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죽음 - 다문화의 대륙인가? 사라지는 세계인가?
더글러스 머리 지음, 유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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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머리말에서 '유럽이 자살하고 있다'라는 표현을 써가며 현재 유럽의 본토 백인의 수를 능가하는 이민자 유입에 대한 심각성에 대해 직접적으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20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유입된 이주민들, 특히 무슬림의 수가 급증하면서 사회적 혼란을 야기시키고, 인종.종교 차별 철폐 등 인도주의 뒤에 숨어 정치적인 이유로 무분별하게 난민을 수용함에 따라 유럽의 문화와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음을 비판한다.

먼저 책의 내용을 정리해 보자.

탈식민화 과정 이후, 과거 제국 시민들은 받아낼 빚이 있는듯 노동자 유치 우선권을 갖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은, 이주 노동자들은 일시적인 현상일 테고 일이 끝나면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대륙 전체에서 이주 노동자들 대다수가 가족을 데려오며 뿌리를 내리고 눌러앉아 일부가 되었다. 유럽 각국의 이민 단기 정책이 장기적인 반향을 낳았고, 나라마다 이민에 대한 장기적인 대책없이 조급하게 정책을 시행하면서 이민자로 인한 인구 비율이 역전되면서 대중적인 우려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러한 우려를 표명하는 이들을 '인종주의'와 '편협성'을 들어 공격하기에 이른다. 정치인 또한 유권자들을 의식해 개인의 주장을 감추고 있다. 역으로 사회의 변화를 원하지 않는 백인 소수자의 입장을 인정하지 않고, 유럽 내에서 무슬림들에 의해 자행되는 범죄를 축소 보도하는 것, 그리고 다양성을 장려했던 '우리 문화'를 언급하는 것에 대한 상실 또한 문제다.

​저자는 영국이 단 한번도 '이민자의 나라'였던 적이 없었음을 강조하면서 이민 자체보다는 이민의 규모와 질이 문제라고 지적하다. 그리고 도대체 제국주의에 대한 죄책감은 얼마나 지속되어야하며, '다양성'에 대한 입증은 언제 끝나는 것이냐고 묻는다. 현재 런던의 일부 자치구의 다양성이 부족한 까닭은 백인 영국인 수가 이민자 수보다 적음을 근거로 삼아 심각한 상황임을 말한다.

유럽인들은 평생 일하면서 복지국가 체제에 세금을 냈기때문에 국가로부터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수용국에 도착한 이민자 가족은 세금을 내지 않고 복지 혜택을 받고, 세금을 내기까지는 일정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노동 시장이 대폭 개방되면 시장의 임금이 낮은 계층의 일자리를 뺏길 것이고, 여러 해 전부터 주택 부족에 시달리는 영국은 주택 문제가 더 극심해질 것이다. 이는 학교 전입 공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민 옹호자들은 '내국인 노동자들이 이민자들 때문에 피해를 본다는 증거는 없다'라고 강변할 때 <평균적인 이민자>를 거론한다. 부유하고 문화적 이질감이 적은 이민자들을 <평균적인 이민자>로 내세운다. 이것은 술책에 불과하며, 이민 노동자들은 본국에서 버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고, 그 돈은 지역 경제에서 순환하는 대신 영국 바깥으로 보내진다고 항변한다.

이민 옹호자들은 출산 저하와 인구 고령화, 인구 감소를 이유로 들어 이민자들을 유입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출산 저하를 걱정한다면 이민자들 들여오기에 앞서 현재 자국의 국민이 왜 아이를 낳지 않는지 따져보는 게 합리적일 것이며 아이를 양육할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정부가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물어야 마땅하다. 또한 우선 기존 인구를 대상으로 출산을 장려할 수 있는 정책이 있는지부터 살펴보는 게 현명한 처사일 것이다. 유럽 국가에서 젊은이들이 '하려고 하지 않는' 일자리들이 있어 대체 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있어서, 특정 직업을 경시하도록 교육받은 결과이며 이러한 사회적 관점이 널리 퍼져있는 것이 문제라고 일갈한다. 유럽에는 이미 저숙련 노동자가 많이 있는데, 왜 저숙련 노동을 할 사람을 수입해야하는지 자문한다.

다양성은 굳이 이민자 유입이 아니더라도 가능하다. 이민자로 인한 문화적 혜택이 증가한다는 가정은 오류다. 적극적으로 다양성을 들여오려면 예전 식민지만이 아니라 정말 생소한 나라들에서도 사람들을 찾는 게 타당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구 증가나 다른 수단을 통해 신규 이민자들이 국가적 풍경 자체를 아예 바꿔버릴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동성애나 여성 문제에 있어 여러 세기 뒤쳐진 도덕적 잣대를 가진 이들이 다양성을 조성한다는 명분하에 수입됐기 때문이다(여성과 동성애를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무슬림의 사례). 여기서 입증되는 바는 대규모 이민 유입의 이득에 대해서는 잘 인지되어 있는 반면, 그에 따른 손해를 인정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세계화 때문에 이민을 막을 수 없다면, 이런 세계적인 문제가 왜 다른 나라들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지를 지적해야 한다. 세계 경제 대국인 일본, 중국 등이 대규모 이민 유입을 막고 있다. 유럽은 세계에 더 엄격한 태도를 취하고, 유럽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새로 오는 사람들에게 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2010년 독일 총리는 포츠담 연설에서 '다문화 사회 건설은 완전히 실패'했다고 발언했다. 독일의 이민 정책에서 생겨나는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고 이민과 통합 에서 나타나는 오류를 비판했다. 뒤를 이어 영국 총리는 '분리된 공동체들이 우리 사회의 가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용인'했다고 선언했으며,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은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정체성에만 지나치게 몰두하면서 그들을 환영하는 나라의 정체성에는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고 말했다.

'다문화주의'는 정의하기 어려운 용어다. 앞서 언급한 국가의 수장들이 말하는 것은 인종적으로 다양한 사회나 이민을 환영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국가가 후원하는 정책으로서의 '다문화주의'였다. 국가가 이민자들이 지금 살고 있는 나라의 것과 정반대되는 관습과 법률 아래 살 것을 장려한다는 구상을 비판한 것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법치와 일정한 사회적 규범을 적용하는 포스트다문화 사회를 호소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문화주의'라는 용어의 의도가 사람들을 하나의 국민으로 통합하는 것이었다면 정반대의 효과를 낳았으며 실제로는 정체성들의 균열을 낳았고, 피부색이나 정체성에 무감한 사회를 만드는 대신 갑자기 정체성이 다른 모든 담론을 지배하게 만들어 버렸다고, 그래서 다문화 시대는 유럽의 자기부정 시대였다. '다문화주의' 시대는 조용히 '다종교주의'시대로 바뀌었다. 한때 흑인, 카리브인, 북아프리카인 등의 문제였던 것이 이제는 무슬림이나 이슬람의 문제가 되었다.

유럽은 두 가지 모순에 매달린다. 세계의 누구든지 유럽에 와서 유럽인이 될 수 있으며, 유럽인이 되기 위해서는 유럽에 사는 사람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과 새로 오는 이주자들이 전례 없이 많을 뿐만 아니라, 가끔은 오랫동안 유럽에 존재하지 않았던 관습까지 가져온다는 사실을 항상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쪽은 낙관주의고, 다른 한쪽은 실제 벌어지는 상황이다. 세계의 불우한 사람들을 앞에 놓고 문을 열어 줄 것인지, 아니면 매몰차게 닫을 것인지의 선택에 직면해서 저자가 분명히 하는 것은 어느 한쪽을 선택할 시에 유럽의 최악의 운명을 예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유럽은 난민 사태 이전부터 지속적인 죄책감과 강박적 죄의식이 밑바탕에 흘러 도덕적 자기도취에 취해있다. 세 살짜리 아일란의 죽음에 자기 반성적 태도를 취한 건 유럽 뿐이었고, 난민 사태가 발생하는 내내 내전에 실제로 관여한 나라들을 비난한 이는 거의 없었고 그들은 죄책감도 가지지 않았다. 서구 유럽은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에 대한 죄의식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제 유럽만이 그 죄의식의 부담을 짊여져야하는 것은 아니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정복하고 승자가 패자를 학대하는 것은 지구상 대다수의 이야기다. 직접적인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유럽 정착민과 제국민의 후손들만이 자기 조상들이 한 행동에 지속적으로 죄책감을 느껴야한다. 오직 유럽인 후손만이 과거에 대해 지속적으로 속죄하고 있다.

이민자 문제에 있어 회원국들은 대륙 외부 국경을 경비하는 데 협조하기로 약속했지만, 실제로 이 일은 최전선에 있는 나라들의 몫이 된 상태다. 이주자가 유럽연합 회원국에 난민 지위를 신청하면 그 나라가 신청을 처리할 법적 의무가 있다. 이론상 이주자들이 중복 신청하거나 국가들이 이주자를 서로 떠넘기는 사태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그 책임은 거의 유럽 남부 국가가 떠 안고 있다.

유럽은 수십 년 동안 유럽인들 사이의 국경을 허물기 위해 노력했지만 몰려드는 이민자들과 이민자를 위장한 테러리스트, 그리고 다발적으로 발생하는 테러로 인해 유럽의 각 나라들은 다시 장벽을 세우고 있다.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범죄와 명예 살인을 비롯한 강력 범죄, 그리고 테러 등의 일부는 이주 물결 속에서 유럽으로 건너온 사람들의 소행이다. 또한 수용소 내에서 벌어지는 강간과 성폭력 건수가 점점 늘고 있다. 유럽은 이민자 유입에 대한 말과 현실의 간극을 목도했으나 이민자들을 본국으로 보내는 비용이 적지 않고, 문제는 송환되는 국가가 자국의 국민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 혹은 자국에서 출발했지만 자국 국민이 아닌 경우에는 받아들이지 않는 나라들로 인해 이민자 송환은 녹록치 않다. 유럽의 공무원들은 난민의 국외 추방을 포기한 상태다. 2015년 독일 총리는 유럽인들이 난민들을 책임져야 한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유럽인들이 다른 유럽인들의 안녕을 보호해야 하는 책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2016년 12월, 아니스 암리라는 24세 튀니지인 청년은 서베를린에서 폴란드인 운전사를 죽이고 트럭을 빼앗아 시장의 인파 속으로 돌진했다. 그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을 신분을 위조해 가며 아무 거리낌없이 드나들었다. 암리는 2011년 람페두사섬에 이주자로 상륙했다. 이와같은 사태는 유럽의 외부 국경 시스템이 느슨하고 내부 국경 시스템은 아예 없었던 덕분이다.

유럽 대륙 전체는 믿음과 신앙을 잃었다. 이것은 유럽의 토대를 이루는 이야기를 상실했음을 의미함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인식하는 경우는 드물며, 유럽은 종교를 상실함으로써 대륙 차원의 도덕적, 윤리적 관점과 지리에서도 구멍이 생겼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나치즘으로 인해 애국주의 이데올로기는 파괴됐으며, 기독교 세계인 유럽인은 하느님만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믿음도 잃었다. 이로 인한 20세기 말에 이르러 유럽인들은 일정한 피로감을 느끼거나 물려받았다고 볼 수 있다. 대규모 이주가 유럽 사회의 피로도를 높이는 이유는 유럽 바깥 출신의 이주자 공동체는 유럽의 자유지상주의와 사회자유주의를 수용하려 하지 않는다. 새로온 이주자들은 현대 유럽의 자유주의를 보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더욱 공고히 한다. 그런데 유럽인들은 그런 사람들에게 유럽 고유의 가치를 옹호하려고 하지 않는다. 새로 오는 이주자가 명백한 위협이 되고 동화할 의지가 없는 사람들로 구성될 것이라는 생각만으로도 피로감은 발생한다. 그런데 동유럽, 특히 슬로바키아, 폴란드, 헝갈, 체코공화국 등은 이주자 할당치를 굳건하게 거부했다. 서유럽은 왜 이렇게 하지 못하는가!

근래 몇 년 사이에 유럽에서 벌어진 테러의 주범은 무슬림 현지인들이다.유럽인들은 테러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무슬림 유럽 현지인들이 테러범들을 영웅시 하는 것에 우려를 표한다. 테러 공격이 발생할 때마다 유럽 각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테러 사건이 이슬람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이슬람은 평화적인 종교라고 이야기하지만, 대중은 동의 하지 않는 것 같다.

정치인들은 조직 문제에 전념할 뿐이다. 의미로 가득한 삶이 어떤 것이지에 대한 심층적인 시각을 제기하지 않는다. 현재 유럽인은 해결된 존재로서 삶을 살고, 그들 자신의 경험을 겪지 않으며 여전히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분열되고 모순적인 존재로서 자신을 경험하고 있다. 유럽은 문화를 잃고 있다. 여성과 동성애자 권리 운동, 성별 이분법을 벗어난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위한 캠페인 등, 자유주의의 가치가 너무도 강력하고 설득력이 있어서 시간이 흐르면 다른 대륙에서 온 사람들의 생각이 바뀔 것이라고믿는 듯 하다. 자유주의의 꿈은 종교만큼이나 강력해 보인다. 자유주의라는 대중의 종교에 의해 유럽 종교의 구멍은 더 넓어질 것이다. 이는 오늘날 예술과도 같은 선상에 있다. 우리 시대의 예술은 우리 안에서 다른 어떤 것을 타오르게 하려는 시도 자체를 포기한 것 같다. 특히 전후 유럽(독일) 예술가들의 작품에는 죄와 책임의 층이 마치 안개처럼 깔려 있고 말한다. 문화는 사회를 반영해야하는데 이제 사회가 바뀌고 있다. 유럽에 온 이주자들은 유럽 문화 속으로 뛰어들거나 문화의 일부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유럽이 자신의 문화가 자기주장을 펼칠만한 확신이 부족한 바로 그 순간에 그들 고유의 문화를가져와 들이밀었다.

저자는 유럽 사람들을 불공정하게 대하지 않으면서도 곤궁에 처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논한다. 첫째, 문제의 근본, 즉 유럽이 애초에 누구를 위한 곳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들째, 난민 신청 절차를 유럽 외부에서 처리하는 것이다. 세째, 전 유럽이 협력해서 난민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전부 국외 추방하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네째, 임시 난민 시스템이다.

저자는 지금 이대로라면 유럽에 미래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며 지난 날의 유럽을 사라지게 놔둘 것이 아니라면 겉치레 따위는 치워야 할 때임을 성토한다.








저자는 특정 국가의 시민이 아닌 '유럽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유럽인으로 지정하는 저자가 정의하는 '유럽인'은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걸까? 무엇에 기반해서 '유럽인'을 정의하는지부터 물음표를 찍으면서 읽기 시작했다. 확실한 건 현재 사는 지역을 기준으로 유럽인이라는 명예(?)를 부여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민자 수용은 많은 부분들을 고려해야함이 맞다. 수용하는 국가의 경제적 능력, 주택 문제, 무엇보다 현지인들의 동의와 정서적 공감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민자 수용에 반대하는 의견도 존중되어야 하며 반대하는 사람들을 비하와 폭력으로 몰아세우는 것 또한 인권침해다. 또한 지난 과거에 대한 죄책감을 언제까지 안고 살아야하냐는 저자의 말처럼 책임을 무한정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러나 역사에 있어 원인 없는 결과는 있을 수 없는만큼, 유럽이 언제까지 제국주의의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하느냐는 항변에는 숙고해야할 것이다.

저자가 우려하는 부분은 이민자의 질을 따지지 않는 무조건적고 무한정한 유입과 난민으로 가장한 테러리스트, 엄청난 비용을 초래하는 사회적 문제, 유럽에 동화하지 않는 무슬림의 종교와 문화, 역전되어가는 인구 분포와 밀도, 그리고 이슬람 종교에 의해 장악될 유럽의 미래다.

저자는 독일 총리의 '더욱더 통합이 중요하다'라는 발언을 통해 독일 사회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독일의 법률과 헌법을 따라야 하며, 정착하려는 나라의 언어를 익혀야 한다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나 민족성을 무조건 배척할 수는 없다(무슬림의 명예 살인이나 여성 할례를 문화라고 여긴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주민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더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들이 소수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이주자 성공 사례로 이스라엘을 들고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례가 적절할까? 세계대전 이후 유대민족을 근간으로 하는 신흥국가에서 유대교인을 받아들인 것을 유럽에 유입되는 난민과 같은 선상에 놓는 것이 옳은 비교일까? 살만 루슈디의 파트와fatwa 사건이 잔인하고 폭력적인 것이며 현지인들까지 위험에 몰아넣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에 대한 원인을 이주민에 두어 이주민 유입을 금지하기보다는 대안을 법제화 하는 등의 구체적인 대책에 무게를 두는 것이 어떨까싶다. 저자에게 묻고 싶다. 이슬람에서 자행되는 여성 할례나 명예 살인 등이 유럽 대륙이 아닌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무방하다는 뜻인가? 이 참혹한 행위가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벌어진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반인륜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여성과 소수자를 대상으로 하는 폭력은 유럽이 아니라 어디에서도 일어나서는 안되는 범죄다. 이를 종교 혹은 관습 차원에서 '우리 땅에서만 벌어지지 않으면 돼'라는 사고는 지양해야 한다. 그리고 무슬림의 동성애 혐오를 짚고 있는데, 동성애 혐오는 무슬림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무슬림이 이에 대해 극단적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오직 무슬림만 그렇다는 듯한 화법은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다.

​저자는 대규모 이주부터 제국주의적 만행에 대해서 왜 유럽만이 죄의식을 갖고 속죄를 해야 하느냐, 왜 같은 역사를 가진 다른 민족, 종교에는 속죄를 강요하지 않느냐고 항변한다. 이는 자기만 규범을 지키고 정직해서 억울하다는 일차원적 논리로만 들린다. 속죄를 하지 않는 국가를 문제시해야지, 속죄를 하는 게 억울하다는 듯한 해석은 그야말로 본말전도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유럽의 후손들은 죄의식에 의한 비굴한 감정을 그만해야한다고 주장하는데 후손들이 조상의 잘못으로 죄의식을 갖을 필요는 없다는 것까지는 동의한다. 그러나 저자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속죄는 비굴함이 아니라 용기다. 조상들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고 속죄해야하는 까닭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에 있어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함이다.

왜 유럽인들이 세계 어디든지 가는 것은 식민주의가 되는 반면, 세계 나머지가 유럽으로 오는 것은 정의롭고 공정한 것이냐고 되묻는 더글러스 머리. 유럽 열강국들이 세계를 향했던 방식은 무차별적이고, 폭력적이다. 그것을 행하는 도구가 무력이든 돈이든 폭압적이라는 것이다. 즉 강자가 약자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것과 약자가 강자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것을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있나? 또한 저자는 유럽인들이 유럽 중심적 시각이나 감정을 가져서는 안될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데, 물론 개인이 자국에 대한 자긍심이나 애국심을 갖는 것에 무슨 단서를 달겠는가? 그러나 강대국이 자국을 혹은 자국이 속한 대륙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 재편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이것은 분명한 식민주의 사고다. 이는 이미 역사에서 증명된 사실이다.

저자는 현재의 상태를 지속할 경우를 가정하고 유럽의 미래를 진단한다. 국제적 도시가 국제적 나라와 비슷한 존재로 발전하는 유럽에는 많은 일들이 벌어겠지만 더 이상 유럽이 아니게 될 것이고, 어쩌면 유럽의 생활방식과 문화, 세계관은 작은 고립 지역에서 살아남을지 모른다. 유럽 토박이들이 소수자가 될 것이고 모든 상황은 다양성의 이름으로 유럽의 문화는 오히려 도태되어 갈 거라고 전망한다. 그리고 유럽 대륙 이외에 난민 문제를 외면하는 나라들에게 불만을 제기하면서 적어도 이주 문제에 관한한 세계는 유럽의 선의를 악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후기에서 그동안 일어났던 유럽 내 무슬림 테러와 유사 범죄, 그리고 테러의 허위 신고 등에 대해 서술하는데, 그중에서 머릿속에서 그림이 그려졌던 사건이 하나 있다. 맨체스터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무슬림 남성 세 명이 탄 승합차가 런던 브리지를 건너는 보행자들을 행해 돌진했다. 곧바로 차에서 뛰어 나온 남성들은 보행자들의 목과 몸을 난자했는데, 여덟 명이 살해되고 많은 중상자들이 발생한 가운데 무장 경찰에 의해 범인들은 사살됐다. 경찰들은 현장에서 런던 시민들에게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일렬로 빠져나가라고 지시를 했다. 또 다른 공격범이 있을 것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저자는 현장을 빠져나가는 런던 시민들의 모습이 '포로 상태로 연행되는 패잔병의 모습'에 가까웠다고 썼다. 그 장면을 어떤 매체를 통해서도 본 적은 없지만 머릿속에서 그려보니 저자가 책 속에서 울분을 토해냈던 것을 일정 부분 공감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주장에 많은 부분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종교와 난민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는 분명히 불순하며, 무엇보다 보통의 시민들에게 가해지는 살상행위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용납해선 안 된다.

인종, 민족, 국가를 떠나 반인류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전 지구적으로 개선해나가야 할 방향을 함께 찾아야 한다. 저자가 우려하는 바는 충분히 짐작하지만, 이주민 특히 난민 문제는 더이상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니다. 함께 해결해야 할 공동체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난민 문제는 더 이상 난민 문제에 국한하지 않는다. 21세기 현재에는 역사적인 죄책감 뿐만 아니라 지구 온난화에 의한 기후 변화, 환경 문제까지 전 분야를 아울러 복합적으로 발생하는 사항이 되어버렸다. 모두가 머리를 맞대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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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레 망다랭 1~2 - 전2권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이송이 옮김 / 현암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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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보부아르가 바라본 전후 지식인과 사회, 그리고 여성주의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작품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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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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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7월 어느날, 어머니가 수용소로 끌려가고 얼마 안 있어 아버지마저 사라진 후 조나단은 여동생을 데리고 카바용의 친척 아저씨의 집에서 숨어 지내며 농토 일을 배우면서 농사꾼으로 살아가다가 1950년대초 아저씨가 군대에 입대시켜 3년 동안의 병역의 믜무를 마치고 돌아와보니 동생은 이민을 떠난 후였다. 아저씨의 권유로 결혼을 했지만 아내는 4개월 만에 출산을 하고, 같은 해 낯선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을 쳤다. 조나단은 이러한 불상사를 겪고 나자 사람들을 절대 믿을 수 없다는 것과 그들을 멀리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고 파리로 향한다. 그곳에서 어느 은행의 경비원으로 취직하고 아주 작은 방 하나(그의 방은 24호다)를 얻었는데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의자 하나가 있을 뿐이지만 조나만은 아주 만족하며 평화롭게 30년을 살았다. 그곳은 조나단에게 세상 속의 안전한 섬 같은 곳이었고, 확실한 안식처였으며, 도피처였다. 그렇게 그 방에서 평온한 세월을 보내고 1984년 8월 어느 금요일 아침이 되었다. 


그날 아침, 조나단의 방문 밖에 서 있는 생명체가 있었으니 비둘기였다. 죽을만큼 놀란 조나단은 정신을 수습하고 출근 준비를 서두르는 와중에도 저녁에 다시 집으로 돌아와 비둘기를 마주할 생각에 아득하다. '밤은 어디서 보내지? 호텔에서 묵어야겠군. 면도기, 칫솔, 갈아입을 옷가지, 개인 수표책, 혹시 모르니 저금통장까지'. 비둘기가 방문 앞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가정 하에 조나단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한여름에 겨울 장화를 신고 겨울 외투에 목도리를 두른 차림으로 비둘기를 피해 도망치듯 달음박질을 친 조나단. 


점심 시간에 그날 묵을 호텔을 예약하고 나니 예정에 없던 지출때문에 점심을 공원에서 해결하기 위해 자리를 잡은 조나단의 시선에 자주 보았던 거지가 눈에 들어온다. 그를 보고 있자니 은근 질투와 부아가 치민다. 자기는 꼬박꼬박 같은 시간에 같은 자세로 같은 업무를 보며 근면하게 일하고 돈을 벌고 있건만, 저 거지는 너무나 태평한 자세로 사람들의 동정심과 적선에 빌붙어서 동전을 거둬들여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살고 있다. 거기다 파리에 입성한 이래 오늘 최대의 위기를 맞았으니 그동안 세워두었던 인생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지경이다. 자신이 일평생 바란 것이라고는 고작 마음이 평안한 작은 공간을 갖는 것 뿐이었는데... .  심지어 점심을 해결하고 자리를 뜨는 순간 나사에 걸려 바지까지 흉물스럽게 찢어진다. 조나단은 관처럼 보이는 호텔방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잠자리에 들면서 다짐한다. 내일 자살해야지. 


59.
자신의 존재를 둘러싼 확실해 보이는 것들이 완전히 부서지는 데 과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가 궁금해졌다. 



그러나 악몽을 꾸고 부리나케 돌아온 그의 안식처 24호 방 앞에는 비둘기도, 바닥의 오물도, 깃털도, 그 어떤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비둘기>는 유년시절 전쟁 통에 가족을 잃고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 타인과의 소통을 최소화하고, 24호 방 안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대중의 익명성 안에서 안주하는 조나단이 쉰 살이 넘어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는 만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조나단 노엘, 결벽증이 심하긴 하지만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오십 대 남자다.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고, 부여된 업무를 하며, 그날 하루를 무사히 마친 것에 안도하는 모습은 여느 도시인과 다를 바 없다. 거리에서 천하태평으로 늘어져 있는 거지를 보면 '네 팔자가 상팔자다'라는 질투(?) 아닌 질투를 하다가도, 수치심도 없이 길에서 아무렇지 않게 용변을 보는 모습을 보면 '저런 인간은 되지 말아야지' 새삼 다짐을 한다.


소설에서 비둘기는 조나단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비둘기는 가족을 잃게 한 전쟁이며, 자신을 군대에 보낸 친척 아저씨이며, 낯선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간 아내다.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상을 흔드는 공포. 그것은 호텔에서 악몽을 꾸는 조나단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90.
어른으로 성장했다는 것과 파리에서 늙어 빠진 경비원이 된 것은 다 꿈이고, 어린아이가 되어서 집의 지하실에 갇혀 있는 것이 사실 같았다. 밖에는 전쟁이 나서 집은 파괴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도대체 사람들이 왜 안오는 걸까? 왜 나를 구출해 내지 않지? 왜 이렇게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지? 다른 사람들이 없으면 나 혼자서는 절대로 살 수가 없단 말이야! 


18.
비둘기가 안에서 살고 있는 집에 인간이 같이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 비둘기는 혼란과 무질서의 대명사가 될거야. 


비둘기만으로도 하루를 버겁게 시작했는데, 이제 그를 예측할 수 없는 무질서의 혼란에 빠트리는 거지가 눈앞에 나타나고, 그것도 모자라 근무시간에 입어야 할 경비원 제목까지 나사에 걸려 찢어진다. 이 별일 아니라고 여겨질 일들이 조나단에게는 규칙과 예정에 없는 무질서의 혼란으로 밀어넣는다. 이쯤되니 조나단은 자신의 존재에 회의를 갖는다. 그토록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용변 볼 때 조차 제 몸 하나 숨길 수 없는 거지나 근무시간 내내 잡담이나 하고 팁이나 얻는 카페 웨이터가 아닌 왜 자신에게 이러한 위기가 닥친단 말인가! 


81.
스핑크스처럼 마음의 평온을 찾은 것이 아니라, 작동이 멈췄거나 줄이 끊긴 꼭두각시처럼 기둥 앞에 가만히 서서 마지막 남은 10의 근무 시간을 채웠고, 오후 5시 30분 정각에 빌망 씨가 잠깐 유리창에 모습으르 드러내며 문 닫자고 소리칠 떄까지 그렇게 있었다. 그러다가 조나단 노엘이라고 불리는 꼭두각시 인간 기계는 은행 안으로 순순히 들어가, 문의 여닫이를 조절하는 책상으로 가서, 직원들이 바끙로 나갈 수 있도록 안쪽과 바깥쪽 유리문을 두 개의 버튼을 누르며 조절하였다.



모든 사람들은 인생에서 때때로 저마다 각자의 비둘기가 등장한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일상이 흔들리고, 그로인해 관계가 틀어지거나 자아감이 위기를 맞기도 하지만 삶은 계속된다. 그러니 흔들리면 흔들리는대로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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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의 달
나기라 유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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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편견에서 그들이 이뤄낸 유대가 어떤 형태로 서로에게 구원이 되었을지 기대를 안고 책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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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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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소묘가 뛰어난 젊은 여성 예술가가 있다. 여인이 전시회에서 어느 평론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당신 작품은 재능이 있고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여인은 그 논평을 곧 잊었는데, 이틀 후 그 평론가의 비평이 신문에 실렸다. 그때부터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녀에게 재능은 있으나 깊이가 없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한다. 이제 본인 스스로조차 자신의 작품에는 깊이가 없다고 단정한 여인은 우울증으로 인한 약물 중독, 절망과 좌절에 빠져 극단적 선택을 한다. 그녀의 선택을 두고 초기작부터 그녀의 분열 증세가 나타났다고 평하며 비로소 열정과 깊이에 대한 극찬을 한다. 결국 여인은 작품이 아닌 그녀의 삶으로 깊이를 증명한 셈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많은 부분을 타인의 평가에 의존한다.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의 한마디가 자기의 의견인 양 보태고 더해져 여론이 되어 누군가를 휘둘거나 자신이 휘둘리기도 한다. 여인의 죽음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하는 자들은 누구일까?




[장인 뮈사르의 유언]
제네바에서 태어난 장자크 뮈사르는 일찍이 굼세공사에게 도제 수업을 받으면서 그 재능을 인정받아 20여년 동안 실력과 이력을 쌓아가며 궁중 보석 세공사로 임명되기까지 자수성가했다. 고위층과의 교분을 위해 학문, 문학, 예술과 라틴어까지 깊은 지식을 습득한 그는 쉰다섯 살에 은퇴해 파리를 떠나 파시 근교에서 저택을 짓고 한가로운 생활을 하던 중 정원을 관리하다가 조개 암석을 발견한다. 광범위하게 땅을 파나가면서 뮈사르는 지구가 조개 성분으로 뒤덮혀 있으며 지구가 조개화 되어 간다는 결론을 내린다. 


62.
모든 생명을 속박하고 모든 것의 종말을 가져오는 힘, 자신이 전능하고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표시로 조개화를 강요하고 삼라만상을 지배하는 최고의 의지는 거대한 원형 조개에서 나온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유연하고 열린 사고보다는 딱딱하게 석화되어 가는 조개처럼 규정과 틀에 갇힌 세상을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싶다. 




[문학의 건망증]
쥐스킨트의 문학과 독서가 삶에 미치는 영향의 단상을 써내려간 짧은 에세이.
우리는 망각이라는 선물이 덕분에 읽은 책에 대한 내용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소감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우리는 독서를 하는 과정 안에서 스스로 인지하지 못할 만큼 서서히 변화를 겪는다. 그 순간의 체험이 쌓여 삶을 변화시킬거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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