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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흐르는 곳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8월
평점 :
스티븐 킹 소설집이다. 호러적 느낌이 강한 <해리건 씨의 전화기>와 <쥐>를 비롯해 한 남자의 서른아홉 해 일생을 거꾸로 짚어가는 <척의 일생>, 장편 '아웃사이더'의 후속작인 <피가 흐르는 곳에> 등 독특하면서도 각기 다른 네 편의 중편소설이 실려있다.

[해리건 씨의 전화기]
은퇴 후 도시 생활과 단절하고 싶어 시골로 내려온 부유한 노신사와 한 소년의 우정이 섬뜩하면서도 따뜻하게 그려진다. 1년에 딱 네 번, 예의를 갖춰 직접 쓴 카드를 소년에게 보내는 해리건 씨로 인해 존중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크레이그스터. 작가는 이 두 사람의 대화와 이후 상황을 통해 과도한 소통과 고독할 권리를 침해당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어느 누군가에게 미칠 영향은 생각지도 못한 채 넘쳐나는 메세지들과 아무리 무음으로 설정해도 원하지 않는 소식까지 전달하며 울려대는 알람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적당한 심리적, 물리적 거리두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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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의 일생]
대규모 지진으로 도시는 폐허가 됐고, 이로인해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물가는 급등했다. 도로 한가운데 싱크홀이 생기는가 하면, 플로리다는 늪지로 변하고, 세계 주요 식품 생산지가 사라지면서 각 대륙은 기근에 시달리고 벌이 멸종됐으며 자살자가 속출한다. 지구의 자전 속도까지 느려지면서 인류의 앞날은 예측하기 어려워졌다. 그.런.데! 이 와중에 여기저기에서 시도때도 없이 등장하는 척 크란츠라는 사람의 은퇴 기념 축하 광고가 등장한다. 도대체 척 크란츠는 누구인가?
연극처럼 3막으로 구성된 이 소설은 서른아홉 살의 척 크란츠라는 남자의 생애를 거꾸로 짚어간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척은 앞날을 예견하는 다락방에서 한 남자가 침대에 누워 죽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과연 이 사람은 누구일까?
스티븐 킹은 소설 전반부에 환경 오염과 탄소 배출에 의한 지구 온난화와 그로인해 벌어지는 기후변화를 꼬집으면서 지구의 자전 속도가 느려지는 것이, 자연이 인간에게 내리는 재앙임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주인공 척 크란츠는 어떤 특정 인물이라기 보다는 인류를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근면성실하게 일하는 보통의 사람들은 정작 하고 싶은 것을, 현재를 억누르며 살아온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은 언제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순위에서 밀려나고 꽤 오랜 세월이 지나면 내가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잊게 된다. 척의 삶에 이입되는 이유는 마치 거울을 보는 듯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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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대가로 지불하며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설정의 [쥐]는 인간의 욕망과 죄책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실린 작품 중 분량이 가장 적은 이 소설은 인간의 다양한 본능을 압축적으로 담아냈다. 폭풍우에 다친 쥐를 집안으로 들인 후 삽으로 때려죽일 작정을 했던 드류는 헐떡거리는 쥐의 모습에 연민을 느낀다. 여기까지만 보면 드류는 무척 동정심이 많은 따뜻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데 쥐의 위험하면서도 달콤한 제안에 대해서는 고민도 없이 수락하고, 그 대가가 실행된 시점에서 드류가 보인 죄책감은 참으로 엉뚱하기 그지없다. 우리의 인생에는 크고 작은 쥐들이 득실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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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흐르는 곳에]
읽기 전 <아웃사이더>의 후속작이라는 소개에 살짝 걱정을 했다. 그 작품을 읽지 않았기에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싶어 찾아봤더니 총 800여쪽에 달하는 분량이라 일단 포기하고 읽기로 했다. 다행히 읽다보니 주인강 홀리 기브니가 어떤 인물인지 어느 정도 파악이 됐고, 전작이 어떤지 짐작할 수 있었다(그래도 '아웃사이더'를 읽어봐야겠다).
미스터리 소설에 오컬트적 요소가 곁들여진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이방인(홀리가 지칭하는 명칭)'은 인간의 슬픔, 비통, 죽음, 충격 등 고통스러운 감정을 흡수하며 연명하는 존재다. 이는 매체에서 긍정적인 뉴스보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사건을 배달함으로써 몸집을 키우는 언론 매체와 이러한 기사에 부응하며 열을 올리는 대중들의 모습에 닿아있다.
소설에서 '이방인'의 존재를 알아본 이가 한 명 더 있다. 아흔 살이 넘은 댄 벨은 퇴직하기 전까지 경찰서에서 범인 몽타주를 그리던 사람이었기에 얼굴이 조금씩 변해도 전체적인 틀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홀리는 이 존재를 어떻게 알아봤을까? 전작을 읽어봐야겠지만, 오로지 이 소설만 놓고 보자면 홀리는 공황장애와 대인기피증과 거식증을 앓았던 것으로 보이고, 엄마에게 늘 주눅들어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지 못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래서 '이방인'의 가장 손쉬운 먹잇감이 될 수 있는 대상이었지만, 그녀의 주변에는 어두움을 밝혀주는 이들이 존재한다.
회색으로 뒤덮인 새로 상징되는 악惡, 혹은 '이방인'은 차별, 억압, 폭력 등을 슬며시 부채질하면서 우리의 주변을 부유하며 그 틈을 노리고 있다. '이방인'을 붙잡아 둘 수 있는 것도, 회색으로 뒤덮인 새가 활개를 치게 하는 것도 결국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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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편 모두 온기와 냉기를 오락가락하는 작품이었다.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작품 속 주인공들은 우리가 갖고 있는 단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불편한 마음이 들 수 있겠으나 그들을 붙들고 있는 온기 또한 우리에게도 존재하기에,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생각이다. 피가 흐르는 곳이 아닌, 연민이 있는 곳에 특종이 있기를 바람한다.
♤ 출판사 지원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