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아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9
이디스 올리비어 지음, 김지현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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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깊은 외로움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유년 시절 자신이 만들어냈던 상상 속 친구인 클러리사를 떠올리는 서른두 살 애거사.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클러리사는 어느새 너무나 생생한 형체와 소리를 띠고 애거사의 곁에 존재하게 된다.  



클러리사는 애거사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욕망을 투영한 존재로 읽힌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관습의 틀에 얽매이지 않으며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식탐을 서슴없이 드러낸다. 옷을 고를 때에도 자신만의 취향이 뚜렷하고 확실하다. 어떤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보다는 자기 자신 역할을 하는 것을 즐긴다. 또한 클러리사는 애거사가 유년시절 성취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뤄낸다. 그렇다면 애거사는 어떤 사람인가?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감정 상태가 어떤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할뿐 아니라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어린시절에는 열등감을 느꼈고, 서른두 해를 살아오는 동안 본인의 의지없이 맡겨진 일을 수동적으로 무미건조하게 수행하고,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하면 안 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정해진 틀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여기며 살아간다. 






 
애거사는 십수 년 만에 클러리사가 다시 나타난 후 그녀의 존재가 점점 커지자 오히려 그녀를 피하고 숨어다니다가 급기야 집을 떠나기에 이른다. 이는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한편으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애거사의 혼란스러움을 짐작할 수 있다. 한평생 담장 안에 살았던 애거사가 비로소 자유로운 기분을 느낀 때는 브라이턴에서다. 자신을 아는 사람이 없고, 어떤 속박도 없는 환경. 상상 속 세상에서만 삶의 희열과 행복을 느끼는 애거사. 그안에는 애거사 본인이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만 존재한다. 이와 같은 맥락은 소설 전반에 걸쳐 서술되는데, 결과적으로 주변 사람들(사회적 관습)과 스스로 만든 성 안으로 칩거하는 애거사의 모습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길게 서술한 내용은 아니지만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브라이턴 해변에서 모래놀이를 할 줄 모르는 클러리사는 외로웠던 애거사 본인의 유년시절의 모습을 대변하고, 점점 더 건강한 모습으로 변화하는 클러리사는 애거사의 바람이 담긴 모습일 것이다. 그럼에도 애거사는, 클러리사라는 '틀'을 넘어서지 못하고 동시에 클러리사가 '애거사'라는 울타리를 넘어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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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다보면 의아해지는 지점이 있는데, 애거사의 상상 속에서나 존재했던 클러리사가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실체로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열한 살 소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성장하게 되고 열일곱 살에 이르자 어린아이가 아닌 자주적 자아로서 애거사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애거사가 두 사람의 관계를 이끌어 왔는데, 언제부턴가 클러리사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자 한다. 즉 어린 소녀는 이제 더 이상 아이가 아닌 주체적인 존재로서 애거사가 창조한 인공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일상을 살아가는 현실의 세계로 나아가려고 한다. 하지만 애거사는 클러리사와의 결합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들만의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클러리사가 이끄는대로 따라야한다고 믿는다. 이런 측면에서도 애거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가 그녀의 집착과 통제에서 뛰쳐나가는 순간 소멸해버린 후 다시 열한살 소녀가 되어 돌아온 클러리사는, 소설 속에서는 애거사 본인이자 더 넓은 관점에서는 당시 여성들을 대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삶 자체가 외롭고 쓸쓸한 사람이 있을까, 그녀는 서른 해가 넘도록 어떤 마음으로 살아온 것일까, 라는 생각에 애거사가 안쓰러웠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다다른 것은 지금 세태와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는 것. 사람을 만나고 대화에 부담을 느껴 대부분의 소통을 스마트폰 문자나 SNS로 대신하는 요즘 사람들. 부자지상주의와 정상성을 들어 실패와 일탈을 두려워하며 실패를 하느니 차라리 포기를 하겠다는 사회적 분위기. 도전은 무모하고 안주가 현명함으로 인정되는 세태. 깊게 들어가면 대부분의 인간은 자유롭지 않으며, 책 밖의 우리와 애거사의 모습은 다르지 않더라는. 내 안의 클러리사에게 자유를 주는 순간, 우리 자신도 조금은 자유러워질 수 있으려나.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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