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일대의 거래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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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안녕, 아빠다. 조만간 일어나겠구나. 헬싱보리는 지금 크리스마스이브 이브 아침일텐데, 나는 사람을 죽였다.  
 
그가 죽인 사람은 누구일까? 
 
성공을 위해 달리기만 한 남자가 있다. 아들이 성장하는 동안 학교를 데려다 준 적도, 손을 잡아 준 적도, 생일 촛불을 끌 때 옆에서 있지도, 잠자리에서 책을 읽어 준 적도 없고, 아내가 자신을 떠나는지도 몰랐으며,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태어나는 순간 쌍둥이 동생을 누르고 먼저 나왔던 그 순간부터. 대신 누구나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유명하고 중요한 사람이 되었지만 가족은 떠났고 그에게 남은 것은 희귀암 뿐이다. 그는 생각한다, 암조차도 자신은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 
 
34. 
모든 부모는 가끔 집 앞에 차를 세워놓고 5분쯤 그 안에 가만히 앉아 있을 거다. 그저 숨을 쉬고, 온갖 책임이 기다리고 있는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갈 용기를 그러모으면서. 스멀스멀 고개를 드는,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숨막히는 부담감을 달래며. 모든 부모는 가끔 열쇠를 들고 열쇠 구멍에 넣지 않은 채 계단에 10초쯤 서 있을 거다. 나는 솔직했기에 딱 한순간 머뭇거리다가 도망쳤다.
 
35.
"대부분 사람은 그냥 목숨을 연명할 뿐이야. 그들은 자기가 가진 것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건 없어. 물건에는 기대치에 따라 매겨지는 가격이 있을 뿐이고 나는 그걸 가지고 사업을 한다. 지구상에서가치가 있는 건 시간뿐이야. 1초든 언제든 1초고 거기엔 타협의 여지가 없어." 

 
 
암에 걸러 어른이 되어버린 다섯 살 소녀.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냐는 엄마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엄마를 위로하는 것이라는 걸 알기에, 웃으며 '우주 사냥꾼'이라고 답하고 씩씩해지려는 아이. 다음 생일 파티를 기약할 수 없는 소녀는 울고 있는 엄마에게 차마 물을 수 없어 희귀암에 걸린 남자에게 죽음이 무엇인지, 죽으면 추운지를 묻는다. 남자는 그 아이를 통해 아들을 본다.  
  
 
언제부터인가 폴더를 들고 다니는 회색 스웨터를 입은 여자가 보인다. 다섯 살 소녀는 그녀가 무섭다. 남자는 그녀를 단짝 친구의 장례식에서, 요양원의 아버지 방에서 보았으며, 밤사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방에서 회색 털실 뭉치를 발견했다. 병원에 나타나는 회색 스웨터의 여자. 그녀는 누구를 만나러 온 것일까.  
 
46.
"씩씩하게 굴 필요 없어. 무서우면 무섭다고 말해. 생존자들은 전부 그러니까."
"아저씨도 무서워요? 폴더를 들고 다니는 아줌마가? 나도 그래요." 

 
 
아들은 자신을 닮지 않았다. 남자에게 있어서 아들은 실망스러운 결과물이었다. 얼마든지 좋은 취직 자리와 높은 위치에 설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아들은 작은 고향 마을에서 자리를 잡았다. 행복하냐는 질문에 충분히 행복하다고 말하는 아들. 아들은 다행스럽게도 행복해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랐다.  
 
64.
나는 자식 농사에 실패했다. 너를 강하게 키우려고 했는데. 너는 다정한 아이로 자랐으니. 

 
 
울부짖는 남자에게 회색 스웨터 여자는 말한다. 
 
"죽음을 죽음으로 맞바꾸는 건 못해. 목숨을 목숨으로 맞바꾸는 거라면 모를까." 
 
목숨을 맞바꾼다는 것은 대신 죽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왔던 인생 전체를 삭제 당하는 것. 즉 존재 자체가 없어짐을 뜻한다. 남자는 두렵지만, 이제 일생일대의 거래를 하려고 한다. 
 
 
이 남자는 왜 그런 거래를 했을까? 단순히 어린 아들 곁을 다정하게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 작은 행복의 가치를 폄하한 후회 때문일까? 나는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건 남자의 거래를 통해 감성적 혹은 낭만적인 행복에 대한 가치보다 이 남자(많은 현대인들)가 이렇게 살아야만 했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사람보다 돈이 우선인 세상에서 이 남자의 삶의 방식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일까? 돈보다는 다양한 삶의 가치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말보다는, 다양한 삶의 가치를 볼 수 있는 환경이 먼저 우선되어야하지 않을까.
 
73.
행복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다. 그들의 세상에는 예술도 음악도 마천루도, 발견도 혁신도 없다. 모든 리더, 네가 아는 모든 영웅은 하나같이 집착이 심하다. 행복한 사람들은 무언가에 집착하지 않고, 질병을 치료하거나 비행기를 띄우는 데 일생을 바치지 않는다. 행복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그들은 현재를 위해 살고 오로지 소비자로서 지구상에 존재한다. 나와 다르게. 

안녕, 아빠다. 조만간 일어나겠구나. 헬싱보리는 지금 크리스마스이브 이브 아침일텐데, 나는 사람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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