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수업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안온북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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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세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첫번째 이야기는 실존 인물인 음악가 마랭 마레의 일대기다. 다른 두 개의 글은 고대 그리스를 배경으로 둔 철학적 사색, 다른 하나는 중국에 전해내려오는 거문고 연주자인 백아의 전설을 각색한 내용이다. 이들 세 이야기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는 듯보이지만, 공통된 제재는 변성變聲과 허물벗기이다. 






 



화자는 예술가, 특히 작곡 분야에서 왜 남성의 수가 더 많은지를 사춘기에 찾아오는 변성과 관련지어 서술한다. 그는 신체적 변화의 허물벗기에 있어서 여성은 폐경(완경), 남성은 변성이라고 본다. 여성은 사춘기가 지나도 소프라노 음색과 음역을 잃지 않지만, 남성은 완전히 달라지는 목소리에 정체성까지 흔들린다. 남성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거세를 하거나 소리를 대신할 작곡가가 되거나 악기 연주자가 되는 것. 특히 작곡은 소리의 영역을 재구성한다. 유년의 욕망을 이루지 못하는 남성이 작곡을 통해 그 갈망을 채운다는 논리다(모짜르트를 생각하면 일견 납득이 된다). 저음에서 고음으로의 변환이 몸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오직 악기로서만 가능하다는 것. 그래서 변환의 이름은 음악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또한 화자는 문학에서 목소리를 발견한다. 그전에 음악의 고어古語는 언어라고 정의한다. 지저귐, 흘얼거림, 울음소리, 음성이 그것이다. 소리와 의마가 합쳐진 이야기의 발명은 인간의 시간에 의한 것이고, 멜로디의 발명은 인간의 업적이 아니며 이야기보다 앞선다. 그러나 이야기와 멜로디는 인간의 시간을 세상에 부여하는 힘을 가진다는 점에서 같은 결을 가진다. 


마랭 마레와 백아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비올라, 비파, 거문고 등 악기를 인간의 신체에 비유한다. 인간의 한 생애에서 오는 여러 변화와 굴곡, 이해와 감정, 위기와 극복 들을 음악(악기)과 변성에 빗대어 이야기한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백아의 스승 성련은 변성기(허물 벗기)를 한단계 성장하는 계기이자 과정이라고 여긴다. 따라서 비록 고통스럽더라도 순수하기만한 변성 이전의 시기에서 벗어나 인간의 많은 감정들을 음악에 실어야만 더 성장할 수 있다. 이는 음악가에 국한된 것은 아닐터다. 



일단 내용적인 측면을 떠나서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음독을 하게 되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나 홀로 낭독회'가 되어버리고마는, 아름다운 문장의 향연이다. 아름답기만해서는 매력이 없다. 몇 번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글들은 어려워서가 아니라 살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사유다. 


우리는 긴 음악을 들으면 너무 길다고, 지루하다고 불평을 한다. 그러나 '음악은 스스로 즐기고, 듣는 이에 의해 즐겨진다. 우리의 내면에서 주어진 시간에 아랑곳없이 영원히 노닐고 있다(p69)'. 인생이라고 이와 다르겠는가. 




※ 도서지원
 

9월의 빛이다. 그 빛 자체도 변해서 여름 막바지의 묵직하고 농익은 빛이다. 봄날의 메마르고 선명하고 생생하고 날이 선 빛이 아니다. 황금을 담뿍 품은 빛에 일종의 농후함이나 안개가 섞여 그 자체로 붉어진 혹은 흐려진 빛이다.(...) 그는 섬과 다리와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 시간 저 너머에서 늙지 않는 강물이 농후한 빛에 잠겨 영원한 상처처럼 흐른다. 하지만 아름다워서 거의 아문 듯이 보이는 상처. 그것은 인간의 시간을 앞설 뿐 아니라 이어나갈 신의 상처이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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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 담덕 10 - 태왕의 꿈, 완결
엄광용 지음 / 새움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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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덕의 마지막 이야기다. 2022년 7월에 시작한 대장정이 약 2년 반만에 마무리 됐다. 이는 독자의 입장이고, 작가는 20여년에 걸쳐 이 소설을 준비하고 자료를 조사하고 집필했으니 그 노고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책을 받아들고 마지막권이라고 생각하니 그저 읽기만했던 나조차도 1권부터 순서대로 머릿속을 스치며 감개무량한데, 이 책을 쓰고 만든 사람들의 감정은 어떨지 짐작이 가능하다.  


작가 후기에서도 언급하는 부분이지만, 이 소설은 허구적 상상에 기대기보다는 정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책을 읽다보면 정말 많은 문헌들과 사료들을 조사하고 참고했다는 것을 크게 느낄 수 있다. 실질적으로 광개토태왕에 대해 남아 있는 사료가 많지 않아 역사적 자료와 사이사이 구멍난 부분은 앞뒤 맥락을 짚어 인과관계가 성립가능하도록 추적 유추해야만 했을텐데, 사실 이 작업이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이 작품을 쓰고자 만주, 백두산, 실크로드 등 광개토태왕의 원정길을 추적하고, 대학원 사학과 박사 과정까지 수료한 작가의 열정에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고구려사를 배경으로 한다는 것은 동(북)아시아사 전반의 방대한 양을 다루어야한다는 의미이다. 더구나 당시 대륙의 중원과 북방 상황은 수많은 부족들이 먹고 먹히며 존멸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4,5세기 치열한 격동의 시대였고, 그 한가운데 가장 융성했던 고구려가 있었다.  


10권은 404년, 후연의 요동성 침입 직전의 시기부터 413년 담덕 붕어 후 태자 거련이 세운 광개토태왕릉비(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 온누리에 나라를 넓히고, 평화와 안락을 염원한 태왕) 제작까지 이어진다. 특히 마지막에 다루어지는 광개토왕릉비의 제작 과정도 흥미롭다.  


ㅡ 


현재 우리나라가 처한 시국 상황때문인지 아무래도 유독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변함없이 군주의 자질과 됨됨이, 그리고 잘못된 판단에 대한 태도다.  


담덕은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집을 부려 부여로 위령제를 지내러 갔다. 그 결과 담덕 본인도 목숨이 위태로워졌음은 물론 고구려의 기둥이 되어주었던 우적 장군을 잃었다(소설에서 이때 입은 부상은 이후 담덕의 발목을 계속 잡고 그의 죽음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후연에게 도발의 빌미를 주었으며, 그토록 공들여 세우고 아꼈던 7중목탑과 노승 석정도 잃었다. 담덕은 자신의 독선에 대해 깊은 후회와 반성을 거듭한다.


그렇다면 후연의 모용희는 어떤가? 
그에게 전쟁의 명분은 없다. 그저 자신의 화풀이에 불과하다. 특히 담덕과 고구려에 대한 증오가 가득하지만 정작 고구려를 공격할 엄두가 나지 않으니 꿩 대신 닭이라고 고구려와 군사동맹을 맺고 있는 거란으로 진격한다. 자신의 무용한 화풀이에 군사 1만 5천이 죽고, 국가적 위기는 한층 더 높아졌음에도 대안은 커녕 반성조차 없다. 백제의 젊은 전지왕이나 모용운, 풍발도 정도나 방식의 차이일뿐 애민 정신이 없기는 모용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나 이번 마지막 이야기는 담덕의 보다 인간적인 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사람인 이상 완벽할 수 없다. 자신의 실수와 자만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수정해나가는 과정이야말로 리더의 필수 덕목이다. 현재 전 세계가 대내.대외적으로 더없이 혼란스럽다(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리더가 어떤 인물이어야 하는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긴 시간 동안 『담덕』을 읽으면서 때때로 안타웠고, 때때로 가슴이 벅찼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이야기가 와닿았던 것은 인류의 잘못된 선택과 옳은 길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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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봄의 불확실성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민승남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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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자신이 직접 1인칭 화자로 등장하는 소설은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봉쇄 조치를 배경으로 두고 있다. 코로나19가 시작되기 직전 죽음을 맞은 친구의 장례식에 모인 다섯 명의 친구들과의 동창회, 그리고 봉쇄 이후 화자가 지인의 반려새 금강앵무(이름은 유레카)를 맡아 돌보면서 겪는 일들을 이야기하고 이를 통해 사회 현상을 짚어간다.  


유년 시절의 순전하고 의도치 않았던 악의. 노년과 질병, 죽음에 대한 단상. 동성애에 대한 고질적인 거부감. 여성의 성적 욕구와 갈망의 실현 및 여성의 외도와 정절. 점점 더 극단적이고 양분화되어가는 대립과 성 차별주의에 대한 고정관념, 그리고 무의식적이고 관습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성 인식.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들과의 친밀감. 동물 학대 및 그들과의 공존 방식. 지구온난화 부정론자들과 반反환경 운동가들의 생태계 파괴 조장. 팬데믹 시기에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회적 불평등, 더하여 막연한 두려움과 그에 따른 혐오 조장. 경제적 취약 계층의 고립. 이를 통해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타인의 안부에 귀 기울이지 않는 세태다.   






 



소설에는 '날개 자르기'에 대해 서술하는 부분이 있다. 책을 읽으면서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인데 여러 이유로 반려새의 날개를 정기적으로 다듬어 준다고 한다. 날개 자르기(혹은 날개 다듬기)를 통해 장거리 비행을 통제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 찬반논란이 있다. 새에게 물리적인 통증을 주지 않고 다시 자라며 새를 보호하는 측면이라는 주장과 활동 범위를 제약해 새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유발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반려새 주인들은 거의 다 날개 자르기를 한다고 한다. 찬반을 떠나서 반려새의 날개 자르기는 예시를 일일이 나열하지 않아도 팬데믹 시기의 우리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보호와 안전을 명분으로 봉쇄 조치까지 내려진 적지 않은 몇몇 나라의 도시들을 떠올려 볼 때 한동안 우리는 커다란 새장에서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에 대한 화자의 생각을 읽으면서 잠시 인간과 동물의 공존의 의미를 생각해보았다. 화자는 유레카(금강앵무)를 지켜보는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단지 지켜보기만 하는 것과 반려인의 취향에 맞게 훈련을 시키고 성과를 이루었을 때 보상을 해주는 것에서 오는 기쁨은 다른 문제다. 또한 반려 동물을 들이는 것만큼이나 방치하고 버리는 것도 쉽게 행한다. 그러면서 정작 도움을 필요로 하는 구조 동물 입양은 외면한다. 청년 베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신랄하게 꼬집는다. 화자와 그의 친구는 이를 두고 베치를 향해 맨스플레인, 에코 테러리스트, 인간 혐오자라고 비판하는데, 나는 오히려 인간 집단 내에서도 이와 비슷한 모습은 얼마든지 목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ㅡ  


1부는 소설, 2부는 에세이에 가깝다.
팬데믹 시기의 타인을 향한 무작위적인 경계심과 혐오는 우리 모두 경험한 바다. 그런데 특정 집단(이주민, 유색인, 무슬림 등)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지속되어 왔다. 2부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도저히 한 집에서 같이 살 수 없을 것 같았던 베치와 화자의 관계 변화다. '간헐적 폭발 장애'라는 진단을 받은 베치가 자기와 다른 생활 방식을 배척하지 않고, 아주 사소한 부분을 생색내지 않으며 화자를 배려한다.  


어디 '그해 봄'뿐일까. 우리네 삶이라는 게 늘 불확실성의 연속 아니던가. 타인을 향한 두려움과 의심이 커져서 세상이 위험해진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 위험해져서 두려움과 의심이 커진 것인지 종잡을 수 없지만, 항상 그래왔듯 우리는 해야할 일들을 함으로써, 선의롤 가기 위한 방법을 찾아감으로써 세상을 지켜나가게 될 것임을, 그래서 자신도 소설을 쓰고 있다고, 시그리드 누네즈는 이야기한다.    



시그리느 누네즈의 작품은 큰 틀 안에서 우리가 놓쳤던 사회적 현상이나 감정들을 세밀하게 짚어낸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공감하는 바가 크다. 담담하게 서술하는 이 소설이 와닿는 이유는 단지 팬데믹을 경험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코로나 종식을 선언한지 몇 년이 지난 지금에도 혐오와 갈등은 여전하고 해법이 아닌 국제 정세가 힘으로써 끌려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말을 빌려 누네즈가 글을 쓰는 이유를 말했듯, 함께 희망을 써야할 때다.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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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의 기쁨과 슬픔 - 인간이 꿈꾼 가장 완벽한 낙원에 대하여
올리비아 랭 지음, 허진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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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자 인류가 걸어왔고, 앞으로 걸어 가게 될 이야기다. 신자유주의, 권력과 착취, 배제와 차별과 혐오, 환경과 기후변화 등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사회문제들과 모순적인 사회 구조와 현상들을 작가 본인의 개인적 서사와 문학, 그리고 정원을 통해 탐구하고 공유한다.  


'paradise'의 어원은 기원전 2000년 페르시아에서 쓰던 아베스타어로 '담으로 둘러싸인 정원'을 의미하던 pairidaeza에서 파생된 말이라고 한다. 13세기에 들어서 파라다이스는 '탁월한 아름다움이나 기쁨, 또는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장소'라는 뜻이 되었다. (본문을 읽다가) 결국 정원이 기쁨과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장소라는 의미라고, 내 마음대로 해석해본다.  








이 책에는 밀턴의 『실락원』을 지속적으로 언급한다. 브렉시트와 극우가 득세하고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조롱거리로 전락하는 세상은 밀턴이  『실락원』을 쓰던 시대, 혹은 당시 밀턴이 처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올리비아 랭은 절망으로 치닫는 세상에서 아름다운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는 충동이 절박했고, 그래서 밀턴이 낙원을 꿈꾸었듯 정원을 만들고 싶었을 거라고 짐작한다. 이 글을 집필하던 시기가 아마도 2020년인 듯하다. 랭은 미국 대선 당시 조 바이든이 당선된 사실을 쓰면서 불안했던 4년이 끝났다며 안도했다. 그런데 한국에서 이 책이 출간된 2025년, 연일 보도되는 미국발 국제 뉴스를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랭은 땅과 인간과 식물은 뗄 수 있는 관계이고, 매일 잡초를 뽑고 죽은 초목을 잘라내며 땅을 솎아주는 행위가 주는 즐거움에 대해 서술한다. 하지만 이 행위에서 식민지 시대의 플랜테이션과 노예 시장을 떠올린다. 이러한 인권 유린으로 잔혹 행위와 고통 위에 세원진 정원은 묘지와 다를 바 없으며 너무 비싼 값을 치르고 만들어진, 애초에 만들어지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노동의 시공간이 다를뿐 노동 현장의 안전은 여전히 취약하다. 


올래비아 랭은 정원이 흑인보다는 백인이, 비숙련직이이나 임시직 혹은 실업자보다는 전문직이나 관리직 종사자가 정원에 접근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정원을 소유한다는 것은 사치이자 특권이고, 이러한 근거는 배제와 착취의 역사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음을 짚는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이유로 정원을 갈망하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건강하고 활기찬 결속과 아름다움, 진보를 통해 맺는 열매, 종을 뛰어 넘는 아름다움과 완전함이 존재하며 정체되지 않고 끊임없이 동력을 발휘하는, 종을 뛰어 넘는 생태계야말로 인류가 추구하는 정원이라고 말한다.   



죽음과 탄생과 결실이 반복적으로 재생 순환되는 공간, 정원. 죽음이 없으면 풍요로움 또한 없으며, 영원한 풍요로움이란 환상임을 알려주는 정원을 통해 인류사 역시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더 나아가 이와 같은 이치가 현재 직면한 기후변화와 영원한 생산성에 기반한 고성장이라는 환상과도 연관이 있다. 랭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인간이 원하는 세상 사이의 긴장이 기후 위기의 핵심이고, 정원은 어떻게 하면 이 관계가 새롭고 덜 해로운 방식을 존재할 수 있는지 실험하는 공간이 될 수 있음을, 즉 정원이 변화의 공간으로 구현되기를 바람한다. 



이 책에서 감정적으로 크게 공감하는 부분이 두 군데다.
먼저 정원 가꾸기에 대한 감상이다. 흙과 식물을 만지고 보듬는 행위가 주는 일상의 변화와 동기 부여, 특히 팬데믹 시기에 자연만큼은 변함없이 본래의 순리대로 흐른다는 사실은 나에게 큰 안도감을 주었다. 늦가을에 시작된 팬데믹으로 사회 현상은 급격히 달라졌지만 싹이 트고 꽃봉오리가 올라오고 하루가 다르게 초록으로 변해가는 자연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희망이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식물과의 관계다. 이 관계에 녹아드는 방법은 혼자 있는 것이라고 썼다. 텃밭이나 정원이 아니더라도, 작은 선인장 화분 하나만 데리고 있는 사람이라도 이 말에 공감할 것이다. 식물과 나는 일대일 관계다. 여러 화초를 키운다해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식물에 하나의 나로서 존재한다. 그래야만 충분한 몰입의 기회가 주어진다.  



이 책은 거시적이면서 상당히 미시적이다.
정원을 상상하면서 그 안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꽃과 풀들을 상상하게 되고, 각각의 큰 카테고리 내에 형성된 수많은 개개인을 떠올리게 한다. 랭은 마지막에 '모두의 정원이라는 그 이단적인 꿈'이라고 썼다. 그는 숱한 불의 속에서도 공존과 희망을 얘기하고 있다.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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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소년이 온다 + 작별하지 않는다 + 채식주의자(리마스터판) - 전3권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알라딘 이벤트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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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부를 보면 소설의 화자인 경하는 작가 자신을 데려온 것으로 보인다. 경하는 이미 5.18광주민주항쟁을 소재로 하는 작품('소년이 온다')을 쓴 뒤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고, <작별>이란 제목의 소설을 썼었다고 했다. 그런데 실제로 한강의 작품 중에 <작별>이라는 단편소설이 있고, 작중에 묘사한 내용과도 일치한다. 소설의 1부가 비유적 서술을 통해 제주 4.3사건에 접근한다면, 2부는 당시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그려낸다.


1부에서는 많은 부분이 상당히 의미있게 다가온다.

인선이 만들었던 세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 잘려나가 봉합한 손가락을 포기하고 싶어했으나 설령 포기한다고 해도 환지통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인선, 인선이 경하에게 자주 했던 말, "일단 나는 계속하고 있을 테니까" 등 예사롭게 넘어가지 많은 대사와 설정들이 책장을 넘길때마다 등장한다.


소설 중반부를 훌쩍 넘어 인선의 입을 통해 어머니의 기억과 증언을 소환해 내는 장면도 인상적이지만, 개인적으로 확 와닿았던 부분은 경하가 인적이 드문 인선의 집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폭설과 어둠으로 인해 죽을 고비를 넘기며 돌아가야 할지,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갈등하는 경하의 모습은 단지 잃어버린 길에 국한되지 않는다. 경하 본인의 삶은 말할 것도 없고, 제주4.3 사건의 자료와 증거를 찾아다니며 스스로 길을 만들어 가야 했던 인선의 어머니로 대변하는 피해자 유가족의 삶이 아니었을까.


가는 길을 헤매고 있는 경하는 새는 어떻게 됐을지, 오늘 안에 물을 줘야 살 수 있는데, 새들에게 오늘은 언제까진가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눈이 지금 서울에도 내리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는데, 즉 광주 및 제주에서 벌어진 사건을 다른 지역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말한다.



인선의 새 아마의 죽음은 제주민의 죽음과 억울한 죽음에 대한 해명조차 듣지 못했던 인선의 어머니를 비롯한 유가족의 안타까움과 고통을 상징한다. 경하가 죽은 새를 묻는 과정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또한 아마는 경하의 새가 아니고, 그녀는 가족은 물론 가까이 있는 이웃도 아닌 외지인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경하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은 새의 죽음으로 고통을 느낄 만큼 새를 사랑한 적도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부분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과연 제주 4.3사건이 시대성에 의해 어쩔 수 없는, 혹은 제주도에 한정된 사건이 아님을 대변한다.


아마를 묻고 난 후 이제 더 할일이 없다는 경하.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 그에 대한 답은 과거 인선과 경하가 함께 하기로 했던 두 사람의 프로젝트에 있지 않을까. 프로젝트의 이름은 '작별하지 않는다'.



마치 내림굿을 하듯 <소년이 온다> <흰> <작별하지 않는다>로 이어지는 소설은 여전히 역사로부터, 가해자로부터 사죄받지 못한 이들, 혹은 죽은 자를 대신에 살아왔던 이들에 대한 진혼곡이다. (중략) 전작이 그랬듯, 가장 약한 이들이 보여주는 용기와 인내가 나를 숙연하게 만든다.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를 공감하고 동시에 잊혀진 과거로 치부해버리지 않는 것에 대한 동의 여부는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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