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샤 페이지터너스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지음, 정영문 옮김 / 빛소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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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모든 사물과 인간의 본성은 동기와 언어로써 표현될 수 있다고 한 것은 누구인가? 나는 오랫동안 문학이 단지 사실을 묘사하거나, 또는 인물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게 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설 속의 모든 동기는 분명하거나 잘못된 것이다.  


이 책을 거의 다 읽어갈 무렵부터 든 의문은 '이 책의 제목이 왜 쇼샤일까?'였다. 사실 쇼샤는 작 중 인물들 중에서 그다지 중요하게 위치하지 않는다. 주인공 아론 그라이딩거(아렐레)가 갖는 선택적 갈등의 한 축일 뿐이다. 쇼샤는 아렐레와 비슷한 또래로 어릴 때부터 학습부진아였고 삼십대가 되도록 지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여전히 미숙한 여성이다.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과 아렐레에 대한 지순한 사랑을 지켜왔기 때문에 작가는 이 여성의 이름을 제목으로 택한 것인가?   








율법에 따라 성장한 유대인 청년은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율법에 어긋나는 많은 것들을 경험한다. 시온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책을 비롯해 금기시했던 책들을 탐독했고, 혁명에 따른 새로운 이념과 개념들을 닥치는대로 받아들였다. 그 시간 동안 유년 시절을 함께 했던 많은 소년들이 전쟁터에서 죽었고, 그의 고향은 온갖 이념들로 뒤섞였다. 글을 쓰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아렐레는 이십 대에 이미 자신이 노인이 된 것처럼 느꼈다.  


물이 흐르듯 청년이 삼십 대가 되어가는 동안 히틀러는 빠른 속도로 독일의 통치자가 되어 영향력을 확장했고, 러시아에서는 숙청을, 폴란드에서는 군부 독재가 시작됐으며, 미국에서는 이미 이민 할당제를 시작했다. 아렐레는 물리적으로 꼼짝 못하게 되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언어와 문화 속에 갇혀버렸다. 아렐레의 이삽십대를 지켜보자면 그가 정서적으로 사면초가에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종교적으로도, 작가로서도, 경제적으로도. 그래서 히틀러의 학살이 점점 다가오는 상황에서도 쇼샤와의 동반 죽음 외에는 그 어떤 다른 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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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 도라, 아렐레 미래의 성공의 열쇠를 쥐고 있는 베티, 그의 육체적 갈망을 채워준 테클라, 모성애같은 사랑으로 청년을 보호해준 셀리아. 그들과 육체적 사랑을 나누면서 근원을 알 수 없는 갈망을 순간순간 해소한 아렐레는 행복에 대해 자문하지만 어떤 대답도 찾지 못했다.  


도라는 세상을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들고자 혁명을 했고, 베티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역할을 필요로 했고, 셀리아는 감각과 전율을 추구했고, 테클라는 그저 제 할 일을 함으로써 뭔가를 원하기 보다 주고자 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늘 받는 것에 익숙한 사랑을 했던 아렐레가 선택한 여자는 백치에 가까운 쇼샤다. 마치 이십 년 세월을 건너 뛴 듯 한결같이 아렐레의 곁에 있었던 것처럼 너무나 말끔한 모습으로 너를 기다려왔다고, 네가 없는 동안에도 너를 사랑했다고 말하는 그녀. 아렐레가 앞선 여성들의 피보호자 입장이었다면, 쇼샤에게는 완전한 보호자 역할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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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소설을 읽으면서도 아렐레가 쇼샤를 선택한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다. 외관상으로 보이는 지적.육체적인 미숙함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을 하지만 독자인 나에게는 그의 사랑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쇼샤와의 재회가 마치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던 그에게 운명적 사랑이며 이것이 곧 자신의 미래인 것처럼 얘기하지만 나에게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었다. 이는 앞서 맨 처음 가졌던 의문에 닿아있다. 왜 쇼샤인가? 


재회 후 추억과 감정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보듬는 두 사람. 그런에 이들은 늘 삶이 아닌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들은 자기의 죽음에 서로를 동반자로 삼으려고 한다. 쇼샤는 죽을 거면 자기를 데려가라고 하고, 아렐레는 자기의 죽음에 데려가겠다고 한다. 이것이 과연 이십 년 만에 만나 격하게 사랑을 고백하는 연인이 나눌만한 대화인가? 아렐레는 혼란스럽고 엉망진창인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 즉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죽음 외에는 벗어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뇌는 아렐레만의 것은 아닐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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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작가의 서술에서보다 등장인물의 대화에 핵심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파이텔존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실패하는 이유는 부패하기 때문이고 그로인해 인간은 우상숭배를 하며 각기 다른 형태의 신을 창조하기 마련인데, 유대인만이 영원한 신을 믿음으로써 세계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엘빙거의 말을 통해 당시 유대인의 사회적 위치와 그들이 자부하는 민족성과는 별개로 아웃사이더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불안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도라와 베티의 짧은 대립을 통해 볼 수 있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까지.  


트로츠키주의, 스탈린주의, 시온주의, 유대인동맹, 수정주의 등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아렐레는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알 수가 없다. '세상은 너무도 많은 신비로 가득 차 있다'는 어머니의 말은 그에게 어떤 위안도 주지 못한다. 수용소에서 참혹하게 죽어가는 유대인들과 이념 때문에 죽어가는 젊은이들, 그리고 백치라고 무시당하는 쇼샤. 신은 이토록 약한 자들을 버려둔 채 어디에 있는 것일까. 


쇼샤와 결혼함으로써 아렐레는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조롱의 대상이 된다. 그는 자신이 내린 결정이 그가 내린 것이 아니라 자신을 대신한, 어떤 알지 못하는 힘에 의한 것이라고 느끼는데, 아마도 우리는 이처럼 후회, 무책임, 회피 앞에서 운명이라는 핑계를 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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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연달아 두 번이나 읽은 이 소설이 전혀 '순수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고 읽혀지지 않는다.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처절하게 인간다운 삶을 갈구하는 한 청년의 몸무림이자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유대인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자본자의자들에게도 파시스트에게도 속하지 못하고 있다는 베티의 말처럼 어딘가에 발을 딛지 못하고 부유하는 삶이 얼마나 많은가.  


아렐레는 스탈린과 히틀러같은 압제자만이 인류의 비극에 기여하는 것은 아니라고 얘기한다. 대중의 다수가 살인과 약탈, 강간을 저지르고 있으며,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명망있는 지도자들 역시 각자의 명분으로 이러한 범죄를 정당화하고 있음을 일갈한다. 즉 쇼샤를 백치라고 비웃고 손가락질하며 모욕을 주는 대다수의 사람들 역시 그러한 압제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얘기하면서 동시에 도라를 통해 인간은 어떤 희생도 무마할 수 있는 '대의'라는 명분으로 얼마든지 이율배반적인 존재임을 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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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돌아가서 나 스스로에게 던진 의문에 대해 내가 찾은 답은 등장인물들의 대화와 이를 관조하는 아렐레의 시선에 있었다. 사상과 이념, 이상과 현실, 선과 악, 지배자와 피지배자, 독재와 혁명, 자유와 억압 등을 놓고 대립하는 인물들을 회의와 허무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아렐레가 추구하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아닌 본질적인 순수이며, 인간이 가진 기쁨과 사랑과 슬픔과 두려움과 불안을 거짓과 가식 없이 그대로 드러내는 쇼샤에게 투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정리한다.


유대인을 비롯한 인류에게 가해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잔혹하고 비극적인 고통은 왜 있어야 할까? 지금 이 시각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동안 신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살아남은 아렐레,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여전히 그 해답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신은 무엇으로 존재하는지. 그리고 인간은 무엇으로 존재하려고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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