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개의 단상 세라 망구소 에세이 2부작
세라 망구소 지음, 서제인 옮김 / 필로우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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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작가의 단상을 모아놓은 에세이다. 세라 망구소는 미사여구, 혹은 잠언처럼 아름답고 차분한 명상이나 철학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우리가 생활 전선에서 마주하게 되는, 야박할 정도로 현실적인 상황에 닥쳤을 때 드는 생각들을 얘기한다. 


얼마 전 <질문일기장>을 받아들었다. 매일 매일 한 가지 질문에 답하는 일기장이다. 세라 망구소는 에세이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나는 질문일기장처럼 마치 그녀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이래. 넌 어때?" 같은. 


그래서 이 책처럼 작가의 짧게 나열된 몇 가지 생각들에 더 짧은 나의 생각들을 보태보고자 한다.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과 남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나쁜가? 남에게 거짓말을 해서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 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감정 및 에너지 소모를 따져가며 오랜 인연을 끊어버리는 것을 비롯해 무엇이든 가성비를 따지는 요즘의 세태에 대한 생각.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낭비라고만 여긴다면, 누군들 나를 이해하기 위한 수고를 들이겠는가.  


눈앞에 닥친 자신의 고통을 핑계로 친구의 질환을 부럽다고 말하는 사람. 상대에 대한 공감과 배려는 찾아볼 수 없이 제 아픔만 고통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가까이 하고 싶지 않다.  


천재는 뭔가를 쉽게 해낸다기보다는 빨리 해내는 사람들처럼 보인다는 말에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쉽게'와 '빨리'는 같은 맥락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최악의 일이 일어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정은 안도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다. 더 나빠질 것도 없다는.   


자신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때면 나도 모르게 말이 많아진다는 말에 공감. 한번쯤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을까? 모르는 사이는 아니지만 친숙하지 않은 관계의 사람과 한 공간에 둘만 남은 상황(으... 생각만 해도 불편하다). 그래서 가능하면 내가 말을 많이 해야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을 피하고 싶어진다. 


세라 망구소는 적응을 잘하는 사람들은 두려움을 자기 삶 한구석이 아닌 삶 여기저기로 골고루 분배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하는데, 적응 속도가 비교적 느린 편인 나는 이 말을 곰곰 생각해 본다. 그런데 적응을 잘하지 못하는 이유가 두려움 때문일까? 꼬리를 물어 질문을 되짚어가보면 일견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의 비밀을 알고 싶다면 아무것도 묻지 말고 듣기만 하라는 조언. 그런데 상대가 듣고 싶지 않은 비밀을 털어놓으면 그아말로 대략난감이다. 저자는 읽고 싶은 책, 다시 읽고 싶은 책, 얼마나 형편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펼쳐보고 싶은 책 등 세 종류를 소장한다고 하는데, 얼마나 형편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소장한다고? 신박한데... . 


학생이 그녀의 기대를 뛰어넘으면 자랑스러우면서도 배신당한 느김이 든다는 저자. 이렇게 솔직하다니. 그나저나 난 그렇지는 않던데. 살짝 당황스럽긴 하지만. 자기가 가진 두려움을 하나씩 하나씩 버리고 싶다는 세라 망구소. 그럴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요약이 불가능한 글을 좋아한다고 쓴 그녀의 글에 나는 어떤 글을 좋아하는지 좀 길게 생각해봤다. 더하여 그녀가 사랑하는 일들을 썼길래 나 역시 포스트잇에 단정하게 써서 책에 붙여놓았다. 그런데 이런 시간들이 꽤 무척 좋았다. 쓰다보니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라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되었고.  


세라 망구소는 자신이 죽은 뒤에 어떻게 해달라는 지시를 왜 그녀가 내려야 하는지 물음표를 놓는다. 유골은 그녀 본인이 아니라 가족이 소유할 테고, 유골을 뿌리는 일은 그들이 망자를 기억하도록 돕는 일일 것이라면서. 결국 나의 죽음 이후는 내 소관이 아닌건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 역시 가끔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어쩔 수 없이 가면을 쓰게 된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필요에 의한 위장에 대해 이분법적으로 단정짓기 어렵다. 선의의 거짓말처럼 우리를 딜레마에 빠뜨리는 일도 수두룩하다. 세라 망구소는 모든 새로운 일상은 절망 속에서 시작되고, 다른 절망 속에서 끝난다고 말한다. 위선과 가식, 선의와 악의, 유혹과 딜레마, 흔들리는 자아감, 절망의 연속. 그럼에도 우리가 삶을 지탱할 수 있는 까닭은 인생의 퍽퍽함 사이에 생기는 틈들을 작고 짧은 행복이 메워주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저자를 따라 함께 써내려간 짧은 글쓰기가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 되고, 나도 모르는 새에 위안을 준다. 책을 읽었지만, '쓰는 행위'의 즐거움을 새삼 깨달은 시간이었다.  



78. 
어딘가로 도망치고 나면 되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가끔씩 우리는 그저 도망치고 싶어 한다. 어디로든.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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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샤 페이지터너스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지음, 정영문 옮김 / 빛소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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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모든 사물과 인간의 본성은 동기와 언어로써 표현될 수 있다고 한 것은 누구인가? 나는 오랫동안 문학이 단지 사실을 묘사하거나, 또는 인물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게 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설 속의 모든 동기는 분명하거나 잘못된 것이다.  


이 책을 거의 다 읽어갈 무렵부터 든 의문은 '이 책의 제목이 왜 쇼샤일까?'였다. 사실 쇼샤는 작 중 인물들 중에서 그다지 중요하게 위치하지 않는다. 주인공 아론 그라이딩거(아렐레)가 갖는 선택적 갈등의 한 축일 뿐이다. 쇼샤는 아렐레와 비슷한 또래로 어릴 때부터 학습부진아였고 삼십대가 되도록 지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여전히 미숙한 여성이다.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과 아렐레에 대한 지순한 사랑을 지켜왔기 때문에 작가는 이 여성의 이름을 제목으로 택한 것인가?   








율법에 따라 성장한 유대인 청년은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율법에 어긋나는 많은 것들을 경험한다. 시온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책을 비롯해 금기시했던 책들을 탐독했고, 혁명에 따른 새로운 이념과 개념들을 닥치는대로 받아들였다. 그 시간 동안 유년 시절을 함께 했던 많은 소년들이 전쟁터에서 죽었고, 그의 고향은 온갖 이념들로 뒤섞였다. 글을 쓰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아렐레는 이십 대에 이미 자신이 노인이 된 것처럼 느꼈다.  


물이 흐르듯 청년이 삼십 대가 되어가는 동안 히틀러는 빠른 속도로 독일의 통치자가 되어 영향력을 확장했고, 러시아에서는 숙청을, 폴란드에서는 군부 독재가 시작됐으며, 미국에서는 이미 이민 할당제를 시작했다. 아렐레는 물리적으로 꼼짝 못하게 되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언어와 문화 속에 갇혀버렸다. 아렐레의 이삽십대를 지켜보자면 그가 정서적으로 사면초가에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종교적으로도, 작가로서도, 경제적으로도. 그래서 히틀러의 학살이 점점 다가오는 상황에서도 쇼샤와의 동반 죽음 외에는 그 어떤 다른 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 


ㅡ 


공산주의자 도라, 아렐레 미래의 성공의 열쇠를 쥐고 있는 베티, 그의 육체적 갈망을 채워준 테클라, 모성애같은 사랑으로 청년을 보호해준 셀리아. 그들과 육체적 사랑을 나누면서 근원을 알 수 없는 갈망을 순간순간 해소한 아렐레는 행복에 대해 자문하지만 어떤 대답도 찾지 못했다.  


도라는 세상을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들고자 혁명을 했고, 베티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역할을 필요로 했고, 셀리아는 감각과 전율을 추구했고, 테클라는 그저 제 할 일을 함으로써 뭔가를 원하기 보다 주고자 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늘 받는 것에 익숙한 사랑을 했던 아렐레가 선택한 여자는 백치에 가까운 쇼샤다. 마치 이십 년 세월을 건너 뛴 듯 한결같이 아렐레의 곁에 있었던 것처럼 너무나 말끔한 모습으로 너를 기다려왔다고, 네가 없는 동안에도 너를 사랑했다고 말하는 그녀. 아렐레가 앞선 여성들의 피보호자 입장이었다면, 쇼샤에게는 완전한 보호자 역할을 해야 했다.  


ㅡ 


사실 소설을 읽으면서도 아렐레가 쇼샤를 선택한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다. 외관상으로 보이는 지적.육체적인 미숙함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을 하지만 독자인 나에게는 그의 사랑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쇼샤와의 재회가 마치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던 그에게 운명적 사랑이며 이것이 곧 자신의 미래인 것처럼 얘기하지만 나에게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었다. 이는 앞서 맨 처음 가졌던 의문에 닿아있다. 왜 쇼샤인가? 


재회 후 추억과 감정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보듬는 두 사람. 그런에 이들은 늘 삶이 아닌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들은 자기의 죽음에 서로를 동반자로 삼으려고 한다. 쇼샤는 죽을 거면 자기를 데려가라고 하고, 아렐레는 자기의 죽음에 데려가겠다고 한다. 이것이 과연 이십 년 만에 만나 격하게 사랑을 고백하는 연인이 나눌만한 대화인가? 아렐레는 혼란스럽고 엉망진창인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 즉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죽음 외에는 벗어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뇌는 아렐레만의 것은 아닐 터다.  


ㅡ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작가의 서술에서보다 등장인물의 대화에 핵심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파이텔존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실패하는 이유는 부패하기 때문이고 그로인해 인간은 우상숭배를 하며 각기 다른 형태의 신을 창조하기 마련인데, 유대인만이 영원한 신을 믿음으로써 세계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엘빙거의 말을 통해 당시 유대인의 사회적 위치와 그들이 자부하는 민족성과는 별개로 아웃사이더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불안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도라와 베티의 짧은 대립을 통해 볼 수 있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까지.  


트로츠키주의, 스탈린주의, 시온주의, 유대인동맹, 수정주의 등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아렐레는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알 수가 없다. '세상은 너무도 많은 신비로 가득 차 있다'는 어머니의 말은 그에게 어떤 위안도 주지 못한다. 수용소에서 참혹하게 죽어가는 유대인들과 이념 때문에 죽어가는 젊은이들, 그리고 백치라고 무시당하는 쇼샤. 신은 이토록 약한 자들을 버려둔 채 어디에 있는 것일까. 


쇼샤와 결혼함으로써 아렐레는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조롱의 대상이 된다. 그는 자신이 내린 결정이 그가 내린 것이 아니라 자신을 대신한, 어떤 알지 못하는 힘에 의한 것이라고 느끼는데, 아마도 우리는 이처럼 후회, 무책임, 회피 앞에서 운명이라는 핑계를 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ㅡ 


나는 연달아 두 번이나 읽은 이 소설이 전혀 '순수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고 읽혀지지 않는다.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처절하게 인간다운 삶을 갈구하는 한 청년의 몸무림이자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유대인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자본자의자들에게도 파시스트에게도 속하지 못하고 있다는 베티의 말처럼 어딘가에 발을 딛지 못하고 부유하는 삶이 얼마나 많은가.  


아렐레는 스탈린과 히틀러같은 압제자만이 인류의 비극에 기여하는 것은 아니라고 얘기한다. 대중의 다수가 살인과 약탈, 강간을 저지르고 있으며,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명망있는 지도자들 역시 각자의 명분으로 이러한 범죄를 정당화하고 있음을 일갈한다. 즉 쇼샤를 백치라고 비웃고 손가락질하며 모욕을 주는 대다수의 사람들 역시 그러한 압제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얘기하면서 동시에 도라를 통해 인간은 어떤 희생도 무마할 수 있는 '대의'라는 명분으로 얼마든지 이율배반적인 존재임을 얘기한다. 


ㅡ 


처음으로 돌아가서 나 스스로에게 던진 의문에 대해 내가 찾은 답은 등장인물들의 대화와 이를 관조하는 아렐레의 시선에 있었다. 사상과 이념, 이상과 현실, 선과 악, 지배자와 피지배자, 독재와 혁명, 자유와 억압 등을 놓고 대립하는 인물들을 회의와 허무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아렐레가 추구하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아닌 본질적인 순수이며, 인간이 가진 기쁨과 사랑과 슬픔과 두려움과 불안을 거짓과 가식 없이 그대로 드러내는 쇼샤에게 투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정리한다.


유대인을 비롯한 인류에게 가해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잔혹하고 비극적인 고통은 왜 있어야 할까? 지금 이 시각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동안 신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살아남은 아렐레,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여전히 그 해답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신은 무엇으로 존재하는지. 그리고 인간은 무엇으로 존재하려고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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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의 커피 교실 - 쓸데없이 재밌는 커피 가이드
졸라(Zola) 지음, 김미선 옮김 / 넥서스BOOKS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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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서 도대체 바리스타 자격증은 왜 취득한 거냐고 물을 만큼 나는 커피를 단조롭게 마신다. 우유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고 블렌딩을 할 실력이 없으니 오로지 오리지널 싱글만, 그것도 고집하는 산지가 있어 늘 마시는 커피만 마셔서 카페를 잘 이용하지도 않고 드립으로 내리는 게 전부다.
(최근 들어 에스프레소 머신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중이긴 하다.) 


실력이나 경험이 일천하니 커피에 관련한 책들이 출간되면 사이사이 재미로라도 즐겨 읽는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커피를 마시는 방식이 크게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이 책은 커피의 유래와 역사, 각 나라마다 커피를 마시는 스타일, 대륙별 커피콩의 차이, 기구에 따른 커피 제조법, 커피 입문자를 위한 기초적인 상식 등 다양한 내용을 귀여운 부엉이 올리가 유쾌하게 서술한, 커피의 전반적인 가이드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단 내가 자격증 시험을 보겠다고 머리를 싸매고 달달 위우던 내용들이 너무 쉽게 설명되어 있어서 좋았고(내가 시험 보기 전에 출간됐으면 좋았을 것을!), 삽화 덕분에 정리 및 분류가 쏙쏙 된다. 참고로 취미로 커피를 배우는 사람들한테도 좋고, 바리스타를 준비하는 사람들도 처음에 읽으면 머릿속에 개괄적으로 정리가 될 것 같다.  


읽으면서 잊어버렸던 내용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는 재미도 쏠쏠하다. 책을 다 읽고 주방 서랍장에 빛도 보지 못한 채 갇혀 있던 프렌치프레스, 모카포트, 더치 등을 꺼내봤는데, 확실이 기구는 써줘야 늙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네. 



나는 커피든 차(tea)든 즐겨 마시는 편이 아니다. 물, 그야말로 생수 외에는 음료를 좋아하지 않는데, 후배의 꼬임에 넘어가 처음 들은 커피 강의에서 커피의 기원과 역사 수업을 듣고 흥미로워 어쩌다보니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배우면서 커핑과 로스팅에 매력을 느껴 강사샘에게 문의했더니 커핑을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다고! 커핑은 아주 감각이 예민해야하고, 로스팅은 감각 뿐만 아니라 힘을 써야 해서 비교적 어린 나이(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시작한단다. (하고 있는 일이나 잘 하자.)


소개된 추출 기구 중 터키 포트(이브릭)은 사용해보지 못했는데, 걸죽한 커피 추출물이 어떤 맛일지 무척 궁금해하는 중이다.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면 모를까 추출 기구를 더 들일 일은 없을거라 여겼는데, 손가락은 이브릭을 검색하고 있다.  


커피에 관심있다면 재미지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입문으로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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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악마의 시 1~2 세트 - 전2권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살만 루시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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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와 천사의 모습을 모두 가진 존재가 인간이다.  


성과 계급을 따져 아무렇지 않게 타인의 목숨을 잔혹하게 거두고, 얼굴색을 이유로 차별과 학대를 당연시하며, 신의 이름을 빌어 셀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인간의 모습에서 우리는 악마를 본다. 


숱한 재난의 고통에 빠진 이들을 위로하고 도움을 주기 위해 대가를 바라지 않고 기꺼이 자신의 마음과 돈을 내어주는 이들의 모습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천사를 본다.  


하루가 멀다하고 서로가 서로를, 집단이 집단을 죽이는 이 지옥같은 세상에서 종교와 이념은 중요하지 않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규율과 관습, 집단의 이기를 뛰어넘는 생명에 대한 존중과 사랑, 이해와 배려, 그리고 관용이 필요할 뿐이다. 


살만 루슈디는 이 책을 통해 특정 종교, 국가, 민족, 인종을 비난하고자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독자는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그 모든 것들이 신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생명체 개개의 '삶'보다 중요하지 않음을, 익살스럽게 얘기하고 있다.


그야말로,
"뭣이 중헌디?" 



암울할 수 있는 스토리를 해학과 풍자로 버무릴 수 있는 작가의 필력이 탁월하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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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 일기 세라 망구소 에세이 2부작
세라 망구소 지음, 양미래 옮김 / 필로우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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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일기를 써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쓰기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쓰지 않고는 시간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 방법을 단 한 가지도 떠올릴 수 없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한 기억, 일기, 망각에 관해 이야기하는 에세이다.


저자는 일기 쓰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누군가가 자기의 일기를 읽기 바란적은 단 한 순간도 없으면서 일기를 고쳐쓰는 저자의 습관을 다른 사람들은 납득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나는 충분히 납득한다. 고쳐 쓰는 이유는 시간적 거리를 두면 당시 나의 감정을 나 스스로도 잘못 판단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때와는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해서 종종 첨언을 달아놓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세라 망구소는 누가 자신의 일기를 읽건 말건 신경쓰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건 나랑 좀... 다르네. 나는 누가 내 일기를 읽는 건 내키지 않는다.  


다시 읽은 일기 중에 1996년 일기에는 중요한 일이 하나도 없었던 것 같아서 일기를 통째로 날려버리고, 고등학생 시절에 쓴 일기는 그 자신이 보지 못하게 하고 싶어서 찢어버렸다고 한다.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일만 기억하고 싶다는 바람, 이게 가능할까?


세라 망구스는 전날과 비교해 달라진 점을 일기에 기록해 두었는데, 만약 달라지지 않은 점만 기록한다면 어떨지 궁금해 한다. 나도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 곰곰 생각해보니 그날이 그날같아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면 꽤 시간이 지난 뒤에는 무엇이 반복되고 있는지 모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말처럼 어쩌면 달라지지 않는 점을 기록하는 것이 더 진실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ㅡ 


저자는 유독 기억에 집착한다.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재미있는 에피소드 정도로 남게 될테지만, 어쩐지 본인에게는 씁쓸함으로 남을 것 같다. 어느 때부터인가 점점 기억해야할 것들을 놓치고 두통이 잦아져서 2주 전에 건강검진할 때 뇌 MRI(MRA)를 했는데, 내 뇌(혈관)의 나이는 실제 나이보다 10년도 넘게 젊다는 결과가 나왔다. 다행이군. 그런데 기억력은 왜...? 세포의 문제인가?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최초의 기억은 무엇일까? 잘 모르겠다. 여섯 살 이전의 기억은 파편적으로 혹은 단편적으로 떠올려지는데, 그때가 정확히 몇 살 때인지는 대체로 확실하지 않다. 이는 중학교 시절도 마찬가지. 인간의 뇌와 그 뇌에 저장된 기억의 세계는 오묘할 따름이다. 



사실 일기를 쓴다고 해서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다. 만약 일기를 솔직하게 기록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기억은 충분히 왜곡될 수 있다. 그 기록이 거짓이라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할테니 말이다. 


저자는 출산과 양육의 경험을 통해, 그리고 자신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아이를 통해 비로소 망각의 효용성을 깨닫는다. 그런데 우리의 뇌가 창고에 남겨놓는 기억의 기준은 무엇일까? 난 이것이 늘 궁금하다.  



책을 덮고, 늘상 일어나는 일들 혹은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일상, 그리고 가족과 기억에 대해 생각하다가 나는 그동안(미취학 아동이었던 시절부터) 써왔던 일기를 찾아 읽은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물론 찾아야할 기록이 있다던가, 갑자기 떠오르는 추억팔이로 아주 가끔 뒤적거린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많은 분량과 세월을 따져봤을 때 시쳇말로 일기는 가성비가 현저히 떨어지는 글쓰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왜 이렇게 열심히 일기를 쓰는 걸까?  


세라 망구스는 일기 쓰기에 있어서 '쓰는 행위' 자체,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말한다. 어쩌면 무목적성의 글쓰기야말로 진정한 글쓰기의 이유일지도 모를 일이다.   



일기에 멋을 부려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영화 <메멘토>가 머릿속을 휙 지나간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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