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꼭두각시
윌리엄 트레버 지음, 김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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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1918년 아일랜드 독립전쟁과 내전을 배경으로 시작하면서 가슴 아픈 역사를 통해 두 가문의 운명적인 인연과 한 집안의 비극사를 그리고 있다.  


1919년, 아름다운 페르모이의 킬네이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던 어린 소년 윌리 퀸턴은  블랙 앤드 탠즈 군인들의 광기어린 무장폭력과 학살로 인해 아버지와 두 여동생을 잃고, 어머니와 단 둘이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때마침 휴가 중이었던 두 고모들은 무사했으나 어머니는 그때부터 정신이 온전치 못한 채 살아간다. 우울한 유년 시절 끝에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이모와 사촌 메리앤. 메리앤은 그에게 킬네이 시절의 행복감을 상기시켜주는데, 이 만남은 또다른 비극의 시발점이 되고 만다.  








윌리, 메리앤, 이멜다 각각의 관점에서 시간의 순서대로 서술한다. 
18세기 후반, 아일랜드의 퀸턴가家 남자와 결혼한 영국 여성 애니 우드컴으로부터 서사가 시작된다. 1916년 아일랜드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나 여전히 진행 중인 혁명에 대한 논쟁들은 남지만, 격동의 시기에 피를 흘리며 살아간 사람들은 서서히 잊혀진다.


영국과 아일랜드의 대립, 가톨릭교도와 신교도의 대립, 약자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여성의 위치 등 작가는 역사적 사실과 세 등장인물의 개인적 삶을 엮어 시대의 역사와 개인이 별개일 수 없음을 전하면서 동시에 고통스럽고 가혹한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내는 이들이 건네는 용기가 독자의 가슴을 묵직하게 울린다.  


선의가 잔인하고 무자비한 칼이 되어 돌아와 한 가정을 파괴하고, 예측이 가능한 평안한 미래를 냉기 서린 잔혹한 운명으로 바꾸어 놓았다. 과거의 킬네이로 돌아가고자 무던히도 애썼던 노력은 허망한 물거품처럼 무의미해졌다. 온 몸, 온 마음을 다한 사랑조차 운명을 바꾸지 못했다. 그러나 그 사랑으로 견디고 버텨진 하루하루 역시 삶이 되고 역사가 된다. 


혹독하게 추운 2월의 겨울날에 임신한 몸으로 아무도 없이, 불편한 존재가 되어 페르모이에 내던져진 메리앤의 감정은 상상만으로도 막막하고 아득하다. 사라지고 싶어도 사라질 곳이 없고, 에비와 같은 용기조차 낼 수 없으니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겠나.   


불쾌할 정도로 한편이 되어 메리앤에게 영국으로 돌아가기를 압박하는 페르모이의 사람들의 권유가 무엇이었는지 책을 덮고 난 후, 내 나름으로 짐작해본다. 보호. 혼란의 시기에 윌리를, 나아가 윌리가 사랑한 여인을, 그리고 두 사람의 사랑을 지켜주고 싶었던 그들의 한결같은 마음. 조국을 지켜내려했던 아일랜드인들의 마음도 이와 같은 건 아니었을까. 



진실을 아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과연 상처가 될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우리에게, 혹은 나에게 있는지 자문한다. 한평생 짐이 될지도 모르는 그 진실이 가져다줄 파장과 모순을 납득하고 이해할 용기. 윌리와 메리앤의 선택은 불가항력이었나 무모한 치기였나. 


메리앤에게서 <펠리시아의 여정>의 펠리시아가, 윌리에게서 <루시 골트 이야기>의 루시가 떠올려 진 이 소설은 내가 읽은 윌리엄 트레버의 모든 작품 중에 가장 비극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십 년의 긴 세월을 통과하고 얼굴을 마주한 그들은 아마, 나와는 다른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사족 
기브바첼러가 눈앞에 있었다면 주먹이 먼저 나갔을 것이다.  




※ 출판사 지원도서

내 존재의 모든 세부, 내 몸의 모든 혈관, 모든 흔적, 내 모든 친밀한 부분이 눈을 감고 쓰러지고 싶게 만든 그 부드러움으로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 킬네이에서 난 당신을 기다릴 거예요. 당신이 이 세계를 떠도는 동안 난 어떤 가혹한 운명에도 살아남을 겁니다. 외로움이 당신을 사로잡았다는 걸 난 이해합니다. - P264

난도질당한 삶들, 그림자의 피조물들, 그의 아버지의 말처럼 운명의 꼭두각시들. 우리는 유령이 되었다. -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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