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자리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주현 옮김 / 1984Books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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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보뱅의 신작을 만날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많이 안타까웠는데, 그의 글을 만날 수 있다니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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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박한 공기 속으로
존 크라카우어 지음, 김훈 옮김 / 민음인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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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 존 크라카우어가 직접 경험하고 쓴 논픽션이다. 저자는 산악잡지 『아웃사이드』의 기자로서 1996년 5월에 있을 에베레스트 등반을 취재하기 위해 로브 홀이 이끄는 등반팀에 합류한다. 젊은 시절 산악인이었던 그는 언론인의 입장이 아닌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산악인으로서의 자세로 설레는 마음을 담아 에베레스트에 발을 내딛지만, 예상치 못했던 폭설로 인해 그날 에베레스트에 올랐던 사람들 중 열두 명이 사망한다. 사고가 있던 당일, 거의 같은 시간 대에 전부 서른세 명이 에베레스트 정상을 향했다.  


열두 명의 죽음 뒤에는 여러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엉켜 있다. 가장 큰 원인이야 당연히 기상 악화다. 그러나 등반대들 간의 약속된 규칙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안전을 위해 암묵적으로 지켜져왔던 원칙 등을 어기는 이들, 그리고 별것 아닌 듯 보이는 아주 사소한 실수와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 등이 얽히고설켜 큰 피해를 불러왔다.   






 
이 책은 1996년 5월 10일부터 11일 사이에 일어났던 참극의 현장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는다. 1990년대 전반에 이르는 에베레스트 등반의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하고, 에베레스트 등반이 상업화가 된 배경과 그로인해 달라진 여러 부분들을 이야기한다. 특히 복간되면서 추가된 후기에서는 사고의 전말에 대한 책임 소재와 쟁점, 그에 따른 논쟁된 부분들이 쓰여 있다.  


1996년 5월에 에베레스트에 오르기 위해 3월부터 준비에 들어간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보통의 생활인들이다. 의사, 우체국 직원, 목수, 기업체 간부, 출판업자, 교사 등 평범한 사람들. 그들은 육체적 한계에 직면하고 스스로를 던져야만한다. 8천미터가 넘는 산봉우리에 닿기 위해 혹독한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그곳으로 향하게 만드는 매력은 무엇일까.  


「이 세상에는 도저히 이를 수 없는 것에 특별한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대체로 전문가들이 아니다. 그들의 야망과 환상은 좀 더 신중한 사람들이 가짐직한 회의를 쓸어내 버릴 만큼 강력하다. 결단력과 믿음이야말로 그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다. 이 세상에서 그런 사람들은 잘하면 괴짜 정도로 취급받으나 잘못하면 미친놈 취급을 받는다....... . 에베레스트는 그런 사람들의 일부를 유혹했다. 그들의 등반 경력은 전혀 없는 경우에서 약간 있는 정도까지의 편차를 보였다. 그중에서 에베레스트 등반을 할 만하다고 인정할 수 있을 정도의 경험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 모두가 공통으로 가진 게 세 가지가 있었으니 스스로에 대한 믿음, 위대한 결단력, 인내심이 바로 그것이었다. (월트 언스워스, 『에베레스트』 / p138)」 


ㅡ 


4장부터 본격적인 본문이 시작되고 11장부터 절정으로 향한다고 볼 수 있겠다. 사고 경위는 물론이고 8천 미터 이상의 높이에서 경험하는 자연의 순수와 아름다움에 더해진 경외심, 그리고 그 안에서 찾아오는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의도치 않은 고독은, 읽는 독자까지도 새삼 인간이 지구에 존재하는 하나의 생명체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한다.    


에베레스트에서의 딜레마는 성공하기 위해서 자신을 혹독하게 밀어부쳐야하는 적절한 선이 어디냐는 것이다. 특히 8천미터를 훌쩍 넘어 정상을 눈앞에 두고 있으면 이 딜레마는 더욱 극심해진다. 고통을 극복하지 않으면 정상에 오를 수 없고, 지나치게 밀어부치면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인간은 종종 성공이라는 욕망에 무릎을 꿇는다.


그야말로 순간의 선택으로 생사가 갈라진 사람들.
이안 우달 팀이 출발 일정 약속을 지켰다면, 예정대로 선발대가 고정 밧줄을 설치했다면, 벡이 존 크라카우어를 따라 사우스 콜로 내려왔다면, 두 시간 가까이 지연된 등반 일정에서 예정된 하산 시간을 지켜더라면, 저산소증에 걸린 해리스가 잘못된 정보만 전달하지 않았다면, 이안 우달이 무전기를 빌려주었다면, 일본인 팀이 정상 정복에 눈이 어두워 조난자를 외면하지 않았더라면... 이 외에도 저자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의 무의식 중에 행한 행위들만 없었다면 사망자 중 한 사람이라도 살릴 수 있었을까. 이러한 후회와 자조는 아마 그날 살아 돌아온 사람들의 자책이 됐을 것이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목적은 저마다 다르다. 에베레스트 등정이 동경인 사람도 있고, 부를 과시하기 위한 사람도 있다. 에베레스트가 곧 생계인 사람도 있으며, 출세의 수단인 사람도 있다. 무엇이 됐든 로브 홀의 말처럼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서 돌아오는 것. 
 
ㅡ 
 
7대륙 최고봉이라고 하는 모든 대륙의 최고봉 중 하나인 에베레스트의 해발 고도는 8,840미터다. 우리나라 한라산과 지리산이 2천 미터를 넘지 않는다. 약 4배에 가까운 높이다. 8천미터는 가히 상상하기 어려운 높이다.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히말라야 등반을 꿈꾼다(물론 나는 아니다. 나는 한라산에 만족한다). "Because it is there." 라고 말한 조지 리-맬러리의 대답이 멋지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살아 있음'에 대한 확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숨쉬고 살아 있다는 확인, 장구한 역사 안에서 나는 미미한 존재라는 데에서 오는 겸허함. 이것이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이유가 아닐까싶다.




※ 도서지원

전문전인 등반 기술은 에베레스트에서는 별 의미가 없었으며, 내가 고산 지대에서 보낸 시간은 우리 등반대에 소속된 대부분의 다른 고객보다도 훨씬 더 적었다. 사실상 에베레스트의 발치에 불과한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이미 이제까지 등반한 그 어느 산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운 셈이었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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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제도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20
다와다 요코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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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에 해당하는 『별에 어른거리는』은 Hiruko의 모국을 찾아 배를 타고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하는 데에서 끝난다. 


배를 타고 여행을 떠난 그들은 독일 발트해 뤼겐 섬을 첫 경유지로 시작해 폴란드 그단스크, 라트비아 리가, 에스토니아 탈린,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입국 비자가 없어서 상륙 하지 못한다)에서 마친다. 그 여정에서 배에 승선한 여러 사람들과 그들이 경유했던 곳에서 만난 이들과의 대화는 자못 흥미롭다. 거기에 구글 지도를 띄어놓고 그들을 따라가는 재미도 꽤 쏠쏠하다.  
  






 
이 소설은 그동안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해 왔던 '세계화' 혹은 '글로벌'이라는 용어가 실질적으로 어떻게 구현되어야하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국가, 언어, 민족,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그들의 대화에서 꾸준히 언급되고, 이는 곧 정체성의 실체와 언어적 디아스포라, 그리고 21세기형 제국주의와 대륙 간 차별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소설의 설정 상 사라진 모국이 부정당하자 현재의 '나'라는 존재를 부정하는 것으로 느끼는 Hiruko. 해체된 과거 소비에트 연방국에 망명처럼 잔재하는 소련이라는 그림자. 존재감이 미미한 극지방 청년의 무너진 자존감. 자신들이 내리는 정의가 곧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주류 유럽인. '미래는 안갯속에 가려 안 보이는 불안정한 시기에 목적도 확실하지 않은 여행을 하고 있다'는 나누크의 말에서 독자는 기실 대다수의 세계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배에서 한 식탁에 앉은 그들의 대화에는 덴마크어, 독일어, 영어, 판스카어가 혼재해 있다. 그럼에도 의사소통에는 크게 문제가 없다. 그리고 러시아인 페트로비치의 아내는 독일인이다. 형은 탈린에 산다. 그는 러시아인임에도 불구하고 독일인 아내의 발음에 익숙해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장트페테르스부르크라고 발음한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맥락의 설정들은 우리가 그토록 집착하는 국가와 민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는 시간을 제공한다. 전쟁, 환경오염, 산업폐기물 및 쓰레기 유입 등으로 달라져버린 지구의 지형과 기후 변화는 어느 한 나라한테 책임을 지울 수도, 그래서도 안 되는 우리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 할 총체적 문제다. 시간이 흐를수록 각 국가가 연대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의 비율이 훨씬 커질 것이다.  


자기 자신이 집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Hiruko, 그리고 답을 찾아 떠난 여행이었지만 정작 질문이 분명하지 않았음을 깨닫는 그들에게서 이 책을 읽는 독자 역시 스스로 가져야할 정체성의 정체와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가 무엇인지를 되짚어보면 좋겠다.




도서지원

나는 이자나미가 아니야. 여자 샘플도 아니야. 나는 Hiruko. 지상에는 다양한 신체가 살고 있어. 인간만 보고 살면 그걸 잊어버려. 다양한 신체를 떠올리며 살고 싶어. 사지, 매, 뇌조, 사슴, 거위, 물고기, 불가사리, 아메바. -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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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아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9
이디스 올리비어 지음, 김지현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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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깊은 외로움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유년 시절 자신이 만들어냈던 상상 속 친구인 클러리사를 떠올리는 서른두 살 애거사.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클러리사는 어느새 너무나 생생한 형체와 소리를 띠고 애거사의 곁에 존재하게 된다.  



클러리사는 애거사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욕망을 투영한 존재로 읽힌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관습의 틀에 얽매이지 않으며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식탐을 서슴없이 드러낸다. 옷을 고를 때에도 자신만의 취향이 뚜렷하고 확실하다. 어떤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보다는 자기 자신 역할을 하는 것을 즐긴다. 또한 클러리사는 애거사가 유년시절 성취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뤄낸다. 그렇다면 애거사는 어떤 사람인가?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감정 상태가 어떤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할뿐 아니라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어린시절에는 열등감을 느꼈고, 서른두 해를 살아오는 동안 본인의 의지없이 맡겨진 일을 수동적으로 무미건조하게 수행하고,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하면 안 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정해진 틀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여기며 살아간다. 






 
애거사는 십수 년 만에 클러리사가 다시 나타난 후 그녀의 존재가 점점 커지자 오히려 그녀를 피하고 숨어다니다가 급기야 집을 떠나기에 이른다. 이는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한편으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애거사의 혼란스러움을 짐작할 수 있다. 한평생 담장 안에 살았던 애거사가 비로소 자유로운 기분을 느낀 때는 브라이턴에서다. 자신을 아는 사람이 없고, 어떤 속박도 없는 환경. 상상 속 세상에서만 삶의 희열과 행복을 느끼는 애거사. 그안에는 애거사 본인이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만 존재한다. 이와 같은 맥락은 소설 전반에 걸쳐 서술되는데, 결과적으로 주변 사람들(사회적 관습)과 스스로 만든 성 안으로 칩거하는 애거사의 모습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길게 서술한 내용은 아니지만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브라이턴 해변에서 모래놀이를 할 줄 모르는 클러리사는 외로웠던 애거사 본인의 유년시절의 모습을 대변하고, 점점 더 건강한 모습으로 변화하는 클러리사는 애거사의 바람이 담긴 모습일 것이다. 그럼에도 애거사는, 클러리사라는 '틀'을 넘어서지 못하고 동시에 클러리사가 '애거사'라는 울타리를 넘어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ㅡ 


소설을 읽다보면 의아해지는 지점이 있는데, 애거사의 상상 속에서나 존재했던 클러리사가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실체로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열한 살 소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성장하게 되고 열일곱 살에 이르자 어린아이가 아닌 자주적 자아로서 애거사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애거사가 두 사람의 관계를 이끌어 왔는데, 언제부턴가 클러리사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자 한다. 즉 어린 소녀는 이제 더 이상 아이가 아닌 주체적인 존재로서 애거사가 창조한 인공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일상을 살아가는 현실의 세계로 나아가려고 한다. 하지만 애거사는 클러리사와의 결합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들만의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클러리사가 이끄는대로 따라야한다고 믿는다. 이런 측면에서도 애거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가 그녀의 집착과 통제에서 뛰쳐나가는 순간 소멸해버린 후 다시 열한살 소녀가 되어 돌아온 클러리사는, 소설 속에서는 애거사 본인이자 더 넓은 관점에서는 당시 여성들을 대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삶 자체가 외롭고 쓸쓸한 사람이 있을까, 그녀는 서른 해가 넘도록 어떤 마음으로 살아온 것일까, 라는 생각에 애거사가 안쓰러웠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다다른 것은 지금 세태와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는 것. 사람을 만나고 대화에 부담을 느껴 대부분의 소통을 스마트폰 문자나 SNS로 대신하는 요즘 사람들. 부자지상주의와 정상성을 들어 실패와 일탈을 두려워하며 실패를 하느니 차라리 포기를 하겠다는 사회적 분위기. 도전은 무모하고 안주가 현명함으로 인정되는 세태. 깊게 들어가면 대부분의 인간은 자유롭지 않으며, 책 밖의 우리와 애거사의 모습은 다르지 않더라는. 내 안의 클러리사에게 자유를 주는 순간, 우리 자신도 조금은 자유러워질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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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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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단편 소설 여덟 작품이 실린 소설집이다.
실린 소설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적인 키워드는 생존, 소통, 상실, 존재의 의미. 
 
각각의 소설들은 외롭고 비통하다. 「영생불사 연구소」처럼 유머 속에서 고달픈 삶의 애환을 보여주기도 하고, 「그녀를 만나다」에서 120살 여성을 통해 열악한 노동 환경과 폭력적인 세태에 유쾌하게 일침을 가하지만, 대체로(사실 앞서 언급한 두 작품 역시) 상실의 고통을 담고 있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지속될 영생불사의 꿈, 그리고 더하여 생의 길이만큼 늘어날 먹고 사는 일에 대한 서글픔. 


간절하게 비생물 지성체와 상호소통하고 싶은 화자는 생각한다.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나는 왜 생존하려하는가. 그리고 우리가 여기에 더 생각해 볼 것은 314가 끊임없이 물어보는 유토피아 지수에 '나'만이 아닌 '너'도 포함되어 있는가. 기계의 사유는 갈수록 일방적으로 흐르는 우리의 모습에 경종을 울린다.
 
태어나고 성장하고 노화하고 사망하는, 인간이라면 누구가 거치는 과정인 한 생애. 이를 모르는 이는 없지만 우리는 질병과 노화가 두렵고, 죽음은 더 두렵기 마련이다. 제 집에서 죽을 자유조차 박탈 당하는 노화와 질병. 「One More Kiss, Dear」는 이 책의 처음에 실린 「영생불사 연구소」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외롭고 고달픈 영생을 살 것인가, 유한한 삶을 살 것인가. 그리고 우리 사회는 노화를 어떤 시선을 바라보아야 할까.


극으로 치닫는 양극화 현상, 차별과 혐오가 부른 죽음을 이야기하는 120살 할머니의 삶은 투쟁, 그 자체다. 특히 이 소설은 변희수 하사를 애도하며 그녀가 바랐던 세상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뭉클해진다. 


가정폭력의 참혹한 결과. 가정 파탄이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 이래도 가정폭력이 그저 '가정사'일뿐인가.
 
자본주의 시스템에 의해 많은 식물들이 단일화 되어가거나 유전자 조작 재배종으로 대체되어가는 것에 대한 일침. 더하여 유전자 조작에 의한 단일종으로 구성된 집단이 식물을 넘어서 인간에게도 적용될 섬뜩한 미래 사회. 동물의 장기를 대체하는 연구가 계속되고 있고, 유전자 복제는 물론이며 우열 유전자를 가려낸 임신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인간은 어떤 방향으로 진화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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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가장 비극적인 작품은 「여행의 끝」이다. 전염병으로 유일한 친구를 해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병病'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설정이 지나치게 극단적일 수 있겠으나 지금의 세태를 떠올려보면 생명체가 생명체를 함부로 죽이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에 이른 현 세태는 그야말로 '병'에 걸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마지막 소설에서 작가가 희망을 배치한 이유는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그 자체로서 희망이 될 수 있기를.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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