 언급한 두 사건과는 전혀 무관하고 이전 사건이자 마커스의 전작인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이면에 치유하지 못한 마커스의 내면을 사이사이 드러내면서 다음 작품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놓는다. 참으로 치밀한 작가가 아닐 수 없다.  



이야기를 시작할 때만해도 어긋난 우정에 의한 복수와 치정 살인이라고 여겨졌던 사건은 시간이 흐르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고, 다정한 이웃이자 친구라고 여겼던 이들의 민낯이 하나둘씩 벗겨진다. 성실하고 모범적인 오빠, 내성적이고 정 많은 아들, 신뢰하는 동료, 다정한 어머니, 든든한 아버지, 친절한 이웃. 꿈 많고 아름다운 철부지로만 보였던 두 젊은 여자의 이기심과 평소에 문도 잠그지 않을 만큼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작은 마을 사람들이 숨긴 추악한 진실. 그들은 자신이 불이익을 당하거나 범인으로 몰릴 것을 우려해 사실을 은폐하고 진실을 외면했으며 때때로 거짓말을 했다. 범인조차 예상치 못했던 그들의 거짓과 무관심과 외면을 양분삼아 사건은 완전범죄에 가까워졌다. 무너진 정의와 구현하는 정의 중 진실은 어디에 더 가까울까. 


강력 범죄로 목숨을 잃거나 삶이 훼손되는 비극, 그리고 피해 당사자와 가족들의 삶은 어떻게 회복해야 할까. 해리 쿼버트의 말처럼 '우리 안의 못난이 악마'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악마들에 익숙해져 여차하면 우리 스스로 자신을, 삶을, 내주게 된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회복시켜 줄 것인가. 그야말로 불편한 진실에 다가갈수록 독자는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소설 속에서 해리는 작은 불꽃 하나로 삶을 다시 작동시킬 수 있다면서 마커스에게 스스로 왜 글을 쓰는지 자신에게 물어보라고 조언한다. 때때로 마주하는 절망에서 삶을 복구할 저마다의 작은 불꽃, 그리고 삶에 의문이 들때마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이를 통한 치유. 미스터리 소설인 이 작품이 정작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 아니었나싶다.  




사족
가독성은 최고다. 일단 펼치면 궁금해서 덮을 수 없다는.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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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또 내일 또 내일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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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 초반에 만나 인생의 대부분을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실패와 성장을 반복해나가는 두 남녀의 이야기다. 이렇게 단순한 문장 하나로 정의하기에 이 소설은 복합적인 감정을 담고 있다.  


소설에서는 다양한 인종과 민족성, 그리고 언어를 가진 인물들이 만난다. 한국계 이민 1세대를 비롯해 일본계 이민자, 유대인, 한국계 이민 2세대, 유대인과 한국계 미국인 혼혈, 일본인과 한국계 미국인 혼혈 등 각자의 입장에서 겪은 정체성과 차별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게임이라는 소재와 어우러져 흥미롭게 진행된다. 


소설의 진정한 시작은 1997년 게임 '이치고' 출시다. '이치고'는 셰익스피어의 <십이야>, 일본의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그림 <거대한 파도>에서 영감을 얻었다. 출시 10년 후 이에 대해 문화적 전유appropriation를 비난하는 비평가들에 대해 샘은 제 나라 문화만을 레퍼런스로 삼는 세상, 오로지 제 자신의 문화만을 옳다고 주장하며 다른 문화와 경험에는 눈멀고 귀먹은 세상을 비판하는데 이러한 맥락은 소설 전반에 걸쳐 있다.  


이치고 게임에서 눈에 띄는 점은 게임 속 '이치고'의 성별이 처음에는 불분명하다는 것. 샘과 세이디는 애초에 이치고의 성별을 확정하지 않았고, 게임 속에서는 아이로 남아있다. 즉 다인종 · 다민족 등 소설 속 청년들을 모두 상징하고 있는 것이라는 짐작을 해본다. 이처럼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실질적으로 화면에 구현하는 게임을 만들면서 20대의 그들도 내적 성장을 이뤄간다. 돈과 명예, 사회적 성공, 우정, 사랑, 협력 등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 늘 따라다니는 가치라고 봤을 때 인간은 죽을 때까지 성장하는 존재라는 생각도 잠시 스친다.  




 



백인과 한국인 혼혈인 샘은 상처받는 게 두려워 자신을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벅찬 사람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호의를 베푸는 것에 익숙치 않지만, 그는 말없이 내색하지 않고 친구를 걱정한다. 유복한 집안이었지만 난치병 환자였던 언니로 인해 부모로부터 방치된 유년 시절에 샘을 만난 세이디는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 이성과 감정을 오락가락하는 인물이다. 마크스는 샘을 동생처럼 좋아했다. 샘을 보호하고 샘이 세상을 살아가기 좀더 편하게 도와주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챙기는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샘은 자신이 마크스에게 도움을 받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을까싶은 사람, 마크스.  


우리는 스스로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사소한 일까지 우연과 선택의 연속 안에 살고 있다. 모두 다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다. 긍정의 순간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끌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자의든 타의든 매순간 벌어지는 우연과 선택에 연연하지 말자. 애나와 샘이 비밀의 고속도로로 핸들을 돌리지 않았다면, 그들이 애초에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세이디가 '메이플월드'에 결혼 기능을 추가하지 않았다면, 마크스가 1층 로비로 나가지 않았다면, 앤트가 내려오지 않았다면... . 



소설 막마지에 세이디는 자신들이 그 시대에 태어난 게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조금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혹은 조금 더 늦게 태어났다면 지금보다는 더 힘들었을 거라고. 문득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운좋게도(?) 정부 차원의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를 피했고, 살인적인 실업사태를 청년기에 직격탄으로 맞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SNS가 대중화 되기 전의 시대를 살아본 경험이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열심히 하면 노력의 대가가 지금보다는 좀 더 명확했던 시대를 살았다. 


갈수록 이른 나이에 성공을 이루겠다는 열망이 점점 더 커지는 세태다. 연예인의 데뷔 시기도 십대 초반으로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고, 프로게이머, 유튜버, 가상화폐 투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른 나이에 억대 수입을 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새삼스레 이러한 폐해에 대해서 구구절절 늘어놓겠다는 건 아니다. 다만 어떤 측면에서든 성공과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열정페이'나 '아프니까 청춘이다' 따위의 말도 불편하고 거슬리지만, 비록 한때나마 순수한 열정 없이 자극적인 성공만을 바라보며 달리는 모습도 우려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마크스는 게임이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이라고 정의한다. 무한한 부활과 무한한 구원의 가능성. 그 어떤 죽음도 영원하지 않은. 인간이, 혹은 인생이 그런 것 아닐까. 상처가 계속 상처로만 남지 않는다. 선택, 후회, 상처, 일시적 성공이 보이지 않는 어떤 반응으로 내일의 우리에게 어떻게 작용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당면한 문제들을 겪어가며 우리는 세대를 이어가고 내일의 희망과 낙관을 바라며 동어반복하듯 생을 이어간다. 동현이 세이디에게 오락기 '동키콩'을 유증함으로써 샘과 세이디의 우정을 되새겼듯 우리는 죽음을 통해 삶을 확인하며 내일을 기대한다. 


소설은 허구다. 샘, 세이디, 마크스. 이들의 관계, 순전한 우정과 연민이 어쩌면 평행이론이나 우주를 날아다니는 SF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게 우리네 모습이다. 그래서 이런 소설을 사이사이 찾아 읽는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들의 모습을 현실에서 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내 마음이 좀 부드러워지기를 바라면서.  



개브리얼 제빈의 작품을 세 번째 읽는다.
<섬에 있는 서점>은 여전히 따뜻하게 남아있고, <비바, 제인>은 살짝 아쉬웠으나, 이 소설이 그 아쉬움을 덮었다.  


나도 이렇게 마크스가 그리운데, 그들은 오죽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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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맛집 산책 - 식민지 시대 소설로 만나는 경성의 줄 서는 식당들
박현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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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맛집을 소개하는 책이다. 다만 21세기 서울이 아닌 한양(서울)이 경성으로 불리던 식민지 시대의 경성 맛집 이야기다.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식민지 경험을 수긍하는 것이 아님을 저자는 미리 밝혀두면서 오히려 경성의 맛집에 드리웠던 식민지 그늘을 주목한다. 








경성시대에도 소위 맛집 핫플레이스가 있었다. 그것도 인기 메뉴를 맛보기 위해 온종일 줄을 서기도 했던, 그야말로 오픈런이 있었던 유명한 식당이 여럿이었다고 한다.  


이 책은 모두 열 곳의 맛집을 소개한다. 1부에서는 본정에 위치했던 네 곳의 음식점을 둘러보고, 2부에서는 종로에 있는 맛집 세 곳, 3부에서는 장곡천정과 황금정 특히 '조선호텔 식당'을 서술하는데 이와 함께 경성을 배경으로 하면서 이 장소들을 언급한 당시 소설들도 살펴본다.  


본정은 식민지 시대 경성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당시의 유명세에 비해 지금 본정의 위치를 정확이 하는 사람은 드문데, 대략 명동 부근이다. 명동에서 충무로까지 횡으로 이어진 상가가 발달한 상업 공간이었다. 식민지 시대 본정이 일본인들의 번화가였다면 종로는 조선인들의 거리였다. 지금의 종로 모습에서 한양 또는 경성의 화려한 중심가였던 종로의 옛 명성을 떠올리기는 어렵다는 사실이 조금 아쉬움으로 남지만. 지금을 기준으로 장곡천정의 위치는 프라자호텔이 있는 곳, 황금정은 을지로에 해당한다. 황금정은 금융기관이 밀집되어있어 경성의 '월스트리트'로 불기기도 했다고.  


​김말봉 <찔레꽃>, 이태준 <딸 삼 형제>, 박태원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염상섭 <삼대>, 이광수 <흙>, 채만식 <인형의 집을 나와서> <탁류> <금의 정열>, 현진건 <적도>,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홍성유 <인생극장>, 유종석 <냉면 한 그릇>, 김낭운 <냉면>, 심훈 <불사조> 등 근현대 소설가들의 여러 소설들과 그 소설들이 연재됐던 신문이나 잡지의 삽화들을 적게나마 엿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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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점한지 100년이 훌쩍 넘어서 지금도 영업 중인 '이문설렁탕'을 비롯해 당시 내로라하는 식당, 카페, 요릿집들이 모두 인상적이었는데, 아무래도 조선호텔이 눈에 띄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조선호텔이 문을 연 것은 1914년 10월이다. 그 규모(특히 부지)가 엄청난 것도 있지만 조선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건물로도 유명했다. 독일인 게오르크 데 랄란데가 설계를 했으며, 건축 자재  역시 독일을 비롯한 서양에서 수입했다고 한다. 랄란데는 총독부 청사, 경성역 설계를 담당하기도 했는데, 조선호텔은 당시 북유럽에서 유행하던 '유겐트 슈틸' 양식으로 지어져 이국적이고 우아한 모습으로도 유명했다. 읽다보니 사진 자료에서 보이는 조선호텔 공연실의 호화로움이 어느 정도 납득이 되고, 근대에 지어진 건축물들이 왜 전부 비슷한 분위기로 연출됐는지 알만하다.   


조선호텔은 처음에 철도호텔로 개장되었다. 이는 조선호텔이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철도를 건설했던 목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대한제국 시절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인 '환구단'의 자리에 식민 지배를 위한 철도호텔이 중심에 있고, 신위판을 봉안하는 부속 건물인 '황궁우'가 호텔을 돋보이게 만드는 배경이 되게끔 했다는 것은 일본 제국과 식민지 조선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저자는 조선호텔이 위치했던 장곡천정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면서 조선호텔이 위치한 공간의 의미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짚는다. 


1936년 조선호텔 식당의 정식 메뉴판을 보면 종업원으로 보이는 여성 그림이 있는데 의복이 독특하다. 개량한복처럼 보이기도 하고. 정말 깜짝 놀랐던 부분은 당시 조선호텔의 방값이었다. 하루 방값이 12만원이었는데, 지금 시세로 따지면 60만에 해당한다.



몇 가지 재밌는 점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배달이다. 책의 삽화에 보면 국수나 설렁탕 배달은 쟁반을 이용했다면 중국음식점 배달은 지금과 비슷한 손잡이가 달린 통이었다(지금과 아주 흡사하다). 다른 또 하나는 '낙랑파라'의 사진이나 내용을 읽어보면 그곳이 예술가들의 살롱 역할을 한 장소가 아니었나싶다. 사진을 보니까 왠지 낭만적으로 느껴지고 괜히 흐뭇해진다.  


책을 읽으면서 신기한 점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건물의 규모, 메뉴의 특성, 변화한 입맛, 달라진 사회 정서 등을 고려해야겠지만, 한 예로 당시에 전문 디저트 카페가 있었다는 사실은 개인적으로 놀라웠다. 또한 특별한 목적 없이 거리를 걸으며 윈도우 쇼핑을 즐겼던 당시의 젊은이들 모습에서 지금의 우리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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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상당히 흥미롭고 재미있는 책이다. 제목처럼 단순히 경성 맛집 투어에 그치지 않는다. 그 당시 경성 중심가의 모습과 사회 계층의 구조나 생활상, 무엇보다 조금 생소한 근대의 문학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짧게나마 만나볼 수 있다는 매력이 가장 크다. 또한 책장을 넘길 때마다 경성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저절로 머릿속에서 튀어나오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런데 읽다보면 조금씩 씁쓸해진다. 서문에서 저자가 말했듯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일본이 얼마나 소리없이 교묘하게 조선의 일상에 침투했는지 느껴지고, 열악한 근무 조건과 저임금에 시달리며 일해야 했던 당시 조선인의 위치가 어땠는지를 새삼 깨달아지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먹는 것'에 크게 관심이 없다. 그래서 요즘 한창 유행인 소위 '먹방'이나 그와 관련한 콘텐츠나 프로그램을 거의 시청하지 않는다. 외식도 즐기는 편이 아니고 일상의 끼니는 웬만하면 직접 만들어 먹는 게 편하다. 여행이나 답사를 갈 때도 검색하지 않는 부분 역시 현지 맛집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고자 했던 이유는 저자가 서문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그 시대의 맛집을 살펴본다는 것은 곧 동시대의 문화를 알 수 있기 장치이기 때문이다. 어떤 음식이 유행했고, 유행한 계기는 무엇이며, 변화된 식생활 문화가 미친 영향까지 짐작하다보면 당시를 살던 사람들을 이해하고, 생각지 못했던 지금의 우리를 반추하게 된다.   


재미있는 경성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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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커다란 초록 천막 1~2 세트 - 전2권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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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e Gut, Alles Gut" 
 

프롤로그에서 스탈린의 사망 소식을 시작으로 하는 소설은 그로부터 2년 전인 1951년부터 1990년대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소설은 구심점 역할을 하는 일리야 이사예비치 브랸스키를 중심으로 가지를 뻗듯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인연이 교차하고 격동의 소련을 관통하면서 당시를 살아낸 그들의 삶과 애환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그 많은 등장인물들(내가 헤아린 것만 칠십 여명이다)이 직.간접적으로, 크든 작든 일리야와 연관이 있다는 것. 또한 인물들의 관계, 사건과 갈등의 인과 과정 등이 시간의 순서가 아닌 관점에 따라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소설이 진행될수록 밀도감은 더해진다. 같은 시기 혹은 같은 사건을 등장 인물 각각의 관점으로 조망하며 미처 드러내지 않았던 사건의 진실과 반전들이 여러 입장을 통해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더하여 실제 사건, 허구의 인물과 실제 인물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어 마치 소설이자 르포르타주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데, 작가의 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커다란 초록 천막>은 그야말로 작가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2권에서는 당시 소련(특히 모스크바)의 서민층과 소수 민족의 삶을 대변하는 이들이 등장하는데, 매 장章마다 쓰여진 하나의 에피소드들이 연결되면서 한 권의 연작소설이라고해도 무방할만큼 내용이 다채롭다. 읽으면서 인상적이었던 점은 소설 전반에서 전해지는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예술적 지식과 소양, 그리고 감성이었다. 이러한 문학, 음악, 미술, 문화 등의 장치는 이 소설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며 저항과 투쟁의 정신을 보여주는 일리야, 일리야에게 인생을 던진 올가, 유대인이지만 러시아인이자 어른으로서 남고자 했던 미하, 섬세하고 유약해보이나 어쩌면 그들 중에서 가장 의리가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냐. 이외에도 각자의 뜨거운 서사를 안고 있는 수많은 인물들이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주마등처럼 스친다.  


사랑과 우정, 이념과 신념, 민족성과 정체성, 냉전시대의 잔혹함, 모두가 고아였던 시대의 끔찍함, 선한 믿음, 스승에 대한 존경과 제자를 향한 애정, 정의와 불의, 강요된 선택,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아름다웠던 사람들과 그들이 독자에게 던지는 삶의 의미.  



읽는 내내 얼마나 마음이 들썩였는지 모른다. 일리야와 올가의 삶에 아팠다가 미하의 서사에 먹먹했고 사냐의 삶에 안도했다. 류드밀라와 주니어 '일리야'의 이야기에 안타까웠지만 코스탸의 따뜻한 마음에 울컥했다. 그와같은 이들이 어디 한둘이었으랴. 책을 덮으면서 마치 내가 그들과 함께 한 시대를 살아온 양 뭉클해졌다.   


올해 읽은 소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   



 
516.
천재란 시나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에 그치지 않고 강이나 호수에 떠다니는 쇄빙선 같아서 시대를 앞서가서 벽을 부수고 얼음을 깨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서 그의 뒤에 오는 온갖 크고 작은 배와 보트가 다닐 수 있도록 하는 사람이야. 천재 뒤에는 가장 영리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이 따르고, 그들 뒤에는 군중이 따라와서 결과적으로 새로운 발견은 상식이 돼. 평범한 사람들은 천재들의 노력과 시간의 흐름 덕분에 점점 더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지. 그들은 시간을 앞서가는 사람들이고 말이야." 


518.
가치 있는 모든 것은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그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 같아. 왜냐하면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것이 존재하고, 그런 세계가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거든.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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