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은 저항이다 - 시스템은 우리를 가질 수 없다
트리샤 허시 지음, 장상미 옮김 / 갈라파고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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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과 저항에 대한 책이다. 
저자가 책의 말미에 썼듯 이 책은 자본주의 체제를 따른 바쁜 일상 속에서 휴식을 얻는 방법에 대해 단계별로 나열하는 자기계발서나 실천서가 아니다. 우리가 왜 휴식을 취해야 하는지, 휴식이 왜 저항일 수 있는지, 그리고 휴식을 통한 저항이 어떻게 공동체의 이해와 돌봄으로 이어지는지를 이야기한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돈은 없고 가족은 아프고 언제 인종차별 폭력을 당할지 모르는 위험한 분위기 속에서 내몰리듯 달린 신학대 생활)을 하던 중 일상에 저항하는 한 가지 방안으로서 휴식이라는 실험을 시작했다. 휴식 실험에 뛰어들도록 자극한 것은 신학대에서 공부하던 뿌리 깊은 차별과 폭력의 문화적 트라우마의 역사였다. 저자에게 있어서 휴식은 영혼의 대혁명이 된다. 그는 이 책이 자본주의 체제에 자신의 몸을 바치기를 거부하는 선언이자 서약이라고 말한다. 또한 과로문화는 온 인류를 사람보다 이윤을 우선시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기꺼이 목숨 바칠 의향을 지닌 기계로 만들었다. 그래서 휴식은 급진적인 저항이자 가장 깊은 자아로 통하는 치유의 관문이라고 얘기한다.  


우리가 쉬어야 하는 이유는 자기 본연의 상태로 돌아감으로써 인간적인 존재가 되기 위함이다. 자신의 생산성과 축적해 놓은 부의 수치로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것에 세뇌되어서는 안 된다. 생각해 보면 근래에 가장 많이 보이고 들리는 단어 중 하나가 가성비, 그 다음이 효율성이다. 물론 두 가지가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지나치게 이것에 매몰되어 있다. 이 점이 '더 빠르게, 더 많이'에 가장 적합한 동기를 부여한다.  


저자는 출산을 시작으로 자녀의 공교육시스템, 대학의 역할 등을 경험하면서 우리가 조종당하는 사회화가 자본주의 과로문화의 주체임을 깨닫는다.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어린 나이부터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돌봄과 번영이 아닌 생존이라고 믿게 된다.  


우리가 쉬지 못하는 이유는 휴식조차 자본주의적이고 소비중심적인 방식으로 행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는 휴식은 단기간에 어딘가로 훌쩍 떠나는 소비 위주의 관광 여행이 아닌 평생에 결쳐 천천히 풀어가며 참여해야 하는 문화적 전환이다. 휴식은 사치의 소비재가 아닌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한 기본 요소이자 필수다. 특히 휴식이라 여기면서 SNS를 비롯한 가상 경험의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수록 현실에서의 살아갈 힘을 잃어가고 있음을 강조한다.  


ㅡ 


이 책은 백인우월주의, 흑인여성주의,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을 기반한다. 그러나 독자들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세 단어에 갇혀 저자의 글을 단편적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이 단어들 대신 그 자리에 각자 처한 차별과 부조리로 바꿔 읽어도 충분히 해당하는 내용들이다. 우리가 들여다봐야하는 핵심적인 단어는 '과로문화'다. '과로'와 '소진'은 현대사회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루는 휴식의 방식은 '낮잠'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것은 존재와 가치였다. 식상한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책의 여러 부분에서 언급하는 이 두 가지에 대해 생각이 깊고, 길어졌다.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아기는 존재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화된 집단에 소속되는 순간부터 아이는 더 이상 존재만으로는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고 성인이 되면 더 심해진다. 저자의 물음처럼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가치와 존재에 관해 어떤 말을 들어왔는지, 또한 타인의 존재와 가치를 두고 어떤 잣대를 들이밀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공동체 돌봄, 이타심, 저항으로서의 휴식은 모두 하나의 맥락으로 이어져 있다.  이것은 (경제적) 탈식민화이며 문화 전환이고 자신과 타자를 향한 사랑이다. 우리의 존재와 가치가 숫자로 규정되는, 그래서 이토록 폄하되고 있음에도, 저항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꿈을 꾸는 것으로써, 휴식을 취하는 것으로써, 삶의 가치에 대한 시각을 전환하고 삶의 다른 방식을 상상함으로써, 그리하여 이를 통해 폭력적 사회.문화 체제를 전복하는 것으로써 저항하자고, 저자는 말하는 듯하다. 하루에 30여분의 시간을 내어 몸과 마음을 보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저항자가 될 수 있다.  


저자는 이와 같은 주장을 보다 적극적으로 개진한다. 이를 두고 다소 극단적이라고 하는 독자도 있을 수 있겠으나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우리가 하루하루 휴식과 저항을 미룰수록 나의 현재와 미래뿐 아니라 다음 세대까지 고군분투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우리, 좀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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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미술관 - 다정한 철학자가 들려주는 그림과 인생 이야기
이진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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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다시 바라볼 것들」  「크게 바라볼 것들」  「함께 바라볼 것들」 등 세 개의 파트로 나눠 열한 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몸에 대한 글과 그림을 시작으로 그림을 통해 반사 반영 수렴이라는 인생의 과정, 자본주의적 무한경쟁 시스템 하에서 계급화.계층화를 거쳐 권력으로 자리잡은 미美와 젊음, 하찮은 일들의 소중함, 비록 크게 드러나지도 않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지언정 하찮음이 쌓여 이룬 일상이 주는 위대함 등 이외에도 뻔히 안다고 여기면서도 이 틀에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비난도 비판도 아닌 공감과 이해의 말들로 짚어간다.  







 
보이는 몸이 아닌 기능하는 몸, 몸을 쓰는 것으로서 찾는 삶의 희열.
위의 두 화두는, 한때는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듯 했지만, 근래에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가장 뜨거운 화제가 아닐까싶다. 우리의 몸은 기능하는 몸인가? 몸을 쓰면서 삶의 희열을 얼마나 느끼고 있는가. 우스갯말로 '패션 근육'이라는 용어가 있다. 그야말로 '보이는 몸'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날씬해지기 위해 내장은 손상되고 근력은 퇴화하는 몸. 근육을 만들겠다고 헬스장은 열심히 다니지만 정작 가까운 거리도 걷지 않은 아이러니. 남에게 과시하는 용도를 제외하면 그 몸은 대체 어디에 쓰일까.  


지독할 정도로 여성에게 씌어진 부정적 언어들. 마녀, 마귀, 귀신 등 굳이 성별을 언급하지 않아도 이 단어들을 연상하면 따라오는 건 여성형이다. 소복입은 귀신을 생각할 때 남성을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지금도 성폭력 사건에서 주홍글씨를 안고 사는 이들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다. 천사도 여성형(혹은 아이)이 더 많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겠지만, 천사는 그야말로 한없이 착(해야)하고 신의 말을 잘 듣는 존재들이다. 


뭐든 짧은 것에 길들여지는 요즘 세태, 백 년에 가까운 생을 살면서 우리는 오히려 점점 쉽고 빠른 것만 찾는다. AI가 등장할 무렵만해도 단순 노동은 기계가, 창의의 독특함을 요하는 분야는 인간의 몫으로 남으리라 장담했다. 그러나 현재, 이러한 예상은 정반대로 향해 가고 있다. 자기가 해석한 정보까지 데이타로 받아들이는 AI의 오류를 변별하지 못하고(못한다기보다는 변별하기를 귀찮아하는 것에 더 가까운), 십대와 이십대를 오로지 성적에 쏟아부은 게 무색할 정도로 데이터를 입력하는 단순 업무자로 살아가게 될 처지에 놓였음에도 더 쉽고 빠르게만 외치는 인간의 미래에 서사라고 할 만한 게 남을 수 있을지.  


ㅡ 


저자는 이 책이 미술을 매개로 한 여성들의 이야기라고 서문에서 밝힌다. 그러나 그보다는 부제, '다정한 철학자가 들려주는 그림과 인생 이야기'에 더 가까운 글들이다. 여성을 이야기하지만 여성만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가 살면서 체험하고 느끼고 공감해온 우리 모두에 대해 쓴 글이다.  


저자는 앞과 뒤, 겉과 속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간과하는 '면'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어쩌면 이 책에 담겨져 있는 이야기들이 보이지 않는 혹은 보려하지 않는 '면'과 '공간'에 다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긴 서사의 지루함을 견디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과 계층적 틀을 허문 타자의 슬픔과 하찮음을 측은지심으로 들여다보며, 동시에 우리가 추구하고 도달하려는 것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우리가 우려하는 많은 것들의 해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덧글.
성폭력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만들어버린 메두사 신화와 미국 화가 주디 타카흐스가 2018년 메두사를 그려 발표한 작품에 <Me(dusa) too> 라는 제목을 붙였다는 대목은 무척 흥미롭고 의미심장하다. 또한 루치아노 가르바티의 조각상 <페르세우스의 머리를 든 메두사>는 같은 맥락에서 신선하다. 특히 전혀 기뻐하지도, 자랑스러워하지도 않는 조각상 메두사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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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 더 독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5
황모과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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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뇌사 판정이 나면 죽음으로 인정한다. 그런데 만약 뇌만 살아있다면,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존재가 된다면, 그건 살아 있는 걸까? 






태아 유전자 편집이 당연시 되는 세상에서 편집 시술을 받은 아이들은 외모, 성격, 두뇌 등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우성인자를 타고 나는 반면, 시술을 받지 못한 이들은  '비-편집인'으로 살아간다. 비-편집인이 태아로 있을 때 시술을 받지 못한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다. 돈이 없어서. 이렇듯 유전자 편집이 일반화 된 (근)미래가 배경이지만, 소설에 버금하는, 경제적 격차로 인해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야하는 세태를 당연하게 여기는 부분은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무의식 속에 깊게 자리잡고 있다.  


비-편집인인 한정민이 노아의 요청에 흥미를 느낀 것은 개 사육장에서 개만도 못한 삶을 살고 있는 자신에게 '선생님'이라고 호칭하며 예의를 갖춘 것이었고, 아쉬워했던 것은 그가 자신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는 점이다. 비-편집인들은 이름이 있어도 그 이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다. 비-편집인은 그저 '비-편집인'으로 불릴 뿐이다. 소설에서 첫 번째로 의미있는 장면은 한정민이 노아에게 이름을 묻고, 묻지도 않은 자신의 이름을 알려줌으로써 정민이 '비-편집인'이 아닌 '한정민'으로 불리게 되는 부분이다. 이후 기억을 반복적으로 지우는 과정에서 '이름'이 불린다는 것은 꽤 유의미한 일이 아닐까싶다. 


21세기, 실제 우리가 가장 염려하는 문제 중 하나는 인간을 넘어선 AI의 등장이다. 여기에는 이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는 장면이 등장한다. 인간은 한때 인간 이상이었던 인공지능의 위험을 막는다며 성능을 의도적으로 저하시키고, 업그레이와 다운그레이드를 반복하면서, 자율을 위한 주요한 기능은 몽땅 제거하고 일부러 결함을 만든다. 이 지점에서 한정민은 인간에게 제어와 통제를 당하는 인공지능을, 개와 기계만도 못한, 그래서 폐허가 된 개 사육장에 버려진 비-편집인의 처지와 비슷하게 생각한다. 정상과 예외를 판단할 기준을 정하고, 자신들의 입장에 입각한 유불리를 판단해 자신들이 설정한 시스템을 운영하며 스스로를 인류의 대표라고 자청하는 소수의 인간들. 타인의 생사여탈을 손에 쥐고 스스로 신이 되는 놀이에 도취된 이가 비단 소설 속 노아같은 인간들 뿐일까.   


소설에서는 AI가 존엄을 확보받지 못한 것을 두고 스스로 소멸을 선택한다. 하물며 인간과 인간에 대한 모든 것을 학습한 인공지능조차 존엄을 언급하는데, 하루에 수백 수천이 죽어나가는 작금의 세상은 이미 땅속에 묻어버린 생명의 존엄을 언제쯤 끌어올릴 지 알 수가 없다. 


ㅡ 


아마도 소설에서 가장 눈여겨 봐야 할 장면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순간에 늙어져버린 정민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되고, 마지막 소원으로 여겼던 작은 바람마저 잃었을 때 폐기장에서 마주한 노파. 정민을 관찰하던 노파가 폐기물 위로 올려놓는 시든 꽃다발과 노란꽃송이는 정민이 지나쳐온, 소멸에 이른 객체에 대한 애도일 것이다. 또한 오로지 소멸만을 바라던 정민은 노파가 장식한 꽃을 통해 비록 지난한 삶일지언정 살아야할 이유를 깨닫는다. 이것이야말로 소설이 독자에게 궁극적으로 전하고자하는 바가 아닐까.  


소설을 읽다보면 인간이 기계화되는 과정을 보인다.
육체 소실 - 언어 퇴화 - 감정의 무기력.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면 어떤 면에서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점점 기계화에 근접해가고 있는 게 아닐런지. 타인의 죽음과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우리.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무한소가 되어가는 정민의 모습은 '나ㅡ타자'가 아닌 '나'로서만 존재하려고 드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다보면 몇몇 소설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데, 근래에 읽은 소설들 중에 가장 묵시록적인 소설이라고 느껴졌다. 적잖이 무거운 소설이다. 올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들의 소감도 다시 기억이 나면서 몇 가지 생각거리들이 숙제로 남았다.  


지독한 미래를 엿보고 싶다면, 읽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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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이미리내 지음, 정해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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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 안에서 가혹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 이민자와 난민, 혼혈인의 민족적 정체성, 위선과 허위를 숨기는 국제 사회, 그리고 이들을 향한 혐오를, 일제 강점기를 시작으로 한국전쟁, 냉전시대를 관통해 현재에 이르기까지 약 백 년을 살아낸 한 여성의 일대기를 통해 이야기한다. 마치 영화 시놉시스라고 해도 무방할만큼 소설은 입체적이고 다채로우며 극적이다.  


요양원의 부고 작가인 '나'는 묵 할머니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요양원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대부분의 노인들은 자신의 이력을 부풀려 말하기가 다반사다. 그러나 묵 할머니가 이와 같은 선상에 있다고 치부하기에는 말하는 태도나 앞뒤의 진술이 구체적이고 명확하다. 하지만 과연 한 사람이 그토록 다양하고 다층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또한 믿기 힘들다.  



묵 할머니의 삶은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찰 정도로 숨가쁘게 달려간다.
남편과 딸조차 그녀의 진짜 이름을 모른다. 그녀는 데버라였고, 간요였고, 용말이었고, 최 선생이었고, 미란이었다.  


그녀의 삶이 허구이건 사실이건 중요치 않다. 격동의 시대를 거쳐 온 대부분의 삶이 묵미란의 그것처럼 가혹했음을, 소설은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닐까.  


묵미란은, 노인들은 연어같다고 말한다. 정신이 시간과 기억의 흐름을 거슬러가기 때문에. 그리고 거기에는 도달할 수 없는 그리움도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마지막 한데 잠, 그녀의 가슴에 시원하고 무해한 바람이 지나갔으리라. 

선한 동시에 악한 여자. 누군가를 한없이 사랑할 수 있었고 그 사랑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살인마저도 불사할 여자. 미치광이들의 언어를 아는 여자.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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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원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19
제럴드 머네인 지음, 박찬원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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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세 개의 장章으로 나뉘어지는 이 소설은 화자가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첫 번째 장에서는 20년 전, 화자가 영화 <내륙>을 찍기 위해 호주의 내륙 깊숙한 어느 평원 마을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후원을 약속한 대지주의 저택으로 들어간다. 두 번째 장은 화자가 대지주 저택에 머물면서 보고, 경험하고, 공부한 것 들과 그에 따른 사유와 영감, 영화적 상상에 대해 적은 메모의 내용이다. 세 번째 장은 저택에 머물면서 지주들과 후원을 받는 다른 전문가들을 관찰하고, 그들과의 대화를 바탕으로 화자의 생각을 적은 글이다.  






일단 독특한 소설임에는 분명하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여타의 소설들과 다른 점을 꼽아보자면,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은 20년 전 회상에 머물고 있다. 보통 20년 전에서 시작하면 결론은 현재에 이르기 마련인데, 이 소설은 그렇지 않다. 더구나 화자가 영화 제작자로서 '평원'을 영상화하는 것에 무척 애를 썼음에도 그에 대한 결과는 나타나지 않는다. 가장 큰 특이점은 화자와 대지주, 그리고 그의 딸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등장인물이 없는데다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조금 부풀려서 표현하자면 거의 1인극에 가깝다. 심지어 줄거리도 없다(는 게 틀린 표현은 아닐 것이다). 굳이 빗대어 본다면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떠오른다.  


ㅡ 


소설에서 '평원인'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굳이 그들을 하나의 표현으로 규정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대지주들에게 후원을 받고자 면접을 희망하는 사람들은 영화 제작자인 화자를 비롯해 시인, 화가, 디자이너, 종교인, 가구 장인 등 다양한데, 그들은 후원을 받기 위해 자신의 분야와 접목한 평원에 대해 온갖 자료를 조사하고 연구하고, 평원을 향한 자신들의 사랑이 얼마나 열정적인지 고백한다. 그런데 그것은 호주 내륙의 '평원인'들의 '평원'이 아니다. 대지주들은 자신들만의 평원의 서사를 바란다(그런 면에서 호주 내륙 평원의 역사까지 애써 공부한 화자의 노력은 보람이 있었던 셈이다). 화자가 경험도 없는 대지주의 딸을 주인공으로 삼기로 한 데에는 후원을 받겠다는 욕심보다는 이러한 평원인들의 의도와 자부심을 이해했기 때문인 듯하다.   


첫 번째 장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장이 독자가 깊게 읽어야하는 부분이라는 게 개인적인 의견이다. 
이 소설은 광활한 평원을 배경으로 하지만 생태소설이 아니고, 드라마적이지도 않다. 첫 번째 장에서 비평가와 예술가들을 통해 무심히 툭 던진듯한 질문, '평원의 본질적인 정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두세 번째 장에서 근접하게나마 찾을 수 있다. 파벌 싸움으로, 정치적으로, 산업적으로 이용될 위기를 넘기고 평원의 문화를 이루기까지의 역사를 되짚는 과정은 인류사를 축약한 듯한 느낌도 든다. 


첫 장에서 대지주들은 피부색, 새(메추라기), 탐험가, 여인, 소설 등을 평원과 연관지어 무작위로 대화를 한다. 처음에는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러나 싶었는데 문득 이들의 대화 방식 그 자체가 평원이 갖는 속성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광활하고 자연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 계절과 시간과 날씨에 따라 다양한 색깔을 보여주고 있어 하나로 단정할 수 없으며, 이 평원을 배경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나 가장 본질적인 것은 달라지지 않으며 영원히 정복당하지 않는  속성.  


ㅡ 


두 번째 장을 읽으면서 막연하게 머릿속에 맴돌았던 단어들은 시간, 사변(추론)과 경험, 철학적 사유를 통한 역사와 예술, 그리고 이것들을 아우르는 서사다.
찍혀서 박제된 사진(장면)은 곧 보이는 세계이다. 그러나 보여지는 장면과 그 안의 서사에 대한 기억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이는 논리적 이성으로 관찰하고 연구하는 것으로써 평원을 드러내고 전달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화자의 고민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여러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후원을 받아가면서 평원을 연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며, 대부분 후원을 받는 자들의 자기 만족에 그치고 말, 정작 대지주 자신들에게는 만족할 만한 결과에 도달하지 못함에도 그들은 무엇을 얻고자 꾸준히 후원을 하는 것일까? 이것이야말로 삶이 갖는 속성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가는 것, 즉 성찰이야말로 우리가 살면서 할 수 있는 전부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닌지, 나 혼자만의 답을 찾았다. 


이 소설에서는 인물들의 입을 빌어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아마 그에 대한 독자의 답은 제각기 다를 것이다.  



다소 난감한 면도 없지 않았으나 읽고 쓰다보니 작가가 상당히 지능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농담이다). 적은 분량임에도 천천히, 진지하게 읽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책을 읽을 예정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꼭 쓰기를 병행하기를 추천한다.  




※ 도서지원
  

어떤 역사가들은 평원이란 현상은 전반적으로 평원인과 호주인 사이의 문화적 차이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처음에는 지극히 평평하고 특색 없이 보였으나, 나중에는 미묘한 풍경이 끝없이 변주되고 눈에 잘 띄지는 않아도 야생 생물이 풍부한 곳임을 알 수 있었다. 평원인은 이러한 발견을 감사히 여기고 묘사하려 노력하는 중에 남다른 관찰력을 갖추면서 점진적으로 드러나는 의미를 식별하고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훗날 세대들은 선조들이 안개 속으로 아득히 펼쳐지는 수 킬로미터에 걸친 초원을 마주하듯 삶과 예술에 반응했다. 그들은 이 세상 자체를 끝없이 이어지는 평원 속 또하나의 평원으로 인식했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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