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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집 맏아들 - 대한민국 경제정의를 말하다
유진수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2년 1월
평점 :
누구하나 명쾌하게 설명해 주는 사람 없이 오랫동안 끌어안고 있던 철학적인 물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준 책이다. 성공한 기업에 도덕적 의무가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만큼의 도덕적 의무를 갖는가?
최근의 재벌기업들의 골목상권 진출을 두고 말들이 많다. 더불어서 기업들이 얼마나 사회적 의무를 다하고 있느냐에도 부쩍 관심이 많아졌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많은 기업들이 사회환원에는 한없이 야박한 모습이다. 기업의 목표수익 초과액에 대해서 일정금액을 중소기업에 지원하자는 동반성장 위원회의 제안을 전경련이 거부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여러 매체를 통해 대기업들의 성장배경과 디테일한 행태까지 듣고나니 이들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특혜를 받아왔으며 왜 분개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사회정의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마이클 센델 교수'는 자신의 저서인 <왜 도덕인가?>에서 도덕성이 살아야 정의가 산다는 점을 강조한다. 궁극적인 목적이 정의라면 그것을 위해서는 반드시 도덕적인 의식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한편, 공리주의와 자유주의는 장단점이 있고 이 중간에서 융통성을 발휘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이것들은 틀림없이 수긍이 가는 논리지만, 무언가 손에 잡히는 해답을 얻기를 바라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역시 원론적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이책에서는 이것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맏아들의 이야기를 비유로 들어 설명한다. 가난한 부모는 전재산을 올인해 맏아들을 뒷바라지 한다. 맏아들은 부모의 기대대로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로 성공하지만, 대신에 남아있는 형제들은 기회를 얻지 못한채 도태되고 만다. 이럴때 가족에 대한 맏아들의 도덕적 의무를 따져보자는 것이다. 공리주의와 롤스의 주장을 적용했을 경우에 각각 달라지는 상황을 비교하면서 말이다. 철학적이던 그 개념을 명쾌하게(명쾌하다고 해서 해답은 아니지만), 그리고 어떤 식으로 우리가 이 문제에 접근하고 이해해야 하는지를 알기 쉽게 풀어낸다.
우리나라 정부가 특정 기업들에만 특혜를 주었다면 이 특혜를 받아 성장한 기업은 우리 사회에 어떠한 도덕적 의무를 지는가?
성공한 기업들은 사회구성원에 대해 기본적인 도덕적 의무를 가진다. 기업과 부자들은 자신들의 성공과정에서 암묵적인 비용을 지불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보상을 해야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다면 법적으로 명시되어 있지도 않은 액수를 어떻게 산정해야 한다는 말인가 하는 물음이 남는데, 이책에서 제시하는 그 가치 계산방식은 적절한 도덕적 의무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준다는 데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불합리함을 주장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 명분을 알아채게 되었다고나 할까.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방법에 있어서 한단계 더 눈을 떴다고나 할까.
이것은 비단 성공한 일부 재벌들에게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이들 기업들을 성공한 맏아들이라고 한다면, 실패한 맏아들이나, 형제들의 밥그릇을 강제로 빼앗아서 성공한 나쁜 맏아들도 존재한다. 이들 역시 동일하거나 더 커다란 도덕적 의무와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재벌기업들 뿐만 아니라, 실패한 기업, 땅투기 등으로 큰돈을 번 부자들, 특히 식민지 지배로 우리민족에게 크나큰 상처를 준 일본의 경우에 대해서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유무상 차관을 합하여 5억달러라는 금액을 보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게는 여전히 큰 도덕적 의무가 남아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미국의 경우로 눈을 돌려보면, 서브프라임 론 사태와 같은 일련의 금융위기를 유발한 부실기업들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그 돈으로 돈잔치를 하는 황당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저자는 책 말미에 '실패를 비난하는게 아니라 성공의 열매는 나누려 하지 않고 실패의 쓴잔은 떠넘기려 하는 일부 기업인들의 행태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쓴소리를 빼놓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책이 답답함이나 암담함 보다는 전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부자들에 대한 비난이나 우리 사회의 편가르기가 아니라, 공정하고 모두가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따뜻한 시선을 견지하는 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