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파울라 모더존베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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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게 3K(교회, 아이, 요리), '여성다움'을 강요하던 시대에 정체성에 갈등하던 파울라. 거기다 화가인 남편까지 자신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마침내 "나는 나입니다"라는 선언으로 사회적 통념과 관슴에 저항한 파울라는 관습적인 결혼생활을 파기하며 개성과 자아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림이 팔리지 않아 돈이 없는 화가에게 자유도 없었다. 서른두 살에 아이를 낳고 산후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파울라. 저자는 파울라가 "진정한 여자가 되기 위해"아이를 가졌다고 썼는데, 파울라가 이런 생각을 하계 된 계기가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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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스물여섯 살에 그린 자화성 / (아래) 서른한 살에 그린 자화상 <동백나무 가지를 든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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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섯 살에 그린 자화상과 서른한 살에 그린 자화상의 모습에서 보이는 차이는 놀랍다. 지병도 없는 파울라가 불과 5년의 간격을 두고 자신을 이렇게 다르게 그리다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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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축을 치는 늙은 어머니와 함께 살던 미혼 여자 농노의 사생아로 태어난 마슬로바는 세 살 때 어머니가 죽고 손녀를 힘에 부쳐하는 할머니에 의해 지주 자매에게 보내졌다. 엄격한 언니 마리야와 다정한 동생 소피아의 영향을 받아 반은 양녀로, 반은 하녀로 성장한 마슬로바가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지주 자매의 조카인 부유한 공작인 드미뜨리 이마노비치 네흘류도프가 입대하기 전 사흘간 머물던 중 그녀를 유혹하고 임신시킨 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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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주 자매의 집을 나온 마슬로바의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으로 보내져 죽었고, 지주의 집에서 귀족 생활에 익숙해진 소녀는 어느 곳, 어느 일자리에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전전한다. 세상물정에 어두운 마슬로바는 직업 소개소에서 우연히 만난 귀부인에 위해 졸지에 매춘부로 취급되고 만다. 그러나 마슬로바 스스로 하녀나 세탁부 등 힘든 육체 노동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술맛을 알아버린 그녀는 처녀들을 사창가로 넘기는 뚜쟁이의 꾐을 버텨내지 못했다. 그리고 매춘부가 되는 것이 그동안 자신을 농락했던 남자들에게 복수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마슬로바는 국가가 인정해주는 공식적인 매춘부의 길로 들어섰다. 마슬로바가 매춘 생활 7년째 접어든 스물여섯 살 되는 해에 돌발적인 사건에 휘말리고 6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법정에 불려 나가게 되었다. 
 
 
육체적 노동을 기피해 쉽고 편하기만 한 길을 선택한 철딱서니 없는 마슬로바를 칭찬할 수는 없지만, 하녀로 들어간 집마다 남자들의 강간 위험에서 한번도 자유롭지 못했던 상황을 짚어보면 마슬로바만 탓할 수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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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에드바르 뭉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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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질투와 불안이 내면을 복잡하게 지배했던 뭉크는 1908년 자발적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피폐했다. 뭉크의 대표작이 입원 전에 그려져 입원 이후 그의 천재성이 사라졌다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입원할 만큼 고통스러웠던 그는 예술 이전에 삶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퇴원 후 노르웨이로 돌아간 뭉크는 불안을 다스리며 은둔자처럼 오로지 그림에만 몰두했다. 그러나 1940년 나치가 노르웨이를 침공해 정부를 장악했을 때 히틀러에 의해 퇴폐미술로 낙인찍힌 76세 뭉크는 작품이 몰수될까봐 두려워했다. <대구 머리와 함께 있는 자화상>은 죽음을 대하는 그의 심정이 잘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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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질투, 외로움, 고통 등 부정적 감정을 회피하지 않고 대면함으로써 극복한 믕쿠는 인간 개인의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한 화가라는 생각이 새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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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미하일 브루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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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 혼란의 시대와 물질만능주의에 저항하는 예술가들에 의해 등장한 탐미주의는 기성 세대의 관념에 대한 반격이기도 했다. 
 


문화계를 점령한 팜파탈을 이어 아름다운 악마, 옴파탈이 등장했다. 
 
 

나에게 낯선 화가 미하일 브루벨. 그는 젊은 시절부터 니체를 탐독했고 음악, 문학 등 종합예술을 구현한 화가다. 20세기 초반 사상적 대립과 사회적 갈등, 아이를 잃은 개인적 고통으로 시대의 악을 구현하지만, 정작 브루벨은 '희망'을 갈구했다. 책에 실린 그의 그림을 보면 아내를 만나 잠시 희망에 겨웠던 그림과 그 외 시기 그림의 색을 비교해 보면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화가는 그림으로 자신을 말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절망이 지배했던 브루벨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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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알폰스 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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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이후 소비가 대중화되고 필요의 경제에서 욕망의 경제로 이행되면서 사랑조차 경제 능력이 좌우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는 성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광고용 그림 제작으로 명성을 얻은 알폰스 무하. 그의 그림이 전 세계를 매혹한 이유는 동유럽 체코 출신의 예술가로서 독특한 예술세계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먹고 살기 위해 상업성을 선택한 예술가를 비난할 수 없다. 다만 재능과 시대 상황이 맞물려 본의 아니게 조국의 지배국의 영광을 높이는 데 쓰여진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쉰 살(1910년)의 나이에 고향 체코로 돌아가 18년간 '슬라브 서사시' 연작에 몰두하면서 억압받는 슬라브 민족의 쳔 년의 역사를 담은 무하는 지배-피지배가 존재한지 않는 조화로운 공존의 메시지를 전했다. 
 


인류의 모든 사건은 양면을 지닌다고 했던가.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가난하고 절망에 허덕이던 체코는 신생 공화국으로 탄생했고, 무하는 1928년 완성한 <슬라브 서사시>를 국가에 기능해서 국민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프리메이슨이었던 무하는 곧바로 체포되어 일흔아홉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알폰스 무하 편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상업 예술가로 이름을 유명해진 그가 민족주의자이자 코스모폴리타니스트의 길을 걸었던 그의 인생을 접하면서 우리나라의 많은 문학가들과 예술가들이 떠올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무하와 반대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 작품과 인생을 별개로 놓아야 한다는 주장은 적절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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