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 더 독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5
황모과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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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뇌사 판정이 나면 죽음으로 인정한다. 그런데 만약 뇌만 살아있다면,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존재가 된다면, 그건 살아 있는 걸까? 






태아 유전자 편집이 당연시 되는 세상에서 편집 시술을 받은 아이들은 외모, 성격, 두뇌 등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우성인자를 타고 나는 반면, 시술을 받지 못한 이들은  '비-편집인'으로 살아간다. 비-편집인이 태아로 있을 때 시술을 받지 못한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다. 돈이 없어서. 이렇듯 유전자 편집이 일반화 된 (근)미래가 배경이지만, 소설에 버금하는, 경제적 격차로 인해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야하는 세태를 당연하게 여기는 부분은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무의식 속에 깊게 자리잡고 있다.  


비-편집인인 한정민이 노아의 요청에 흥미를 느낀 것은 개 사육장에서 개만도 못한 삶을 살고 있는 자신에게 '선생님'이라고 호칭하며 예의를 갖춘 것이었고, 아쉬워했던 것은 그가 자신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는 점이다. 비-편집인들은 이름이 있어도 그 이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다. 비-편집인은 그저 '비-편집인'으로 불릴 뿐이다. 소설에서 첫 번째로 의미있는 장면은 한정민이 노아에게 이름을 묻고, 묻지도 않은 자신의 이름을 알려줌으로써 정민이 '비-편집인'이 아닌 '한정민'으로 불리게 되는 부분이다. 이후 기억을 반복적으로 지우는 과정에서 '이름'이 불린다는 것은 꽤 유의미한 일이 아닐까싶다. 


21세기, 실제 우리가 가장 염려하는 문제 중 하나는 인간을 넘어선 AI의 등장이다. 여기에는 이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는 장면이 등장한다. 인간은 한때 인간 이상이었던 인공지능의 위험을 막는다며 성능을 의도적으로 저하시키고, 업그레이와 다운그레이드를 반복하면서, 자율을 위한 주요한 기능은 몽땅 제거하고 일부러 결함을 만든다. 이 지점에서 한정민은 인간에게 제어와 통제를 당하는 인공지능을, 개와 기계만도 못한, 그래서 폐허가 된 개 사육장에 버려진 비-편집인의 처지와 비슷하게 생각한다. 정상과 예외를 판단할 기준을 정하고, 자신들의 입장에 입각한 유불리를 판단해 자신들이 설정한 시스템을 운영하며 스스로를 인류의 대표라고 자청하는 소수의 인간들. 타인의 생사여탈을 손에 쥐고 스스로 신이 되는 놀이에 도취된 이가 비단 소설 속 노아같은 인간들 뿐일까.   


소설에서는 AI가 존엄을 확보받지 못한 것을 두고 스스로 소멸을 선택한다. 하물며 인간과 인간에 대한 모든 것을 학습한 인공지능조차 존엄을 언급하는데, 하루에 수백 수천이 죽어나가는 작금의 세상은 이미 땅속에 묻어버린 생명의 존엄을 언제쯤 끌어올릴 지 알 수가 없다. 


ㅡ 


아마도 소설에서 가장 눈여겨 봐야 할 장면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순간에 늙어져버린 정민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되고, 마지막 소원으로 여겼던 작은 바람마저 잃었을 때 폐기장에서 마주한 노파. 정민을 관찰하던 노파가 폐기물 위로 올려놓는 시든 꽃다발과 노란꽃송이는 정민이 지나쳐온, 소멸에 이른 객체에 대한 애도일 것이다. 또한 오로지 소멸만을 바라던 정민은 노파가 장식한 꽃을 통해 비록 지난한 삶일지언정 살아야할 이유를 깨닫는다. 이것이야말로 소설이 독자에게 궁극적으로 전하고자하는 바가 아닐까.  


소설을 읽다보면 인간이 기계화되는 과정을 보인다.
육체 소실 - 언어 퇴화 - 감정의 무기력.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면 어떤 면에서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점점 기계화에 근접해가고 있는 게 아닐런지. 타인의 죽음과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우리.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무한소가 되어가는 정민의 모습은 '나ㅡ타자'가 아닌 '나'로서만 존재하려고 드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다보면 몇몇 소설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데, 근래에 읽은 소설들 중에 가장 묵시록적인 소설이라고 느껴졌다. 적잖이 무거운 소설이다. 올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들의 소감도 다시 기억이 나면서 몇 가지 생각거리들이 숙제로 남았다.  


지독한 미래를 엿보고 싶다면, 읽어보시기를.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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