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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평점 :
어느 날 아침, 한바탕 소동으로 10년 전 세상을 떠난 아내 애나를 떠올리는 사이 바움가트너.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활기 넘치는 애나는 케이프 코드의 파도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가 파도와 마주쳐 등이 부러져 죽었다.

여러 등장인물의 삶의 이력을 통해 본 각 세대의 시대상과 젊은 시절의 초상을 작가 특유의 다정한 시선으로 그려냈다. 죽은 아내를 놓지 못했던 노교수의 살아온 날들에 대한 회고, 부모들의 삶에 대한 기억 등 독자는 아내 애나의 글과 그 글들을 정리하는 바움가트너를 통해 누구나 삶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폴 오스터는 가장 본질적인 인간의 역사 즉 관계와 의존, 상실과 외로움, 제 삶을 살아낸 후 먼저 떠난 이들에 대한 애도에 대해 담담하면서도 따뜻하게 이야기한다.
앙헬 플로레스의 손가락 절단 사건은 바움가트너가 10년 전 아내를 잃은 상실과 고통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아내가 떠난 후 몇 달 동안 의식이 분열된 자신의 모습은 플로레스가 겪을지도 모를 환지통과 같은 선상에 있는데, 바움가트너 역시 애나가 죽은 후 여섯 달 동안 그녀에 대한 '환지통'을 경험했다. 그 여섯 달 동안 바움가트너는 방향 감각을 상살한 채 비합리적인 충동에 휘둘리고 흔들리며 지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몇 권의 책을 이어서 써냈다. 다시 타인과 관계를 맺고 우정을 쌓으며 때로는 다른 여자에게 호기심을 가졌다. 오히려 애나의 죽음 이후 훨씬 더 생산성 있는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것은 애나를 사랑했던 내면 한 부분을 영혼의 깊은 곳에 영원히 죽은 채로 묻어둔 것이었음을, 그는 불에 타 쪼개져벼린 냄비를 보고 깨닫는다. 바움가트너는 환지통의 궁극적인 치료법은 없다고 말한다. 폴 오스터는 인생이란 곡절마다 겪는 환지통을 완화해가며 살아가는 일임을 말한다고 읽혔다. 그렇다면 환지통을 어떻게 완화할 수 있을까.
기억과 애도, 그리고 연결됨.
소설 후반부가 인상적이다. 대학 후배인 톰은 바움가트너에게 애나의 시로 논문을 쓰고 싶다는 젊은 여성 비어트릭스 코언을 소개하고 도움을 요청한다. 이후 바움가트너와 비어트릭스는 이메일을 통해 우정에 가까운 관계가 되고 애나와 똑닮은 그녀를 딸처럼 사랑하게 된다. 또한 비어트릭스의 방문을 대비해 정원을 손질하는 데에 소설 첫 부분에 등장했던 검침원 에드의 재등장까지, 이는 폴 오스터가 소설 내내 썼던 '연결됨'을 아주 잘 보여주는 설정이다. 사람과 사람, 삶과 죽음, 과거와 미래, 기억과 상실 등 인생 전반에 있어 거의 모든 것들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연결없이 고립된다면 우리는 살아갈 힘을 잃는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떠올랐던 사람들이 있었다. J 씨, M 선생님을 비롯한 몇 분들. 특히 바움가트너의 어머니에 대한 서술을 따라가자니 자연스레 은섬 씨의 삶이 겹쳐졌다. 물론 살아온 방식이 다르고, 주변 인들물과의 관계 방식도 다르지만 1900년대를 지나온 이들의 삶과 그들 스스로 부여한 자신의 인생에 대한 자부심에는 분명 비슷한 정서들이 있다. 나는 제 삶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이들에게 늘 감동을 받는다.
가제본 책을 받았을 때는 아직 정식 출간 전이었다.
내용적으로 구구절절 쓰고 싶은 얘기들이 많지만 출간 이후 읽을 독자들을 위해 남은 이야기들은 별도의 독서노트에 써둔다. 삶을 관조하는 따뜻하고 다정한 폴 오스터의 시선이 훈훈하게 들어오는 소설이다.
가히, 그의 아름다운 마지막 소설이라 하겠다.
※ 가제본 도서지원
외로움은 사람을 죽여요, 주디스. 그건 사람의 모든 부분을 한 덩어리씩 먹어 치우다 마침내 온몸을 삼켜 버려요.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삶이 없는 것과 같죠. 운이 좋아 다른 사람과 깊이 연결되면, 그 다른 사람이 자신만큼 중요해질 정도로 가까워지면, 삶은 단지 가능해질 뿐 아니라 좋은 것이 돼요.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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