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하얀 바다 ㅣ 바뢰이 연대기 2
로이 야콥센 지음, 손화수 옮김 / 잔(도서출판) / 2024년 11월
평점 :
『바뢰이 연대기』 두 번째 이야기. 1권 「보이지 않는 것들」이 한스 바뢰이를 중심으로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척박한 환경에 대항하기보다 상황에 따라 대응하고, 자연의 경이에 감탄하면서도 때로는 자연의 힘 앞에 무참히 꺾여 절망하지만 또다시 몸을 일으켜 조화롭게 살아가고자하는 바뢰이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2권은 전쟁의 폐허와 고통 속에서 꿋꿋이 삶을 꾸려나가는 잉그리드와 그녀의 주변 사람들의 서사다.
1권인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읽지 않아도 2권을 읽는 데 별 문제는 없으나 1권을 읽고 난 후에 이 책을 접한다면 훨씬 풍성한 감성으로 읽을 수 있다. 소설은 잉그리드가 고되고 헛헛한 메마른 도시의 일상에 낙담해 바뢰이섬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녀가 걷는 섬 곳곳에는 바뢰이가 사람들의 흔적이 녹아 있다. 그물, 정고, 창고, 부두, 부두의 밧줄, 오리털, 확장한 남쪽 방과 덧댄 지붕 등 잉그리드의 추억이 마냥 아름답게 펼쳐지지만은 않지만, 소설을 읽다보면 앞서 언급한 것들이 잉그리드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고, 다시 돌아오기를 선택한 그녀의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2권에서 두드러지는 부분은 연대다.
폭격으로 쑥대밭이 된 도시에서 배를 타고 전쟁 난민이 쏟아져 들어온다. 해안가에는 격추된 배에서 흘러나온 수백 수천 구의 시신이 밀려온다. 누군가는 점령군을 도와 제 살 길을 모색하고, 누군가는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고 애를 쓴다. 잉그리드는 피난민을 주도적으로 돕는 사람들 중 한 명이다. 자신의 돈과 배급표를 털어 음식을 구해 나눠 먹이고, 제 부모조차 어쩌지 못하는 아이들이나 전쟁 고아들을 씻기고 입힌다. 주변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해 그들의 동참을 이끌어낸다. 아이들을 보호하는 데 우선하고 반드시 학교에 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난민 여성들이 성폭행에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그렇다고해서 잉그리드가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기만 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 절망이라는 절벽 끝에 서서 삶을 그만두고 싶을 때 손을 내미는 이가 있다. 잉그리드가 희생에 가까운 선의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그녀 역시 절벽 앞에 서 있었던 경험이 있고 누군가의 조용한 선의가 그녀를 구원했음을 알기 때문이다. 잉그리드는 자신과 무관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에 대해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전쟁의 참상 속, 춥고 황폐한 시대. 잉그리드를 스쳐간 사람들에 대해 그녀가 아는 건, 그들 삶의 이력이 아닌 죽음과 이별이다. 그럼에도 그녀를, 그리고 그들을 살게 한 것은 삶에 대한 존중이 아니었을까.
딸과 함께 돌아온 수잔, 잉그리드의 딸 카야의 출생, 가족들을 데리고 섬으로 귀환한 라스와 펠릭스. 그리고 바뢰이섬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전쟁 난민들. 상실과 이별의 아픔을 함께 공유하며 혈연보다 더 끈끈한 가족애로 공동체를 이룬 그들의 화합은 다시 피어나는 바뢰이섬의 생명력이자 종전 후 인류의 새로운 희망을 상징한다.
아홉 개의 똑같은 문장,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카야의 눈.
이것이 잉그리드가 앞으로 살아갈 원동력이 되어주리라.
올해 읽은 작품 중 아름다운 소설로 꼽는다.
※ 도서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