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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밤
안드레 애치먼 지음, 백지민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평점 :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처음 만난 두 남녀. 크리스마스 트리 뒤에 숨어있다시피 있는 '나'에게 먼저 다가온 여자. "나 클라라예요."
소설은, 처음 만난 여성을 향한 끌림,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낯선 감정을 현실적으로 드러내는 게 맞는 건지, 그리고 혼자 있고 싶은 마음과 사랑 받고 싶은 마음이 뒤섞이며 갈등하는 첫 번째 밤부터 여덟 번의 밤에 걸친 그들의 심리를 섬세하고 예리하게 포착한다.
이 이야기는 이렇다하게 정리할 만한 줄거리는 없다고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애치먼의 소설이 늘 그랬듯 이 소설의 묘미는 두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황과 그에 따른 심리적 묘사가 현실의 우리 이야기처럼 아주 사실적이면서 아름답다는 데에 있다.

가장 인상적인 밤을 꼽자면 세 번째 밤과 다섯 번째 밤. 세 번째 밤이 두 사람의 사이의 감정이나 관계가 전환점을 맞는 밤이었다면 다섯 번째 밤은 서로의 감정을 확신하는 밤이다. 특히 세 번째 밤에 클라라는 화자 '나'를 데리고 시골에 있는 전 연인인 잉키의 조부모 집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나'는 클라라와 잉키의 과거가 어땠을지를 떠올리고 짐작하는 자신에게 지치는데, 이를 계기로 클라라에 대한 감정이 자기와는 확연하게 다른 상대에게 느끼는 단순한 호기심인지 아니면 사랑에 가까운 감정인지 고민한다. 클라라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싶어 머릿속에서는 열심히 시뮬레이션을 돌리지만, 정작 입밖으로는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하는 '나'. 그리고 다섯 번째 밤에 이르러서 사랑과 우정에 대해 솔직하고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비록 의견에 차이가 있고 조금 다툼이 있었을지라도 그 말다툼 끝에 서로의 감정을 더 확실하게 알아간다. 이때 명확하게 드러난 '나'의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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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대 후반, 사랑이 처음도 아니고 상처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새로운 사랑은 설렘을 동반한다. 어쩌면 상처가 있어서 조심스럽게 다가간 사랑에 깊이 빠지면 더 헤어나오기가 어려울지도 모를 일이다. 지나간 사랑을 가슴에 채 묻기도 전에 다시 찾아온 사랑을 대하는 두 젊은 연인의 감정ㅡ갈망, 그리움, 공감, 조심스러움, 질투, 질투에 의한 유치함, 불안과 오해, 조바심, 연민 등ㅡ을 아주 세밀하고 밀도있게 그려내고 있다. 사랑 하나로 행복과 불행이, 희망과 절망이 롤로코스터를 탄다. 사랑할수록 고통스러운 기분이라니. 결국 서로를 믿지 못하고, 사실이나 자신 혹은 상대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어 묻지 않고 미루어 짐작만으로 판단할 때 지옥은 시작된다.
사랑은 어차피 서로 다른 종의 만남이다. 그 다름에 매료되어 사랑에 빠지고, 그 다름에 지쳐 헤어진다. 엉뚱함이 매력적이었다가 예측이 안 되는 엉뚱함을 감당 못하기도 하고, 말갛게 훤히 보이는 에상 가능한 상대에 안정감을 느끼다가도 어느 순간부터 그 일관성이 지루함으로 다가온다.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듯 사랑을 대하는 태도도, 사랑에 대한 정의도, 색깔도 저마다 다르다. 온갖 생각과 감정이 뒤섞여 스스로조차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그래서 사랑은 참으로 어렵다. 그럼에도 소설 속 두 연인, 책을 읽는 우리, 여전히 사랑을 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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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밤」에서 연인의 실랑이를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라이처」와 비유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곡에서 1악장이 그 느낌과 가장 흡사하다. 개인적으로도 1악장을 가장 좋아하는데, 피아노와 바이올린, 두 악기가 경쟁하듯 연주하는, 그러면서 조화가 무척 아름다운 곡이다. 쓰다보니 영락없이 프린츠와 클라라다.
※ 도서지원
우리가 살아가려고 하면서도 매 굽이에서 속이게 되기를 언제나 갈망했던 대로의 우리의 삶. 끝내 알맞은 조성으로 조옮김되고, 알맞은 시제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우리에게 또 우리에게만 알맞은 언어로 다시 말해진 우리의 삶. 우리의 목소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를 통해서 밝혀지고, 다른 사람의 손으로부터 움켜쥐어지고, 도저히 낯선 사람일 리 없지만 그녀가 낯선 사람밖에는 무엇도 아니기에, ‘오늘 밤 나는 네 삶과 삶의 방식에 네가 쓰는 얼굴이야, 오늘 밤 나는 너를 돌아보는 세상을 향한 너의 눈이야, 나 클라라에요‘ 하고 말하는 시선으로 우리의 눈길을 붙드는 사람 때문에 끝내 실재가 되고 빛나게 된 우리의 삶. - P14
그녀를 기다리는 건 나를 행복하게 했다. 그녀를 기다리는 나의 방식에 그녀가 콧방귀를 뀌리라는 생각마저도 나를 행복하게 했다. 두 시간 만에 우리가 영화관을 떠나게 되자마자 그녀가 돌연 작별 인사를 건네는 상황을 미리 연습하는 것도 나를 행복하게 했다. 그리고 나를 더더욱 행복하게 한 것은, 떨어져 보낸 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우리가 다시 함께였다는 점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존재가 오늘이 흘러가게 된 방식을 내가 좋아하게 했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내 삶과 삶의 방식의 얼굴이자, 나를 되쏘아보는 세상을 향한 나의 눈이었다. - P237
나는 왜 그녀를 믿지 않았던 걸까? 왜 그녀를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 이 여자는 추워하는 거다. 왜 그녀에 관해서 뭔가 다른 것을 찾고, 왜 말과 다른 이유를 그렇게 물색하는 걸까? 경계하는 걸 명심하기 위해서? 그녀가 지난밤에 내게 말했고 오늘 아침에는 적어도 두 번은 되풀이 한 것을 믿지 않기 위해서? - P345
클라라, 나 거짓말하고 있었어요. 나는 실망하는 게 무섭지 않아요. 나는 내가 가질 자격이 없으면서 가지게 될 터라거나 매일 가지고자 분투하는 법을 배우기는 커녕 가진들 뭘할지 모를 터였을 것이 무서운 거예요. 그리고 맞아요. 당신이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일까 봐 무서워. 내가 오늘 밤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내일 더 사랑하게 될까 봐 무서워. 그렇게 되면 내가 어디에 있게 되겠어요? - P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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