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즈모폴리턴 칭기즈 칸 - 팍스몽골리카, "수레가 통하는 길이 끊기지 않게 하라"
서정록 지음 / 학고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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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살로 기억한다. 아빠는 입학 축하 선물로 대백과사전을 사주셨다. 출판사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고급스런 빨간색 양장본으로 권당 천쪽이 훌쩍 넘는 책이었는데 인명사전에는 사이사이 인물들의 에피소드가 이야기처럼 실려있어서 동화책을 읽듯 인명 백과사전을 읽었더랬다. 내가 칭기즈칸을 처음 만난 건 그때였다. 익숙치 않았던 몽골이라는 나라, 우리나라 역사에서 흔치 않은 유목 민족이라는 점이 호기심을 유발했고, 모래알 같다는 부족을 일시에 통일한 지배자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그리고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고등학생 시절에 원나라를 접하면서 다시 몽골의 역사를 살짝 들췄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칭기즈칸을 만난다. 
 
 
막강한 힘을 가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 예수게이의 이른 죽음으로 비참한 어린시절을 보내야했던 테무친. 힘을 따라 움직이는 부족들은 예수게이가 죽자 곧바로 다음의 권력자를 향해 떠났고 테무친 일가에게 등을 돌렸다. 그러나 삶의 힘겨운 여정을 통해 테무친은 수장이 갖춰야할 소양과 몽골인이 국가로서 체제를 갖춰야하는 이유를 찾게 되며 무엇보다 평생의 지기들을 얻는다. 
 
힘있는 부족의 수장은 그 힘만큼 적들도 많다. 키야트족 예수게이가 죽은 후 테무친이 열다섯 살이 되는 해에 형제 부족 타이치오드족 사람들 300명이 그가 성년이 되기 전에 죽이기 위해 키모르카를 찾아온다. 테무친이 끌려간 곳은 타이치오드족의 본거지 빈데르였는데, 이곳은 칭기즈 칸과 인연이 깊다. 칭기즈 칸이 유년 시절을 보냈고, 그의 탄생지로 유력하며 몽골 고원 통일 후 대칸에 오른 곳으로서 고통과 영광이 공존하는 장소다. 타이치오드 사람들이 테무친을 죽이려고 하자 타르코타이 키릴토크가 그들을 만류한다. 죽음보다 더한 모욕을 주자고 제안하는데 이것으로 테무친은 목숨을 연장해 탈출할 수 있었다. 이때 테무친을 도왔던 소르칸 시라와 그의 두 아들 침바이와 칠라온은 평생 테무친의 동지가 된다. 테무친 일가가 몰락한 채로 핍박을 피해 숨어 들어간 푸른 호수에서 살 때 테무친은 말 여덟 마리를 도둑맞는다. 이때 우연히 만나 3일 밤낮을 함께 달려 말을 찾아준 보오르초 역시 영원한 친구로 곁을 지킨다. 
 
1185년 테무친이 스물네 살 되던 해 옹 칸을 찾아간다. 옹 칸이 위기에 빠져있을 때 구해준 이가 아버지 예수게이었고, 당시 그는 예수게이와 안다 맹약을 맺으며 "네 자손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은혜를 갚겠다"고 말했다. 그를 찾아간 테무친은 옹 칸을 아버지로 섬길 것을 맹세했고 실제로 그는 웅 칸을 끝까지 존중했다. 이때 보르칸 칼돈산에 사는 오리앙카이족의 자르치오다이 노인이 젤메라는 젊은이를 데려와 테무친에게 주고 갔는데 그도 평생동안 최측근으로서 테무친을 지킨다. 그리고 메르키트족이 테무친의 아내 버르테를 납치한 사건은 영원한 라이벌이자 친구인 자무카를 하나로 묶어준다. 물론 자무카는 안다 맹약을 두 번이나 맺으면서도 결국 서로에게 칼을 겨눌 수 밖에 없는 관계이긴 하지만. 이렇게 테무친의 주변에 사람이 모여들면서 그의 세력은 나날이 커져갔다. 그런데 몽골 고원의 부족들이 아무것도 없는 테무친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떠돌아 다니는 유목 부족의 특성상 칭기즈 칸에게 잔인한 면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이 책에서도 배신하거나 순응하지 않는 부족은 가차없이 멸족시키는 테무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다만 그 방식이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도륙이 아닌 원칙의 안에서 이루어진 결단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테무친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끝까지 고수한 부분은 신뢰와 존중과 소통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자신 혹은 부족의 야망이나 복수가 아닌 몽골 고원의 '국가'를 세우겠다는 이상이 있었다.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비참한 유년 시절을 보낸 경험으로 하층 유목민의 생활에 깊이 이입한 테무친은 그들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자기의 이상으로 받아들였다. 칸에 오른 후 천호제, 만호제를 통해 신분제도를 철폐하고 각자의 능력만큼 대접받는 세상을 열고자 했으며 쿠릴타이 문화를 특권층이 아닌 모든 백성들에게 확대했고 관철시켰다. 이러한 진정성있는 노력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추종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저자가 소개한 글들을 읽어보면 그는 칸이라는 칭호가 무색할 만큼 소박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자신에게는 특별한 자질이 없다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스스로를 부족한 사람이라고 여겼던 것 같은데, 그러한 모습을 백성들은 친근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몇 해 전, 지인들이 몽골 답사를 갔을 때 개인 사정으로 함께 하지 못했던 것이 새삼 못내 아쉽기만 하다. 지도를 옆에 두며 테무친의 발자취를 따라 갔는데, 그때 답사를 다녀왔다면 그를 따르는 발길이 좀 수월했을까? 여건이 되기를 기대하며 초원에서 그가 나누었던 신뢰와 소통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쓴 지극히 사적인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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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2 - 특별합본호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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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은 길산이 금강산에서 수련을 끝내고 구월산으로 돌아오고 선흥이 화적단, 대용이 수적단으로 합류하면서 무리의 체계를 갖춰 나간다. 거기에 박대근까지 상단의 수장이 되어 그들은 본격적으로 백성을 구명하고 타락한 세상을 혁명하는 활빈을 천명한다.  

의리로서 길산의 무리와 의형제를 맺었지만 양민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선흥과 대용이 도적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상황, 그리고 고된 부역과 터무니 없는 세금으로 인해 노비로 전락한 등장 인물들의 사연은 비단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부패한 세상에서 삶을 버텨낸 선량한 모든 양민들을 대변한다.  

내가 2권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생뚱맞지만, 그림처럼 글로 그려낸 땅과 산, 바다의 형세, 즉 지리다. 무슨 책을 읽든 지리와 관련한 책을 읽을 때면 지도를 옆에 펼쳐놓아야할 만큼 지리 감각이 바닥인 나로서는 이렇게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묘사가 놀랍기만 했다. 또한 구체적으로 묘사한 배 건조 과정까지 부수적으로 재미있는 부분이 많았다. 머릿속에 들어온 다른 하나는 양반 집안의 김아무개가 운부라는 기승으로 세상을 떠도는 사연은 천하디 천한 광대 길산의 내막과 다름하지 않으며 김기와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따라서 길산의 수하에 모인 모든 이들이 운부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실천적 행동가로서 혁명을 이루고자 하는 운부와 일평생 글로써 개혁정신을 펼친 반계 유형원이 조화를 이루었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도 스쳤다.  

참, 이경순이 화포장으로 우대용과 연이 닿았으니 조만간 묘옥과 길산도 해후하겠구나싶다. 크게 달라질 것은 없겠다만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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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러시아 원전 번역본) - 톨스토이 단편선 현대지성 클래식 34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홍대화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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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가난한 제화공 셰몬은 외상값을 받아 외투를 만들 가죽을 사려고 했지만 허탕만 치고 돌아오던 중 예배당 아래에서 벌거벗은 채로 추위에 떨고 있는 미하일이라는 젊은 청년을 집으로 데려온다. 오갈데 없는 미하일에게 제화 기술을 가르치자 그의 실력은 금새 소문이 났다. 그러기를 6년, 미하일라는 이제 셰몬의 집을 떠나려고 한다. 그가 제화공의 집에 와서 미소를 머금은 적은 딱 세 번 뿐이었다. 사람 안에 무엇이 있는지, 사람에게 무엇이 주어지지 않았는지,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 우리는 알고 있나?  
 
 
이 책을 처음 읽은 때가 고3 졸업식을 마친 직후였다. 눈치 안보고 서점을 어슬렁 거릴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었음에도 마냥 신나지만은 않았던 그때, 이 책을 동네 단골 서점에서 발견했다. 두껍기만 한 작가의 여타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너무 얇아서 의아해하며 서점 바닥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린 후 다른 책을 사가지고 나왔던 기억이 난다. 이 단편소설집이 나의 책장에 꽂힌 것은 수 년이 지난 후였으며 이후 몇 년 간격으로 사이사이 읽는 책이 되었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로 연이은 성공을 거두며 누구라도 부러워할만큼 작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며 안정적인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시기에, 오십이 넘은 대문호에게 찾아온 위기. 세속적 성공에도 허무하고 만족할 수 없었던 작가는 철학, 신학을 비롯해 학문에 몰입하지만 그 채울 수 없는 무언가의 답을 찾을 수 없었는데, 그가 답을 찾은 것은 노동으로 삶을 채워가는, 자신의 영지에서 일하는 농부였다고 한다. 그의 작품들을 곰곰 생각해보면 그가 삶에 대한 이러한 의문을 가진 것은 훨씬 전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이 노동을 신성하게 여기면서 신앙과 과학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에는 신앙과 노동의 연대에서 깨달음을 얻는 모습은 그의 단편들과 일치한다.  

톨스토이가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바는 사랑과 연민, 그리고 연대다. 물질적 탐욕을 경계하고, 이웃에 대한 조건없는 베풂과 이방인에 대한 관대한 포용, 그리고 악에 악으로 맞서는 것이 아닌 무저항으로써 저항하라고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연민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 돌봄이 실천되어야함을 강조한다.  

유복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쾌락주의자였으나 나중에는 결혼과 여성을 불신하면서 종교에 심취해 지극히 현실적이었던 아내와 불화가 있었고, 청빈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안락한 생활을 저버리지 못했던 모순적인 삶을 생각하면 사이사이 물음표를 찍게 되는 부분이 있지만, 오히려 이러한 여러 갈등으로 인해 삶과 죽음, 그리고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더욱 깊게 고민한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여러 평가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단편집들이 갖는 가치는 분명하다. 더 각박해져가는 무한 경쟁시대에 타인(이웃)에 대한 사랑과 용서가 원론적인 것에 그칠 수 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의식적으로 놓아서는 안되기 때문일 터다. 무엇보다 <바보 이반>을 통해 전달하는 무저항의 메세지는 나를 늘 딜레마에 빠트린다. '이반'은 나를 언제, 어디까지 시험에 들게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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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슈거 로알드 달 베스트 단편 3
로알드 달 지음, 허진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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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슈거의 놀라운 이야기]  
마흔한 살 미혼 헨리 슈거는 부자이고, 아내와 돈을 나누기 싫어 결혼도 하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그는 많은 돈으로 전 세계를 떠돌며 자동차와 장신구, 의복, 성형수술 등 외모를 가꾸는데 아낌없이 돈을 썼다. 헨리 슈거 유형의 부자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지금보다 더 큰 부자가 되고 싶다는 크나큰 욕망이다. 많은 돈에도 불구하고 은행 잔고에 두려움을 느끼고 주식과 채권을 사들이며 카지노에서 한탕을 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은 절대 하지 않으면서 지루함을 느낄때면 우스꽝스럽고 어이없는 게임으로 시간을 보낸다.   
 
어느날 아버지의 서재에서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어슬렁거리던 헨리는 얇은 연습장 한 권을 발견한다. 연습장에는 눈을 가리고 볼 수 있는 남자, 이므라트 칸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연습장에 기록되어 있는 이므라트 칸에 대한 내용을 읽은 헨리는 수련을 통해 카드 뒷면을 읽어낸다면 도박판에서 얼마나 놀라운 일들을 할 수 있을지 떠올린다. 헨리는 몇 년이 걸리더라도 해내고야 말겠다고 다짐하고 곧바로 수련에 집중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위해 그동안 해왔던 도박을 비롯해 각종 유흥을 그만 두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헨리는 드디어 카드를 뒤집어 놓은 채 앞면을 읽을 수 있게 된다. 헨리는 도박장에서 정확히 3천 파운드를 땄다. 그런데 이상하다. 헨리는 하나도 기쁘지가 않았다. 오히려 우울했고, 심지어 다음날 아침에 그 돈 뭉치를 보자 격렬한 혐오감이 치솟았다.   
 
헨리는 자신의 능력을 유용하게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주 유용하게, 그리고 놀라운 방법으로. 
 
 

■   ■   


 
로알드 달 베스트 단편선 세 번째 책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했던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에 담아냈다. <로제트 부인>에서는 전쟁 중에 착취당하는 여성들을, <탄생과 재앙>에서는 생명의 탄생은 축복받아 마땅한 일이고 아기의 건강은 어머니에게 있어 간절한 소망이지만, 태어난 아이가 희대의 전쟁 살인마가 된다면 축복이 재앙으로 변질되는 모순 등 전쟁의 우울함을 무겁지 않게 짚어낸다. 
 
그리고 <하숙집 주인>을 통한 박제된 인간성과 <동물과 대화하는 소년> <돼지>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지난친 육식과 동물 학대에 일침을 가하면서 생태계 공존을 이야기 한다. 또한 <책장수> <헨리 슈거의 놀라운 이야기>에서는 타락하고 부패한 성직자와 귀족 등 기득권층의 탐욕과 허세를 조롱한다.  
 
앞서 읽었던 두 권을 포함해 작가의 기상천외한 반전 결말과 촌철살인의 문장, 유쾌하면서도 거침없는 날센 비유로 독자는 시원한 통쾌함을 느낀다. 소외계층인 약자에게는 따뜻한 연민의 시선을, 착취와 허세를 일삼는 자들에게는 날카로운 비판을 선사하는 로알드 달의 작품들. 그 어떤 잠언서에도 뒤지지 않는 깊은 깨달음을 전하고 있다. 너무나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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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용도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마크 마리 지음 / 1984Books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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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 사진을 찍어 글을 쓰는 취미가 있었더랬다. 거창하게 글을 썼다고 하기에는 민망한 수준으로 일기나 사진을 찍으면서 떠올랐던 단상들 혹은 요즘 표현대로 어느 순간을 스샷하는 의미였던 것 같다. 지금도 창고 어느 구석에 박혀있는 공책에 붙어있는 즉석 사진은 색이 바래 알아보기 힘들고 썼던 문장들도 그 나이가 아니면 쓰지 못했을, 미화된 철부지의 허영투성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공책을 꺼내놓으니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  


아니 에르노는 책에 실린 사진을 찍을 당시 유방암 투병 중이었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온몸으로 겪고 있었다. 살기를 선택한 몸은 치료라는 명분으로 이루어진 온갖 폭력적 행위를 감수해야 했다. 한쪽 가슴은 종양으로 부풀어 오르고, 항암제 치료는 머리털을 한 움쿰씩 빠지게 하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을 안긴다. 작가는 사진을 찍어 자신과 연인의 몸, 그리고 그 프레임 안의 순간을 미화도 과장도 없이 있는 그대로 글로 옮긴다. 사물만 존재하는 사진 속에서 우리는 그 사물의 주인을 짐작한다. 그들의 신발, 속옷, 침대, 이불, 그리고 방의 환경. 그것이 인물의 표정보다 더 사실적이고 진솔하게 다가온다. 


그녀의 고통을 지켜보는 연인의 시선. 그녀가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에서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어떤 미래를 약속하지 않은 채 '지금'을 붙잡을 뿐이다. 



책을 읽다보면 어떻게 자신을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내보일 수 있는지 궁금하다. 두렵지 않을까? 그녀도 가끔은 두렵다고 고백한다. 심지어 글로써 자신의 공간을 내놓는 일은 폭력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왜 작가의 글들은 모두 자신을 향해 있을까? 그녀의 모든 글을 삶으로부터 왔다. 작가의 작품에 스포일러가 있다면 그것은 그녀의 삶일 것이다. 


사진, 박제된 시간이라고 해야 하나. 프레임 안에 갇힌 시간에게 감정은 없다.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고통도 느낄 수 없는 사진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사진은 기억에서 사라진 과거의 실재를 확인시켜준다. 그리고 사진에 글을 부여하면 감정의 실체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작가가 시간에 매료되었다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어느 때부터인지 내가 프레임 안에서 우선해지는 것은 공간이 아닌 시간이다. 그것과 그들이 존재했던, 한때의 삶을 확인시켜주는 시간의 존재, 그래서 이제, 피사체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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