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우루스
예브게니 보돌라스킨 지음, 승주연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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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 약제사이자 치료사에서 시작해 순례자였다가 성자가 된 아르세니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이다. 인생에 있어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평생을 속죄하며 구원을 갈구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는 환상적이면서도 때로는 처절하게, 때로는 아름답게 서술하면서 언어, 역사, 신앙과 종교, 시간의 영원성, 존재의 가치, 우주의 질서 등을 통해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고찰한다 







순전했던 아르세니가 처절한 고통을 마주하는 순간은 우스티나의 죽음이다.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가 살아가는 이유는 환자를 치료하고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 이후 그가 고단한 여정과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일평생 감내하며 삶을 이어가는 이유는 오직 단 하나, 우스티나와 죽은 아기의 구원이다. 


소설에서 아르세니는 마치 예수가 다시 현현한 것처럼 읽힌다. 그는 모든 것을 내어주고, 기적을 일으킨다. 가난한 자에게 자신의 빵을 나누어 주고 몸에 걸친 옷 한 장부터 그의 사랑과 헌신, 동정과 연민, 심지어 신체의 손상을 무릅쓰면서까지 바닥까지 긁어내어 전부를 준다. 아픈 사람에게는 할 수 있는 모든 헌신을 통해 생명을 구원하고, 죽음에 이른 사람의 영혼은 안식처로 인도한다. 그가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구원의 길이 된다. 그것이 비록 삶의 길이 아닐지라도. 아르세니의 헌신은 우스티나와 죽은 아기를 향한 사랑과 동일 선상에 있다. 아내와 자식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에게 지우고, 영혼의 안녕과 구원을 위해 방랑을 하는 아르세니의 어깨에 얹혀진 짐은 너무나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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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중반에 접어들면서 몇 가지 흥미로운 부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재미있는 가정이 나오는데, 콜롬보와 아메리고 베푸스치의 신대륙의 발견과 루시에서 예견되는 세상 종말론의 연관성이다. 만약 신대륙 발견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진행될 세상 종말의 시작인지를 묻는 것, 그리고 만약 정말 그렇다면 이렇게 발견한 대륙에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냐는 물음은 무엇을 겨냥했는지 생각해볼만하다.  


또다른 부분은 아르세니와 예지몽 때문에 본의 아니게 예언자 역할을 하는 암브로조가 함께 여정에 오르면서 소설은 중세와 근현대를 넘나든다. 더하여 이 두 인물의 배치 역시 인상적인데 아르세니가 예수에 가까운 성자라면, 암브로조는 보통의 인간이 갖고 있는 모습을 대변한다. 세상의 종말보다는 나 자신의 죽음이 더 두렵다는, 그리고 이 생이 아니면 다음 세상에서라도 살고 싶다는 암브로조의 고백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작가가 소설에서 외로움을 다루는 방식도 인상적이다. 타인과 교감이 가능할 때의 고독은 그 자체로 충만할 수 있지만 신뢰와 교감이 사라져 정서적으로 피폐해진 상태에서의 외로움은 두려움을 불러온다. 소설은 내내 아르세니가 인간 세상을 초월한 성자로 그려지지만 세상이 그를 외면하고 있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는 데에서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인간임을 드러낸다.  


아르세니가 베네치아 도착해 산마르코 광장에서 성당 기둥 사이에 지쳐서 앉아 있는 라우라라는 여인과 대화하는 장면이 있는데,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을 대화하듯 말하지만, 사실 서로의 언어가 달라 그들은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런데 마치 두 사람은 알아듣는다는 듯이 조곤조곤 대화를 이어간다. 이 대화의 본질이 언어를 넘어선 하느님의 자비와 인간의 사랑임을 말하는, 그래서 소설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의 한 부분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의미 있는 숫자 '7'. 아르세니와 관련한 대부분의 날들은 7일이라는 기간을 거친다. 소설이 러시아 정교회를 바탕으로 두고 있다는 점에서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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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길을 떠난 순간부터 아르세니는 수시로 죽은 우스티나에게 말을 한다. 두 사람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기에 자신의 내면에 우스티나의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이 곧 두 사람의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아르세니의 진정한 대화 상대는 죽은 아내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라우루스가 명예를 훼손 당하고 모욕을 감수하면서까지 지켜내려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저 희생이 전부였을까. 나는 그가 아나스타시야에게서 우스티나를 보았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저어해 아내와 자식을 죽음에 이르게 한, 한평생 그의 족쇄가 되었던 죄책감.  


치료사이자 순례자요 성자였던 라우루스의 울음은 슬픔, 기쁨, 안타까움, 후회, 연민, 그리고 감사를 나타내는데, 인간 삶의 희로애락을 모두 담고 있다. 행복뿐 아니라 시련과 고통까지 감사와 희망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평안해지려나. 
(그렇게 하기에 우리는 너무나 욕망덩어리들이지.) 



아르세니는 이와 벼룩이 득실거리는 더럽고 지저분한 옷을 입고서야 자신이 고통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그들의 통증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통증이 자신의 것이 될 수는 없다. 누구도 세상에 일어난 모든 일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다. 


라우루스가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세상의 종말이 언제 도래하든 중요한 것은 우리가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게 아닐까. 




※ 출판사 지원도서
 

"움직임 자체가 힘든 것이 아니라 옳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 어렵지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알 수는 없을 테니까요. 내 생각에 시간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며, 우리가 혼돈에 빠지지 않기 위함인데, 인간의 의식은 모든 사건을 동시에 기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나약함으로 인해 시간 안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 P345

저는 아르세니였고, 우스틴이었고, 암브로시우스였으며, 이제는 라우루스가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제 기억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저는 서로 다른 시대에 저였던 사람들과 저를 더 이상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삶은 모자이크와 유사해서 여러 조각으로 흩어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 P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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