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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소나주
실비 제르맹 지음, 류재화 옮김 / 1984Books / 2022년 3월
평점 :
31.
단어들에게도 혈색을 줘야 한다. 부피를, 색깔을, 맛을, 섬유 조직 또는 성역 같은 조직을 마련해야 한다. 소리와 빛에 반사 작용을 할 수 있는 힘이 갖춰져야 한다. 등인인물들의 부름에 응답하는 소설가에게 주어지는 책임이다.
십대 초반, 소설을 한 편을 썼었다. 원고지 1000매가 넘는 분량이니 그 나이에 쓴 것치고는 적지 않은 분량이다. 그때가 한참 <작은 아씨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였는데, <작은 아씨들>의 아류작이라고 보면 되겠다.
완성을 하고 나보다 두 살 많은 사촌 언니에게 보여줬더니 잘 썼다고 칭찬을 받았는데(그래봐야 그 사람도 중학교 1학년), 더 잘 써보라고 두툼한 몇 권의 공책과 연필 몇 다스까지 선물받은 기억이 있다. 그리고 십 수년이 지나 다시 펼쳐보니, 정말 낯 뜨거워서 도저히 읽을 수 없는 글들. 고작 열두어 살에 썼다는 것을 감안해도 창피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실비 제르맹을 글을 읽다보니 그 이유를 알겠더라는. 그 글에는 사건, 등장, 감정 등을 나열했을 뿐이었다. 그야말로 색깔과 생명력이라고는 1도 없는. 그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켰음에도 동경의 대상이었던 한 인물에만 집중한 채 나머지 인물들은 모두 단역으로 전락시켜버렸던.
이 책을 읽으면서 글은 아무나 써도 되지만, 아무나 잘 쓰는 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