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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워진 빈 자리
스테판 주글라 지음, 김혜경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내가, 나 아닌 다른사람으로 살아갈수 있다면.... 어느날 갑자기 다른 사람의 인생속으로 무임승차를
하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이 책에는 어느날 우연히 다른 여자의 행세를 하게 된 마리라는 여성이 점점 그 여자의 삶속에 융화되어 가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의 심리상태가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시종일관 꿈속을 걷고 있는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가 매우 인상적인
작품.
부동산 중개업자인 마리는 어느 날 견적을 내기 위해 의뢰인인 마들렌의 집을 방문한다. 주인 마들렌은
부재중. 이 집의 분위기는 어쩐지 마리에게 낯설지 않다. 그 익숙함이 마리로 하여금 아무 저항없이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먹고 여주인의 침대
위에서 잠을 자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마리는 자기도 모르게 아침까지 잠이 든다. 다음날 마리는 테오라는 남자에게서 전화를 받으면서
순간적으로 마들렌인양 행세를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마들렌 행세. 방문한 주인의 친구들까지 속여넘긴 마리는 자신이 마들렌 역을 훌륭히
해내고 있다는 데에 자신감을 얻고 노골적으로 그녀의 흉내를 내기 시작한다. 심지어는 마들렌의 남편인 테오조차도 마리가 자신의 아내가 아니라는
의심을 전혀 갖지 않는다. 마리는 점차 마들렌이 되어간다. 그렇게 점점 마들렌이라는 여성이 차지하고 있던 모든 공간과 시간속으로 녹아들어 가던
마리는 마침내 마들렌의 삶 전체를 모두 차지하기에 이른다.
길지 않은 줄거리에 실로 간단한 구성이다. 이렇다할 사건이 등장하는것도 아니고 줄곧 마리의, 그리고
마들렌으로서의 마리의 심리상태의 연속이다. 이 독특한 소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 책은 마치 누군가의 꿈속을 들여다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아니 이건 꿈이 맞다. 욕구와 욕망, 혹은 광기 같은 것들이 표출된 꿈. 누구라도 분명 꾸어봤음직한, 꾸어봤을 그런 꿈. 당연히 신분이
들통나야 할 여러차례의 위기상황을 맞이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모든 상황은 너무나 간단하게 마리의 바램대로 흘러간다. 마리가 원하는 것들,
소망하는 것들이 별다른 장애없이 너무나 쉽게 이루어 진다. 그렇다고 통쾌하고 짜릿한 기분을 선사하는가 하면 그건 아니다. 어쩐지 기분나쁜 꿈
특유의 질척질척함과 몽환적이라는 표현밖에는 달리 할 표현이 없는 안개로 가득한 느낌. 아무튼 이 책의 분위기는 독보적인 것이다. 그저 담담히
묘사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현실도 아니다. 굳이 해석이 필요한 것일까. 아이러니한 표현이지만 꿈의 묘사라는 점에서는 이보다 사실적일 수는 없을 것
같다. 살바도르 달리의 꿈을 그린 그림들처럼, 책을 덮고 난 뒤에도 환상적이고도 기괴한 분위기가 오랫동안 여운을 남기는 묘한 아름다움이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