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요 마을의 유지로서 가난한 이들에게 베풀고 환경이 열악한 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원해주며 직원과 그들의 가족까지 피붙이처럼 살뜰하게 챙기는 사람. 또한 군사정권에 저항하고 신문사를 지원하며 민주 투사의 면모까지 갖춘,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대신해서 보살핀 사람, 아버지  유진. 
 
75.
우리 집에 온 어느 누구도, 아버지의 표현에 따르면, 충분히 만족할만큼 먹고 마시지 않은 채로 떠나지 않게 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었다. 안 그래도 아버지의 칭호는 '고장을 위해 일하는 자' 오멜로라가 아니던가.
 

 
하지만 가정에서는 권위적이며 절대신과 같은 존재이다. 맹목적인 신앙심은 신의 이름으로 가족의 절대 복종과 억압, 폭력을 정당화한다.  
 
하고 싶은 말을 삼켜야하고 크게 말하는 방법도, 웃어 본적도 없는 가족. 가장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 가해진 폭력으로 유산을 해도, 손가락이 비틀어져도, 가죽 벨트에 의해 몸에 줄이 그어져도, 두 발에 뜨거운 물이 부어져도, 갈비뼈가 부러져도, 그 모든 것은 당연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신이었으니까. 아버지는 그 수없는 폭력 끝에 늘 그들을 부둥켜안으며 사랑한다고 말했다.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의 뜻이므로 어쩔 수 없었다고. 
 
51.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캄빌리는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다. 오빠 자자는 조금씩 아버지에게 저항하려고 한다. 캄빌리는 오빠가 그러는 이유를 모르겠다. 아버지는 늘 옳은데.  
 
두 남매에게 집을 떠날 기회가 찾아온다. 아옥페에 참배를 하기 위해 고모 이페오마가 사는 은수카에 가게 된다. 그것은 아이들을 할아버지와 만나게 하기 위한 고모의 방편이다. 할아버지는 카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아 아버지로부터 비난의 대상이다. 그래서 이교도인 할아버지를 만나는 것은 15분 이내여야만 한다. 한 집에 머무르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  
 
캄빌리는 은수카에 도착한 순간부터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을 다하는 아마카와 자신의 의사표현을 다하는 오비오라가 신기하다. 그리고 자신에게 날을 세우는 아마카가 불편하다. 
 
아마디 신부와의 만남. 캄빌리는 그를 통해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자신이 아닌 새로운 캄빌리를 발견한다. 1등을 해야만 하는 캄빌리, 가능한 말을 삼키는 캄빌리, 아버지가 가하는 육체적 고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캄빌리가 아닌 그녀 자신. 
 
이페오마 가족과 지내면서 캄빌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조금씩 내는 방법을 알아간다. 그리고 자자는 삶의 방식이 하나만이 아님을 더 크게 깨닫고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도 고민한다. 
 
211.
"소리 지를 필요 없어, 아마카." 마침내 내가 말했다. "난 오라 잎을 다듬을 줄 모르지만 네가 가르쳐주면 되잖아." 그런 차분한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 몰랐다. (...) 킥킥대는 소리가 들리길래 내 귀를 의심했지만 아마카를 보니 역시나 그 애가 웃고 있었다. "너도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할 수 있구나, 캄빌리." 아마카가 말했다.
 

 
캄빌리는 여전히 아버지가 두렵지만 그리운, 양가적 감정을 떨칠 수 없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어지러운 시국과 그와 연관한 아버지 유진의 여러 사정으로 남매는 다시 은수카에 머문다. 하지만 정부와 학교측으로부터 불온자로 낙인찍힌 고모는 미국 이민을 준비하고, 아마디 신부는 독일로 부임을 통보 받는다. 그리고 남매의 인생에 절대적 존재였던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와 자자의 선택. 이제 캄빌리는, 가족은 혼자 서야만 한다. 
 
306.
"저기 봐,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피려고 해." 차에서 내리며 오빠가 말했다. 

 
작가가 페미니스트라고, 소설이 가부장제도 속에서 자아를 찾아가는 십대 소녀의 성장기라고 소개가 되어 있어서 페미니즘 문학이라고 오해(?)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은 신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가장의 폭압에서 벗어나기 위한 한 가족의 비극적인 투쟁 이야기다. 신처럼 군림하면서 자애와 강요를 양날의 칼처럼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아버지로부터 어머니와 두 남매는 속절없이 머리를 조아릴 뿐이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페오마가 아니였다면,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운명에 다른 길은 없다는 것을 당연다는 듯 여기며 살아갔을까? 그리고 어머니의 선택이 아니었다면 그 무거운 족쇄는 벗어던질 수 있었을까?  
 
소설의 마지막, 새로운 비를 기다리는 캄빌리는 앞으로 더 성장할 것이다. 캄빌리 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자자 또한 자신어 목소리를 내는 것을 넘어 스스로 설 수 있게 될 것이라 믿는다.  
 
희귀하고 향기로우며 자유로는 함의를 품은 보라색 희비스커스처럼. 
 
 
 
나는 소리 내어 웃고 있다. 내가 팔을 뻗어 어머니 어깨에 두르자 어머니도 내게 몸을 기대며 미소 짓는다. 머리 위에 염색한 목화솜 같은 구름이 낮게 떠 있다. 이제 곧 새로운 비가 내릴 것이다. (소설 마지막)

 

 

 

 

우리 집이 풍비박산이 나기 시작한 것은 오빠 자자가 영성체를 하지 않아서 아버지가 집어 던진 무거운 미사 경본이 식당을 가로질러 날아가 장식장 도자기 인형을 박살 냈을 때부터였다.

그날 밤 내가 웃고 있는 꿈을 꿨다. 내 웃음소리가 원래 어땠는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내 웃음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 이페오마 고모처럼 깔깔대는, 칼칼하고 열정적인 웃음소리였다. - P115

나는 한 번도 대학에 대해, 어느 학교에 가고 무엇을 전공할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때가 되면 아버지가 결정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 P165

가끔 아마카와 파파은누쿠가 대화할 때면 두 사람의 낮은 목소리가 서로 휘감겼다. 그들은 최소한의 단어만 사용하면서도 서로의 말을 이해했다. 두 사람을 보면서 내가 절대 가질 수 없는 뭔가를 향한 갈망을 느꼈다. - P205

미소가 입술과 뺨을 끌어당기면서 내 얼굴에 스멀스멀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재밌어하는 미소. 그는 내가 오늘 처음으로 립스틱을 바르려 했던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웃었다. 그리고 또 웃었다. - P219

엄마가 자식한테 어떤 식으로 말하고, 무엇을 기대하는가를 통해 그 애들이 뛰어넘아야할 목표를 점점 더 높였다. 아이들이 막대를 반드시 넘으리라 믿으면서 항상 그랬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오빠와 내 경우는 달랐다. 우리는 스스로 막대를 넘을 수 있다고 믿어서 넘은 게 아니라 넘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 넘었다. - P274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어, 캄빌리." - P29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드래곤 티스》
- 마이클 크라이튼


1875년 가을, 필라델피아 조선업자의 아들인 예일대상 윌리엄 존스는 학교 라이벌과 말다툼을 하던 중 상대의 잔꾀에 넘어가, 여름 방학을 고고학과 마시 교수의 서부탐사대에 합류하는 천 달러짜리 내기에 걸려들고 만다.

마시로부터 사진사로 합류 허락을 받은 윌리엄은 탐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처음과는 다르게 설렘과 기대를 갖게 된다.

와이오밍으로 향하던 중 윌리엄은 마시로부터 (마시의) 경쟁자인 코프 교수의 스파이로 의심받고 와이오밍 샤이엔에서 버려진다. 하지만 마침 그곳을 경유하던 코프와 만나고 그의 일행에 합류한다.

새로운 탐사대와 도착한 곳은 와이오밍만큼이나 악명 높은 몬태나. 갖은 고생 끝에 많은 공룡 뼈를 수집하고, 특히 대형공형 브론토사우르스(아파토사우루스) 뼈를 발견한 성과를 이룬 코프와 윌리엄 일행은 철수하는 과정에서 탐사대 두 명이 사망하고, 윌리엄은 낙오한다.

뼈 수집품(특히 브론토사우루스)의 절반을 싣고 천신만고 끝에 윌리엄이 도착한 곳은 데드우드. 보안관 한 명없이 무법천지인 그곳에서 발이 묶인 윌리엄. 데드우드 사람들의 윌리엄이 가지고 있는 상자들이 금이라고 여기고 호시탐탐 노린다. 윌리엄은 뼈 수집상자와 함께 무사히 필라델피아로 돌아갈 수 있을까?


백인과 인디언들 사이의 전쟁, 그리고 골드 러시로 들끓었던 1870년대 미국 서부. 금이 아닌 화석을 찾기 위해 위험천만인 서부 한가운데로 들어간 이들이 있다.

공룡 뼈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불법, 사기, 살인까지도 서슴치 않는 마시. 화석에 대한 집념과 동료에 대한 애정과 호탕함(종종 욱하는 성질). 철딱서니 없는 부잣집 도련님에서 서부 탐사를 통해 성장하는 윌리엄. 보수를 받고 일하지만 의리의 상징인 와이어트와 인디언 리틀 윈드.

책을 읽고 있자니 머릿속에서 다큐멘터리와 서부영화, 어드벤쳐 영화의 장면들이 저절로 필름 돌듯이 떠올랐다. 캐리터들마다 특징이 명확하고 곳곳의 유머와 위트도 재미를 거든다.

영화 '쥐라기 공원'의 원작 동명소설의 작가인 마이클 크라이튼의 작품이다. 영화로 따지자면 '쥐라기 공원'의 프리퀄이라고 보면 된다(출판사 소개에서도 언급된 바이다).

실존 인물이자 라이벌이였던 마시와 코프를 데려오고, 거기에 가상 인물인 주인공 윌리엄을 등장시켜 텍스트는 역사 소설이 아닌 모험소설이 됐다. 하지만 백인들의 정복 전쟁과 골드러시로 인한 총격전 등은 실제 사건이다. 다만 주요 등장인물들의 동선들은 실제와 차이가 있다.

개인적으로 고고학과 원시생물에 관심이 많아서 기대가 컸다. 공룡 화석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은 부분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작가의 말대로 이 책은 논픽션 소설이니... 인디애나존스의 화석 탐사 버전 한편을 읽은 느낌이다.




160.
"뼈를 사냥하는 것은 금을 사냥하는 것과는 다른 독특한 매력이 있다.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기회, 땅 속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는 걸 발견할 가능성은 이 모험에 불을 지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 미지의 땅에서 들려오는 삶에 대한 울림
강인욱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의 과거에 대한 기억은 죽음으로

수렴이 되어 망각이 되고, 망각이

되어버린 기억은 다시 유물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합니다.

고고학자에게 유물이란

다시 살아난 기억의 편린입니다.

이렇게 죽음을 통하여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

그것이 고고학입니다.

작가 서문에서

서문을 읽고 나니, 내가 고고학의 정확한 개념정의가 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일단 용어부터 확인해야 했다.

(왜냐하면 역사학, 인류학 등의 학문과 구분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에 대한 스스로 의심?이 들어서... .)

인류가 생활의 증거로 남긴 일체의 유적.유물의 발굴, 수집과 분석을 통해서

인류의 역사.문화.생활방법 등을 연구, 복원, 해석하는 학문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뭔가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책을 펼쳤는데 전혀 어려움 없이 재미있게 술술 읽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우리나라 안동의 '원이 어머니의 편지', 어머니 자궁을 의미하는 항아리관, 배 모양의 관 등 옛사람들이 죽음과 관을 어떤 의미로 받이들이고 상징했는지를 시작으로 불, 음료, 음악, 색채, 문신, 젓갈 등 다양한 소재로 흥미롭게 접근한다.

지금은 금기로 되어 있는 마약을 고대에는 음료나 약으로 사용했다는 점, 3천년 전에도 침을 놓았다는 사실, 파지릭 고분에서 발견된 미라의 몸에 새겨진 섬세한 문신, 특히 동양에서 더 발달된 귀이개, 고고학을 이용한 억지로 군국주의를 정당화하려는 일본, 토양에 따라 유물의 보존 여부 등등.

 

 

 

총 1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1장 이후부터는 고고학의 입장과 관점에서 보는 전쟁과 제국주의, 문명, 그리고 미래 등을 무겁지 않게 다룬다.

무엇보다 공감이 되고 어쩔 수 없이 아쉬웠던 부분은 과거를 밝히기 위해 유적을 파괴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책에서도 석굴암에 대해 언급하는데, 얼마 전 경주를 다녀왔을 때를 떠올려보면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이 납득이 된다. 우리의 호기심과 욕구는 끊임없이 보고픈데, 그러면 그럴수록 유적지와 유물은 손상되고, 보존하기 위해서 파헤쳐야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고고학 발굴이란, 일종의 유적 파괴 행위이다."

(김원룡)

책에서 저자는 '고고학자에게 진실은 유물에서 시작해서 유물로 끝난다'고 말한다. 최대한 상상력을 억제하고 논리적으로 증명된 근거에 의해서 결과를 내놓아야하는데, 현실은 적잖이 왜곡되는 부분들이 있다. 학자 개인의 명예욕과 국가의 이기는 한걸음 뒤로 물려놓고, 자료에 의해 객관적으로 접근하면 분쟁도 한결 덜 할텐데, 안타까운 점들이 많다.

앉아서 손가락만으로도 많은 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시대에 고고학은 고리타분할 수 있다. 그리고 유물의 진실에 가까워 지기 위해서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입에 달고 사는 '빠름빠름'과는 정반대의 학문이다. 그런데 나는 지난 역사와 유물을 애정하는가.

역사를 바로 알아야 미래를 바로 세울 수 있다는 교과서적인 말은 제쳐놓자. 그저 수 백, 수 천년 전의 사람들이 걸었던 땅을 내가 걷고, 그들이 세워놓은 돌벽을 만질 수 있고, 그들이 남겨놓은 시대를, 2019년을 살고 있는 내가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뭉클하고 경이롭지 않은가.

이 돌이 수백년 전 그 돌이라니... 이 나무가 교과서에 나왔던 그 할배들이 지나쳤던 그 나무라니... 산성을 걸을 때마다 발바닥에 전해오는 찌릿함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이건 좀 다른 맥락이지만 지인이 중국을 통해 북한의 국경? 경계선? (용어를 정확히 뭐라고 써야할지 모르겠다)을 살짝 밟은 경험이 있다는데,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었다고 했다. 어떤 감정인지 알겠더라는.

여튼 나는 그렇다는...

고고학 에세이를 읽다고 생각하면 될 듯 하다.

쉽고 재미있다!

 

[책 속 문장]

 

44.

영원을 향한 인간의 마지막 바람과 체념이 녹아 있는 기념물이 바로 무덤이다.

87.

지혜는 누구나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식이라는 것에 사유, 성찰, 그리고 자기의 절제가 더해져야만 지혜는 생겨난다.

210.

우리가 비판해야 할 것은 개개인 학자의 성격이나 인격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바로 국가 권력에 앞장서서 다른 사람을 억압할 때에 암묵적인 동조를 하고 따라갔던 그 모습을 비판해야 한다.

235.

이어져야 하는 건 이어져야 할 이유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 의미는 퇴색되고 있는 것만 같다. 모든 것이 새로워야 한다는 요즘 시대의 트렌드를 접할 때면 괜히 씁쓸해지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새로운 것이 나오면 전쟁 같이 소비하는 요즘이라 그런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애정 또한 절실해진다.

277.

많은 사람들은 고고학이 기록으로 남아있는 역사를 밝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고고학의 목적은 역사 기록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과거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밝히는 것이다.

303.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다 공짜야. 그걸 누릴 줄 알면 부자인 거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의 꽃 - 2019년 50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최수철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독이 곧 삶이고 삶이 곧 독이였어."

 

이 소설에서는 모든 것이 독이다.

아름다움, 글, 술, 성, 눈물, 욕망, 이기심, 증오심, 분노, 공포, 탐욕, 교만, 호색, 나태, 시기, 거짓된 신념, 진부하고 편협한 사상, 심지어 사랑조차도.

태어날 때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독을 품고 살았던 조몽구의 이야기.

냉장고에 보관해 놓았던 부패한 음식을 먹고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입원하게 된 '나'.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혼몽한 시간을 보낸 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창가 쪽에 누워있는 한 남자를 발견한다. 낮은 소리로 읊조리 듯 기괴한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그 남자는 자신, 조몽구의 삶을 들려준다.

독과 친화력이 있는 아버지와 독에 취약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정체모를 이마의 두통은 어린시절부터 그에게 낙인처럼 박혀 평생을 괴롭힌다. 초등학생 시절 만난 윤자경. 몽구의 두통이 어머니의 옻 알레르기와 임신 중 정서적 고통에서 기인했다면, 소녀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산소 농도가 짙어 병에 걸렸다. 사람은 산소 없이 살 수 없지만, 산소도 과잉이면 독이 된다는 사실.

99.

독을 뿜어 타인을 죽일 수 있는 여자가 있다면 타인의 독을 흡수해서 살릴 수 있는 여자도 있지 않을까. 어릴 때부터 독이 없는 청정한 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여 몸속에 독성이 전혀 없는 여자, 다른 사람의 독을 제 몸으로 흡수하여 살리는 단 한 번의 용도로 길러진 여자, 타인의 독을 흡수한 뒤 그 여자는 어떻게 될까. 자경은 그 여자에 가깝지 않을까.

자신을 독이라 여기는 수호. 한때는 직장인으로, 사회운동가로, 예술가로 살았지만 결국 자신은 독으로 인해 보통의 삶이 가능하지 않음을 받아들인다. 수호의 몸은 점점 독에게 잠식되어 갔고, 독과 하나다. 그의 마지막 사명은 사랑했던 연인 소화를 되찾고, 조카인 몽구를 정화시키는 것.

467.

"인간에게 가장 큰 비극은 자기 스타일을 갖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코 제 스타일을 벗어날 수 없다는 거야. 그리고 스타일이라는 게 네가 선택하거나 바깥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야. 네 태어난 모습 그 자체가 취향이고 스타일이지. 벌독에 특별한 항체가 있어서 아나팔락시스 따위를 엿 먹이는 게 네 스타일이야."

강력한 힘을 갖고 싶었던 광수. 군 시절, 몽구로 인해 동료들이 광기로 날뛰던 그 밤. 광수는 몽구가 가지고 있는 알 수 없는 힘에 매료되었다. 아니 압도되었다. 그래서 독을 욕망했고, 수호를 찾아갔다. 독 때문에, 수호 때문에 인생을 잃게 될 거라는 몽구의 조언은 부질없기만 하다.

510.

"(...)독이 약을 사랑하고, 약이 독을 사랑한 거야. 그래, 그렇지, 독과 약 사이에 사랑이 있는 거지. 그걸 이제야 알게 된거야."

늘 평범함이 싫었고 존재의 증명을 하고 싶었지만 충분한 역량이 없어 주위의 것을 무엇이든 이용했던 영로. 그것이 그에게는 독이였고, 그 독을 정화시켜 주었던, 사랑하고 신뢰했던 아내의 죽음으로 스스로를 버린다. 수호는 몽구를 정화시켰고, 자신이 사랑했던 소화 곁에 눕는다. 몽구 또한 정화된 자신의 몸을 자경을 구하기 위해 온몸으로 독을 빨아들이며 기꺼이 내놓는다. 그것이 비록 죽음에 이르는 길일지라도.

작가가 몽구를 빌어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일까? 결국 독에 대한, 삶에 대한 질문과 답을 각자 스스로 찾아야 하는 건 아닐까?

56.

마치 내 이마에 낙인이 찍힌 것 같았어. 그리고 낙인이 찍히는 그 순간 정체 모를 독이 몸속으로 들어와서 나를 괴롭혔어. 그 때문에 두통이 생기고 그 두통을 누르기 위해 끊임없이 이마를 만져야 했는데, 손이 늘 청결한 상태가 아니어서, 나의 손독이, 그리고 내가 만진 모든 것이 독이 되어 이마를 통해 내 속으로 스며들었어. 나는 손과 이마로 온갖 독성을 흡수하고 있었어. 그건 그야말로 독이 독을 부르는 돌이킬 수 없는 악순환이었어. 그런데 낙인은 대체 누가 찍은 것일까. 나 자신이 찍은 건 결코 아니니, 그렇다면 세상이, 어쩌면 우주가 그 낙인을 찍은 것일지도 몰랐어. 그럼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낙인을 찍는다는 건 뭔가를 끊임없이 상기 시키기 위해서잖아.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상기시키려 하는 거지? 상기시켜서 뭘 어쩌려는 거지. 어쩌면 나로 하여금 싸우라고 하는게 아닐까. 버티고 저항해서 마침내 이겨내라는 의미를 가지는 게 아닐까. 그런데 무엇을 이겨내야 한다는 말일까. 나 자신에 대해서? 아니면, 세상의 독에 대해서? 그렇게 내 생각은 내내 악순환의 고리 속에서 맴돌고 있었어.

355-356.

그러던 어느 날 비로소 깨달았지. 그동안 나는 독에 취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교묘하게 이용하면서 그들에게 내 속의 독을 뿜어내는데 급급했고, 그러면서 그 모든 게 두통 때문이라고 정당화했던 거야.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내 한 몸 건사하면 살아간다면, 나는그저 한 마리의 독충에 불과한 것이었어. 이제라도 나 자신을 찢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했어. 그 순간 에나폰정이 든 약통을 휴지통으로 던져버렸어.

에필로그에서 '나'는 괴물에게 말한다.

"삶이라는 책 한 장 한 장에는 독이 묻어 있어. 네가 손가락에 침을 발라 책장을 넘기고 나면 그로 인해 중독되고 탈진하여 죽음에 이르게 돼. 그러나 너는 그때 비로소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지."

'나'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고 말하지만 곧 자신은 치유될 것이라고 한다.

"삶의 의미는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에 있어. 기쁨은 두려움에 대면할 수 있도록 삶이 제공하는 몇 움큼의 에너지일 뿐이지."

하지만 우리는 슬픔과 두려움이 만연한 인생일지라도 몇 움큼의 기쁨이 삶의 가치와 즐거움을 채워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고통이 일상이 되어 자신과 타인의 고통을 슬퍼할 줄 모르는 것이 더 두려운 일 아닐까. 수호와 몽구, 수호와 소화, 그리고 몽구와 자경. 인생은 고통스럽고 외롭다. 하지만 타인과 고통을 교감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다면 독, 견뎌볼 만 하지 않나!

소설을 읽다보면 몇몇의 문학 작품들이 생각난다. 내용은 다르지만 독이 의미하는 바는 대체로 상통한다. 욕망의 근간이 무엇이든 그 욕망을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의 잠재된 힘이 바로 약(해독)이 아닐까?

사족.

읽던 중에 기록해 놓았던 미겔 데 우나무노의 <안개>의 글이 떠올랐다.

'인간은 병에 걸린 동물이다. 항상 병들어 있다. 단지 잠잘 때만 건강을 누리는 것 같다. 그런데 항상 그런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때로는 잠을 자면서까지 말하기 때문이다.'

물론 내용과 매락은 차이가 있지만 죽음을 선택할 수 없는 <안개>의 주인공과 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호가 함께 떠올랐다.

[소설 속 문장]

44.

"어머니에게 독은 악이었고, 어둠이었고, 병이었어. 그런데 독을 이기려면 그 독을 중화시킬 수 있는 독이 필요했어."

78.

"(...)비로소 나는 내가 독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 자체로 다른 존재에게 독이라는 것도 알았어. 하지만 또한 나는 그날 처음으로 나의 삶과 세상의 독이 서로 침투하는 음침한 세계를 보았던 거지. 그 두려운 세계에서 내내 살아가야 하는 운명,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서 격하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어."

97.

"독은 위험하지만 무척 흥미롭거든. 사람들이 독을 가지고 온갖 일을 벌이는 것도 그래서지. 독에는 운명을 바꾸는 힘이 있다는 말이야."

185.

우리가 독을 가지고 노는 동안, 독도 우리를 가지고 놀고 있었어. 우리야말로 어떤 아이들보다 더 심하게 중독되어 있었어. 그 사실을 알고 나자, 나 자신이 더 두려워지기 시작한 거야.

196-197.

모든 생명체는 살아 있기 위해 매 순간 자기 내부의 독성으로 외부의 독성과 싸우고 있어. 그러나 대부분 자기 내부의 독성을 의식하지 못하지. 의식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질까. 말 그대로 깨어 있으라는 게 아닐까. 일상의 마비에서 벗어나 있으라는 게 아닐까. 고대 인도의 한 철학자가 말했지. 우리가 진실로 깨어있는 때는 꿈꿀 때의 그 짧은 순간 뿐이라고. 우리가 깨어 있다고 믿는 시간은 단지 마야, 곧 미망과 환영이라는 거지. 그렇다면 무엇이 미망이고 무엇이 실제인가. 독도 따지고 보면 미망이고 환영이 아닐까.

199.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우리의 하루하루는 독과 약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것이지.

329.

우리는 둘 다 저능아고 백치였던 거야. 우리는 서로에게서 자기 모습을 보았던 거야. 어쩌면 지금도 마찬가지일지 모르지. (조영로)

348-349.

"그 사람은 가장 먼저 네 잠을 빼앗을 거야. 그러고 나서 네 웃음을, 네 자존심을, 네 친구들을 빼앗아 갈 거야. 아무도 너를 존중하지도 알아보지도 못하게 할 거야. 네가 실망과 외로움 속에서 시들고 색이 바래다가 결국 너 자신을 죽이게 할 거야." (몽구)

"나는 네게 실망했어. 너는 너무 평범해져 버렸어. 아니, 나약해져 버렸어." (광수)

467.

대체 독이 뭐야? 그 물질이 무엇이든 간에, 몸 안에 들어와 생체의 리듬과 균형을 무너뜨리면 그게 독이야. (수호)

 

 

 

 

지난해 겨울, 유난히 혹독하게 추웠던 어느 날 새벽에 나는 의식불명 상태에서 구급차에 실려 북한강 변의 한 종합병원으로 옮겨졌다. - P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또 이따위 레시피라니 - 줄리언 반스의 부엌 사색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THE PEDANT IN THE KITCHEN》

이렇게 허당기 가득한 까칠함이라니...... . ㅎㅎ

줄리언 반스 작가의 사진을 보면 꾹 다문 입에 옅은 미소를 띈, 적당한 이마의 주름은 영국 신사 느낌이 가득하다.

그동안의 글들도 그렇지만 이 책도 썩 말랑말랑한 글은 아니다. 하지만 투덜거림 작렬하는 이런 유쾌한 내용은 내가 읽어본 작가의 책 중에서는 처음인 듯 하다.

책을 다 읽은 후 표지를 다시 보자니, 불만 가득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는 작가의 모습을 보면 웃음이 난다. 그의 불평이 들리는 것 같다.

31.

훌륭한 요리사가 되는 것과 쓸 만한 요리책을 집필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 후자는 소설처럼 창의적인 공감 능력과 정확한 표현력을 필요로 한다. 대부분 사람들의 삶에는 소설로 쓸 만한 내용이 없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요리사들에게는 요리책으로 쓸 만한 것이 없다.

레시피에서 계량이나 (과)채소의 크기를 언급할 때 한 '덩이'라든가 포도주 한 '잔', 혹은 '중간' 크기의 양파에 대해 불만스러워(불안하니까)하는 부분에서는 폭풍 공감을 할 수 밖에. 엄마나 할머니께 요리(라고 하기엔 심하게 민망함)를 배운 나로서는 늘 불만이였던 것이 계량이었다. 한 국자, 한 컵 등 기구의 사이즈도 모두 다르건만 두 분의 계량법은 늘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럴 수 밖에. 두 분은 부엌과 부엌 내 모든 용품을 공유하셨으므로.) 그 애매한 계량이 내 요리의 실패의 원인이라고 둘러댔기에 작가의 불만에 동의!를 외친다.

의외이고 조금 놀라웠던 건 작가가 백 권에 육박하는 요리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 무엇 때문에? 심지어 주스기도 없는데 주스책은 왜? 읽다보니 요리책을 선택함에 있어 실패를 많이 한듯 하다. ㅎㅎ 그래서 독자들에게 요리책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74.

요리를 시작하고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교훈은, 요리책이 아무리 솔깃해 보여도 어떤 요리들은 반드시 음식점에서 먹어야 제일 맛있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디저트가 위의 사항에 해당된다고 하는데, 나의 경우에는 빵이 그렇다. 익숙한 두세종류를 제외하면 빵이 아니라 떡이 되어버린다.

78.

어려움도 어려움이지만 시간도 문제다.

내 말이...... . 레시피대로 시간을 맞춰도 늘 넘치거나 모자란다. 그래서 감으로 하면 또 폭망. 결국은 내가 왜 이걸하고 있나. 이 시간이면 책 두 권은 읽었을 것을... 이러고 있다.

101-102.

요리책의 책장들에(...) 가지각색의 잡다한 자국들이 많다는 건 그만큼 그 책에는 명예다.

나의 요리책 책장(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소박한)에 꽂혀있는 책들 중에 요리의 흔적이 남아있을 만큼 명예로운 책은 얼마나 되려나? 작가가 소장한 요리책의 1/10 정도만 가지고 있는데도 나는 크게 활용을 못하고 있다.

110.

최고의 책은 저자를 알지도 못하는 독자들까지 저자의 친구라고 믿게 만드는 책이다.

138.

요리한다는 것은 법석 떠는 과정을 거쳐 불확실성을 확정성으로 변형시키는 일이다.

생각해 보면 요리를 한다고 부엌에서 한참 분주하게 움직이다 뒤를 돌아보면 뭔가가 한가득 벌려져 있다. 정리를 하고 완성품을 식탁에 올리면! 애걔...... . 이 노고의 과정을 먹는 이들이 알아줘야하는데 말이다. ㅎㅎ

164.

요리는 즐거움이 전부여야 하지 않을까? 계획을 세우고 장을 보고 요리를 할 기대감에서 오는 즐거움, 지나치게 자축하지 았는 흐뭇한 회상의 즐거움. 하지만 그런 즐거움을 누리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드문가.

친구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해 놓고 메인 요리인 포르치니 라자냐를 를 식당에서 주문 후 굽기만 한 후 자신이 요리한냥 시치미 떼는 줄리언 반스는 상상이 안된다. 심지어 레시피를 알려달라는 친구에게 자신만만하게 알려주는 모습이라니......

또한 사용하지도 않고 사용할 예정도 명확하지 않은 주방용품을 버리지도 못하고 창고에 던져놓는 모습과 요리도 요리지만 아름답고 효율적인 주방을 꿈꾸는 작가의 모습은 여느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아 웃음이 난다.

꿈의 부엌을 소망하지 말라. 그러한 부엌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에 걸맞는 요리를 해야한다는 스트레스와 요리를 망쳐도 변명거리가 없어 곤란할 것이니. 큭큭

줄리언 반스가 요리라니...... . 라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읽다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포개졌다. 요리를 통한 사람에 대한 애정, 도덕성, 추억, 소통 등 오래 전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 안에 나와 함께 했(었)던 이들이 떠올랐다. 이번 주말에는 '그들'을 초대해 오븐에 닭이라도 구워야겠다.

좋은 요리란 일상생활의 간단한 음식을

성실하게 만드는 것이지,

뚜렷한 목적이 없는 진수성찬이나

진기한 요리를 전문가처럼

훌륭히 조합해내는 것이 아니다.

조지프 콘래드 (p18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