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에서
스티븐 킹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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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부터, 외형은 그대로인데 몸무게가 하루에 0.5kg가량씩 줄고있는 스콧. 군살 가득한 몸에 불룩한 배는 여전하고 식욕감퇴, 무기력, 피로감도 없건만 100kg이 넘던 몸무게는 96kg이 되어있다. 그런데 더 이상한 점은 아무리 무거운 물건을 들고 저울에 올라가도 맨몸으로 올라갈 때와 몸무게가 같다는 것. 병원에서 특이 케이스로 의료 연구 대상이 되고 싶지 않은 스콧은 이웃에 사는 정년퇴직한 의학 박사 엘리스를 찾아가 상담한다. 하지만 70대에 의사로서 정년퇴직을 한 엘리스도 처음 마주한 증상. 엘리스는 스콧의 마음을 이해하고 당분간 지켜보기로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콧은 몸무게가 줄자 컨디션이나 기분이 훨씬 좋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와중에 또 다른 이웃의 개들이 자신의 정원에 똥을 싸자  그 사실을 전하고 주의를 부탁하려고 그들의 집을 찾아가지만, 사과는 커녕 디어드리의 싸늘한 냉소만 받고 왔다. 그녀의 행동이 납득이 안되던 스콧은 팻시의 식당에 붙어있는 지역 마라톤 대회 포스터와 트레버라는 사내와 말다툼, 서점을 운영하는 마이크를 통해 디어드리의 입장을 이해한다. 디어드리와 미시는 '결혼까지'한 레즈비언 부부. 동네 사람들은 두 사람이 동성애자일 뿐만 아니라 합법적으로 결혼까지 한 것에 대해 거부감과 경계심을 갖고 있다. 캐슬록이 아름다워 이사 와 식당을 연 부부는 관광철에만 장사가 되고 비수기에는 동네 주민들이 식당을 찾지 않아 문을 닫아야 할 상황. 그 기저에는 자신들을 향한 혐오가 있음을 안다. 그래서 마라톤 선수 출신인 디어드리는 지역 마라톤 대회에 나가 우승을 노린다. 식당 영업이 잘 되기를 바래서가 아니라 소수자를 차별하는 주민들에게 자신들의 당당함을 알리기 위해서. 
 
미시와 디어드리를 돕고 싶은 스콧은 마라톤 대회에 신청한다. 그의 몸무게는 이미 64kg이고 활동량이 많아지면 몸무게는 더 빠르게 줄어들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전히 그의 손에 잡혀있는 물체는 무중력 상태다. 마라톤 대회 당일, 겉으로 보기에 스콧의 몸무게를 알리 없는 사람들은 그에게 당황스런 눈빛을 보내지만, 마라톤이 시작하자 더 당황하게 된다. 결승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급격히 악화되는 기상 상태. 쏟아지는 빗속에서 넘어질 뻔한 디어드리는 스콧의 도움으로 우승한다. 경기가 끝나고 엘리스 부부, 미시와 디어드리 부부와 저녁 만찬을 준비하는 스콧. 이 식사 시간에 미시와의 대화를 통해 편견에 갖혀 있는 마이라 엘리스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 그 자리에서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 스콧. 더불어이제는 몸무게가 하루에 0.5kg이 아닌 더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음을 밝힌다.그의 몸무게가 0을 가리키는 순간 그는 어떻게 될까? 
 
 
소설은 우리 안에 내재 되어 있는 차별과 고정관념, 혐오와 다름의 인정에 대해 통찰한다. 동성애 부부인 미시와 디어드리, 몸무게가 줄어드는 순간부터 '보통' 사람의 범주에서 벗어난 스콧. 그들은의 대화를 통해서 소수자로서 겪는 아픔과 상처를 짐작할 수 있다. 
  
159-160.
"저는 병실이나 정부 기관에서 검사나 당하면서 이 체중 감소 프로그램의 남은 시간을 허송하고 싶지 않아요. 어쩌면 대중들의 흥밋거리가 되거나요." (스콧)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완벽하게 이해돼요." (디어드리)
(...)
"자네 너무 무섭지? 얼마나 겁이 나겠어 그래."
"그게 말이죠. 무섭지는 않아요. 아주 초반에는 겁이 났죠. 그런데 이젠...... 모르겠어요...... 괜찮은 것 같아요." (스콧)
"난 그 말도 이해가 돼요." (디어드리)
 

 
 
인간의 존업성과 평등에 대해서 우리는 어린시절부터 배워왔고, 어른이 되어서도 가장 우선해야 할 가치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집단이라는 보이지 않는 장벽 안에서, 다수자들끼리만의 평등과 존엄성이 무슨 의미가 있나. 집단을 운용함에 있어 '다름'과 '다양성'은 불편한 명제다. 그래서 틀을 짜고 그 틀 안에서 획일적이지 않은 이들을 차별하고 혐오한다. 진정한 힘은 편을 갈라 어느 편을 누르고 우위에 서는 것이 아닌 이해와 인정, 이를 통한 조화다. 
 
출판사에서는 이 소설에서 상냥한 스티븐 킹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책을 덮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을만큼 따뜻한 이야기다. 190cm 키에 마흔 살이 넘은 상냥하고 친절한 스콧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빗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넘어질 뻔한 디어드리를 가뿐하게 안아 올린는 스콧의 모습과 무엇보다 고도에 있을 그를 상상해 본다. 길지 않은 소설을 읽으면서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스티븐 킹이 오마주 했다는 리처드 매드슨의 <줄어드는 남자>도 읽어봐야겠다. 
 
 
사족.
책의 표지를 유심히 관찰하는 편이다. 원서의 표지도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환하게 터지는 저 불꽃 안에 그가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번역본 책은 표지가 2개. 먼저 겉표지는 고도에서, 초록이 가득한 공원에서 한가로운 한때를 보내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웃들을 지켜보는 스콧. 소설의 내용이 잘 전달된다. 속표지는 뭉실뭉실한 구름 위의 푸른 하늘만 있다. 표지를 보자마자 애니메이션 'UP'이 떠올랐다. 그이도 저 구름 속 어딘가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으려나?

 

그녀의 미소 뒤에 있는 화나고 상처받은 사람은 자신의 그런 모습을 세상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으리라 결심했을 것이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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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말해줘
이경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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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시가 허물로 뒤덮이자 정부는 D구역을 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다국적 제약 회사의 기업도시로 지정한다. 허물이 온몸을 감으면 방역 센터에서 치료 받고, 허물을 막아준다는 프로틴을 구입해 먹는다. 하지만 아무리 치료를 받고, 프로틴을 사 먹어도 허물은 어김없이 반복적으로 사람의 몸을 휘감는다.  
 
파충류 사육사인 '그녀' 또한 치료를 위해 방역 센터 치료에 지원하고 그곳에서 후리와 김씨, 임상실험을 거부하는 척을 만난다. 거대한 뱀 '롱롱'이 허물을 벗는 순간 인간의 허물도 벗겨지리라는 전설. 때마침 폐쇄된 궁에 거대한 뱀이 있다는 소식에 '그녀'는 후리, 김씨와 함께 롱롱을 잡기 위해 궁으로 향한다. 각각 다른 소망을 품고 마침내 마주한 롱롱. 100여 미터에 가까운 길이와 1미터 정도의 몸통 폭. 파충류 사육사인 '그녀'조차도 처음 보는 거대한 크기다. 포획에 성공한 세 사람은 롱롱을 김씨의 타이어 가게에서 사육하고 이 소문은 일파만파 퍼진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허물을 벗고 싶다는 단 하나의 간절한 소원을 안고 롱롱의 앞에 모여 든다.
롱롱을 살리고자 하는 '그녀', 롱롱을 통해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과 제약회사의 음모를 밝히고자 하는 척, 그리고 롱롱을 이용해 또다른 야심을 드러내는 공 박사. 속속들이 밝혀지는 검은 세력의 비인간적이고 사악한 계략.  
 
혐오와 공포를 이용해 개인의 탐욕을 충족하고, 그에 따른 양심의 가책은 말할 것도 없이 오히려 도시를 유지시키는 선순환이라고 말하는 공 박사와 허물이라는 공포로 인해 저항은 생각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통해 인간의 나약함과 악을 들여다 본다. 
 
"어떤 의미에서, 이 도시가 생산하는 건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네. 사람들은 몸에 허물이 생기면 자발적으로 방역 센터로 오지. 허물은 혐오스럽거든. 방역 센터로 오면 허물을 벗겨주고 유효 물질을 추출하지. 그들은 다시 밖으로 나가 허물을 키워. 누구도 불행하지 않은 선순환이란 말일세." (p277 / 공 박사) 
 
공 박사의 욕망은 돈일까, 명예일까, 아니면 과학자로서의 성취감일까? 소설을 읽어보면 도시 하나를 표본 집단으로 만들 정도로 연구에 열정적이지만 그는 돈에 대한 욕심도, 명예욕도 보이지 않는다. 그가 이렇게 악의적인 방법을 이용하면서까지 연구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의 마지막 롱롱의 허물을 벗기기 위해 제 발로 뱀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간 그녀와 롱롱의 동결 세포주를 손에 쥐고 다른 도시를 찾아 도망치듯 걸음을 재촉하는 공 박사의 모습은 대조적이다.  
 
"도시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이것만 있으면 다시...... ." (공 박사) 
 
우리가 공포스러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어떤 허물을 뒤집어 쓰고 있는가, 그리고 그 허물과 그 허물에 대한 공포를 벗어낼 용기를 낼 수 있는가.
  
 
 

 

 

 

 

영원히 허물을 벗으면 한 번도 허물 입지 않은 사람처럼 살 수 있을까. 한 번도 버림받지 않은 사람처럼 살 수 있을까. - P71

"공포는 방역 센터가 시민을 통제하는 도구입니다. 허물을 퇴치하기 위해 세금을 걷고 수십 종의 프로틴을 출시해 점점 가격을 올리고 방역대를 도심에 주둔시키고 있습니다. 시민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습니다. 허물을 입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허물에 대한 공포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상을 지배합니다. 전설 따위에 기대 당신은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겁니다." - P146

"이 도시에서 공포는 거짓을 진실로 뒤바꾸는 알리바이입니다. 공포가 실재하니까 거짓은 없다는 논리입니다. D구역은 이 거대한 알리바이의 중심에 있습니다. 백신이 개발되면 D구역도 사라집니다. 방역 센터가 공들여 만든 시스템을 제 손으로 무너뜨릴 리 없습니다."
- P153

"보험 영업이란 게 말입니다, 실은 불안을 퍼뜨리는 일입니다. 허물에 대한 불안을 수치로 증명하고, 만일에 대비해 보험에 가입해야 한다고 고객을 설득하죠. 허물이야말로 이 도시에 존재하는 제일 큰 불안이지 뭐겠습니까. (...)" - P179

"시민들은 프로틴 업이는 소원조차 빌지 못했습니다. 이 도시에선 바코드가 찍히지 않은 소원은 불량품에 지나지 않는단 말입니다. 시장에 유통되지 않는 건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두지 않았습니다. 거대 제약 회사의 시스템 안에서만 안전하다고 느겼습니다. 방역 센터에 가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도 침묵했습니다. 의심을 품는 것조차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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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로 사는 법 - 여행홀릭 심리학자가 쓴 아주 특별한 여행 심리 안내서
제이미 커츠 지음, 박선령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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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을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자기 자신이다. (p42)
 
'여행'이라는 단어는 우리를 설레게 한다. 지난 여행에서 시달린 고생은 그새 까맣게 잊어버리고 시간과 경제적 여력인 닿는다면 여행 계획을 짜기 바쁘다. 그런데 여행은 가기 전에도, 다녀온 후에도 걱정인 경우가 종종 있다. 장기 여행일 경우 떠나기 전 업무는 마무리해야 하고, 복귀한 후에도 쌓인 일과 여행 뒤처리(빨래 혹은 짐정리)도 보통 일이 아니다. 여행 중에는 예상보다 경비가 많이 든다거나 감안하지 못했던 변덕스런 날씨 혹은 현지 사정 등 당혹스러인 일이 벌어지면 차라리 집에 있고 말지 하는 경험이 한번쯤은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미처 생각지 못했던 여행에 심리적 준비와 개인의 여행 성향과 몰입에 대해서 구체적인 제시와 팁을 전한다.  
 
여행의 성향에 대한 글을 읽고, 체크 리스트를 작성해 봤는데 나 혼자 빵 터져 버린 것이, 나 스스로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역시 나는 여행 체질은 아니라는 거다. 모험심도 바닥이고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시간도, 사람과 친숙해 지는 데도 오래 걸린다. 그래서 여행도 무리지어 다니는 건 지양하고 함께 가야하는 상황이라면 서넛을 넘기면 다음을 기약하는 부류다.  
 
답사를 목적으로 하는 여행이다 보니 사실 발길 닿는대로 여행인 경우는 많지 않다. 미리 알아보지 않고 가는 경우는 음식점. 음식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아무거나, 거기다 쇼핑과는 천적이라 어디를 가도 뭘 사본 기억이 거의 없다.  
 
책에서는 여행지에서의 효과적인 지출법이 나오는데, 패키지 상품이나 쇼핑을 목적으로 하는 여행자라면 도움이 되겠다. 
 
131.
여행을 준비할 때는 가져갈 옷과 돈을 모두 늘어놓아 보세요. 그런 다음 옷은 절반만 가져가고, 돈은 두 배로 챙기면 됩니다. / 수잔 헬러 

 
또 저자는 여행의 불확실성이 주는 매력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불확실성하다는 것은 예측이 어렵다는 것이지 불안하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것을 기대감으로 바꾸어보면 어떨까. 어차피 불안해도, 기대해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기대감이 나을 터. 
 
이외에도 몇 가지 공감했던 것은 '음미'에 대한 부분. 속도를 늦추고, 집중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넓게 확장시키며 곰곰이 생각한다. 산을 오르다 보면 누가누가 정상에 먼저 가나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바쁘게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바람 소리를 듣기보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다니는 사람도 많다. 시간을 멈추어 보기를, 소리에 깊게 귀기울여 보기를, 머리와 마음을 비워보기를.
그리고 사진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거. 과도한 SNS 활동이 음미할 수 있는 순간을 앗아가 버리는 건 아닌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작가는 여행이 주는 변화에 대해 말한다. 낯설어진 일상이나 평범해진 삶의 소중함, 작은 안락함과 여유로와지는 마음, 성숙해진 자아 등 조금은 힘겨웠던 혹은 장기적인 여행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이다.
나 역시 힘든 겨울 산행이나 (몸이든 마음이든)불편했던 여행 후 돌아올 곳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또한 그 과정을 통해서 타인을 이해하고 조금은 성숙해진 나 자신을 보게 된다. 어떤 이는 일상을 여행처럼 산다지만, 나는 여행은 그저 여행일 뿐이다. 여행을 가기 위해서는 여러 의미에서 용기를 내야하는 나로서는 매일 용기를 내기가 쉽지 않다. 선뜻 여행은 하고 싶지만 발을 떼기가 어렵게 여겨지는 사람들이 읽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행복한 여행을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자기 자신이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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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일대의 거래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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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아빠다. 조만간 일어나겠구나. 헬싱보리는 지금 크리스마스이브 이브 아침일텐데, 나는 사람을 죽였다.  
 
그가 죽인 사람은 누구일까? 
 
성공을 위해 달리기만 한 남자가 있다. 아들이 성장하는 동안 학교를 데려다 준 적도, 손을 잡아 준 적도, 생일 촛불을 끌 때 옆에서 있지도, 잠자리에서 책을 읽어 준 적도 없고, 아내가 자신을 떠나는지도 몰랐으며,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태어나는 순간 쌍둥이 동생을 누르고 먼저 나왔던 그 순간부터. 대신 누구나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유명하고 중요한 사람이 되었지만 가족은 떠났고 그에게 남은 것은 희귀암 뿐이다. 그는 생각한다, 암조차도 자신은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 
 
34. 
모든 부모는 가끔 집 앞에 차를 세워놓고 5분쯤 그 안에 가만히 앉아 있을 거다. 그저 숨을 쉬고, 온갖 책임이 기다리고 있는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갈 용기를 그러모으면서. 스멀스멀 고개를 드는,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숨막히는 부담감을 달래며. 모든 부모는 가끔 열쇠를 들고 열쇠 구멍에 넣지 않은 채 계단에 10초쯤 서 있을 거다. 나는 솔직했기에 딱 한순간 머뭇거리다가 도망쳤다.
 
35.
"대부분 사람은 그냥 목숨을 연명할 뿐이야. 그들은 자기가 가진 것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건 없어. 물건에는 기대치에 따라 매겨지는 가격이 있을 뿐이고 나는 그걸 가지고 사업을 한다. 지구상에서가치가 있는 건 시간뿐이야. 1초든 언제든 1초고 거기엔 타협의 여지가 없어." 

 
 
암에 걸러 어른이 되어버린 다섯 살 소녀.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냐는 엄마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엄마를 위로하는 것이라는 걸 알기에, 웃으며 '우주 사냥꾼'이라고 답하고 씩씩해지려는 아이. 다음 생일 파티를 기약할 수 없는 소녀는 울고 있는 엄마에게 차마 물을 수 없어 희귀암에 걸린 남자에게 죽음이 무엇인지, 죽으면 추운지를 묻는다. 남자는 그 아이를 통해 아들을 본다.  
  
 
언제부터인가 폴더를 들고 다니는 회색 스웨터를 입은 여자가 보인다. 다섯 살 소녀는 그녀가 무섭다. 남자는 그녀를 단짝 친구의 장례식에서, 요양원의 아버지 방에서 보았으며, 밤사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방에서 회색 털실 뭉치를 발견했다. 병원에 나타나는 회색 스웨터의 여자. 그녀는 누구를 만나러 온 것일까.  
 
46.
"씩씩하게 굴 필요 없어. 무서우면 무섭다고 말해. 생존자들은 전부 그러니까."
"아저씨도 무서워요? 폴더를 들고 다니는 아줌마가? 나도 그래요." 

 
 
아들은 자신을 닮지 않았다. 남자에게 있어서 아들은 실망스러운 결과물이었다. 얼마든지 좋은 취직 자리와 높은 위치에 설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아들은 작은 고향 마을에서 자리를 잡았다. 행복하냐는 질문에 충분히 행복하다고 말하는 아들. 아들은 다행스럽게도 행복해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랐다.  
 
64.
나는 자식 농사에 실패했다. 너를 강하게 키우려고 했는데. 너는 다정한 아이로 자랐으니. 

 
 
울부짖는 남자에게 회색 스웨터 여자는 말한다. 
 
"죽음을 죽음으로 맞바꾸는 건 못해. 목숨을 목숨으로 맞바꾸는 거라면 모를까." 
 
목숨을 맞바꾼다는 것은 대신 죽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왔던 인생 전체를 삭제 당하는 것. 즉 존재 자체가 없어짐을 뜻한다. 남자는 두렵지만, 이제 일생일대의 거래를 하려고 한다. 
 
 
이 남자는 왜 그런 거래를 했을까? 단순히 어린 아들 곁을 다정하게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 작은 행복의 가치를 폄하한 후회 때문일까? 나는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건 남자의 거래를 통해 감성적 혹은 낭만적인 행복에 대한 가치보다 이 남자(많은 현대인들)가 이렇게 살아야만 했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사람보다 돈이 우선인 세상에서 이 남자의 삶의 방식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일까? 돈보다는 다양한 삶의 가치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말보다는, 다양한 삶의 가치를 볼 수 있는 환경이 먼저 우선되어야하지 않을까.
 
73.
행복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다. 그들의 세상에는 예술도 음악도 마천루도, 발견도 혁신도 없다. 모든 리더, 네가 아는 모든 영웅은 하나같이 집착이 심하다. 행복한 사람들은 무언가에 집착하지 않고, 질병을 치료하거나 비행기를 띄우는 데 일생을 바치지 않는다. 행복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그들은 현재를 위해 살고 오로지 소비자로서 지구상에 존재한다. 나와 다르게. 

안녕, 아빠다. 조만간 일어나겠구나. 헬싱보리는 지금 크리스마스이브 이브 아침일텐데, 나는 사람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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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
문은강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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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하고도 전투적인 삶을 살고 싶지 않았던 박지우. 그래서 취업 전선에 목숨 걸 듯 달려들지 않았는데,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루저 취급이다. 욱하는 마음에 충동적으로 결제해버린 '캄보디아에서 한 달 살기ㅡ원더랜드 호텔'. 앙코르와트나 가보자 하는 마음에 도착한 호텔에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이는 한국어 잘 하는 친절한 현지인 직원 린과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불친절한 사장 고복희였다. 
 
소설은 캄보디아에서 호텔을 경영하는 고복희의 현재를 시작으로, 대한민국의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그녀와 주변 인물, 그리고 박지우를 통해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읽고 있으면 웃음이 절로 나오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문장이나 극 중 상황에 큭큭대며 웃다가도 담겨져 있는 내용에, 마음에 추가 하나씩 달린다.  
 
사람들은 모든 청년이 대기업을 선호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인의 가치는 상관없이 목표를 경제적 성공에 두지 않으면 열정박약, 의지박약 취급이다. 본인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고 말하면 실력이 없어 포기하는 거라고 지레짐작이다. 그런데 이 시대 젊은이들은 학교라는 곳에 입학하는 그 순간부터(어쩌면 입학 전부터) 이미 충분히, 너무 심하게 열심히 살고 있다.  
 
93.
"모두가 빡세게 살아서 제가 빡세게 사는 건 티도 안나요. (...) 뭔가 이루고 싶으면 죽도록 하라고 하는데. 제가 봤을 때 죽도록 하는 사람들은 진짜 죽어요. 살기 위해 죽도록 하라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이예요."
 

 
 
우리가 정작 걱정해야할 것은 목표는 있지만 목적 없는 삶이 아닐까? 성적 1등급, 입시, 취업이라는 목표는 있다. 그 다음은? 취업만 하면 인생은 마침표인가? 그리고 좋은 대학은 왜 가려고 하는가? 취업을 위해서? 그럼 돈을 많이 벌기만 하면 인생은 성공인가? 목적 없이 목표만 세우고 주변을 둘러볼 틈도 없이 달리기만 한다. 그리고는 지쳐버린다.  정신없이 달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잠깐만'이라고 팔을 잡아줄 이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15쪽을 읽고 있다가 불현듯 몇 년 전에 방영했던 드라마 <직장의 신>이 떠올랐다. 고복희는 김혜수 배우가 연기했던 '미스 김'처럼 정확한 루틴이 있는 인물이다. 아침 다섯 시 기상, 단정한 단발머리, 호텔 청소 순서, 무엇보다 스스로 만든 오 분 스트레칭.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그녀는 원칙을 고수하고 주변의 말이나 소문에 휘둘리지 않는다. 어물거리는 법이 없다. 의사표현은 확실하게, 정도에 어긋나지 않으며 개인 사정 따위는 원칙 앞에서 요지부동이다. 이쯤되면 '뭐 이런 인정머리 없는 냉혈인간이 있어?'하겠지만, 오히려 지켜야할 것을 지키고, 해서는 안될 짓을 하지 않는 원칙을 지키는 고복희는 매력 폭발이다. 
 
오히려 연대를 외치고 교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김인석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폭력을 불사한다. 교민 사회의 발전이라는 명분 뒤에 숨어서. 원더랜드를 뺏기 위해 고복희 폭행을 사주하고, 그것을 거부한 직원 안대용을 향해 사정없이 주먹을 휘두른다. 
 
136.
살려고? 살려고 했으면 그래서는 안 되지. 더 독해야지. 그렇게 나약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다. 그런 놈들은 사회에 어떤 이바지도 못한다. 

 
어쩌면 아이들은, 청년들은, 성공담이 정답인 양 조언하거나 할 수 있다는 막연한 격려와 응원보다는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버티며 공정한 원칙을 지키는 어른들에게 더 힘을 얻지 않을까?  
 
조금 우울할 수 있는 소재를 유쾌하게 버무린 소설이다.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정의롭지 않은 방법을 쓰는 이들이여, 고복희를 벤치마킹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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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복희는 이해할 수 없다.

감정을 다툰다는 건 상당히 피곤한 일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다. 누군가 영역에 침범해오면 아까운 기력을 쓸 수 밖에 없다. 힘이 넘치는 사람은 주변을 성가시게 하는 대신 다른 것에 주의를 돌리는 것이 어떨까. 환경오염이나 난민을 위한 대책 같은 훨씬 생산적인 문제로. - P61

한국이나 여기나 똑같다. 그걸 깨닫고 나니 슬퍼졌다. 뭣 좀 해보려고 하면 다 실패다. 행동 하나하나 실수투성이다. 바보같이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다. 바닥 언저리를 맴도는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정말 밑바닥까지 떨어진 것 같았다. - P86

원래 사는 게 고달픈 거라고. 이 정도 고생은 다 하면서 산다고. 먹고 사는 일의 부당함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것. 그건 강금자가 삶을 견디는 방식이었다. - P157

다 함께 모여 춤추는 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동그란 지구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이 찍어 놓은 발자국으로 빼곡할 것이다. 저마다의 흔적을 남겨놓고 떠난 이들은 분명 즐거웠을 것이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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