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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보이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7-1 ㅣ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7
앤드루 테일러 지음, 박아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소년 시절의 '에드거 앨런 포'가 등장하는 역사 미스터리를 읽었습니다. '워털루 전투' 에서 살아 돌아온 한 청년이 어느 기숙 학교에 교사로 취직해서 소년 에드거와 그의 친구를 가르치게 되고, 이로 인해 영국 사교계의 큰손인 '프랜트 가'와 가깝게 지내면서 사건에 말려 들어가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진중하고 차분하게 읽히는 타입이라 이야기의 흐름은 다소 완만하지만, 19 세기 초엽의 영국 사회의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는데다 플롯도 훌륭해서, 과연 'CWA 히스토리컬 대거 상' 수상작, 기대에 부합하는 수작이었습니다.
런던의 한 건설현장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납니다. 사체의 왼손 집게 손가락의 일부가 없는 것으로 보아 죽은 사람은 프렌트 가의 수장인 '헨리 프랜트'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렇다할 단서는 발견되지 않고, 과연 사체의 주인은 헨리 프랜트인가? 혹시 재정적으로 몰락해 죽음을 가장하고 도피한 것은 아닌가? 소년 에드거의 친부임을 주장하는 수상한 자가 이 사건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연달아 떠오릅니다. 헨리의 사체가 발견된 이후에도 프랜트가 내부의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 금전적인 문제 등의 비밀들이 계속해서 드러납니다. 런던의 뒷골목에서부터 시골마을의 저택, 덫이 설치된 귀족의 영지, 얼음창고 등 수상한 무대들도 차곡차곡 준비되어 있어서 흡입력 있는 이야기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일단, 소년 에드거 앨런을 내세워 호객행위를 하고 있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엄연히 청년 '토머스 쉴드'입니다. 쉴드는 과거에 몇차례인가 순간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폭발한 적이 있습니다. 이로인해 정신병자 취급을 받고 신뢰할 수 없는 젊은이로 낙인찍혀 버렸지만, 숙모의 추천을 받아 간신히 일자리를 얻게 된 후에는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고 매사에 행동거지를 조심합니다. 실은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처럼도 보입니다. 이 청년의 눈을 통해 지켜보는 사건의 전말과 함께, 소설 속 어느 등장인물의 "부는 존경으로 향하는 일종의 통행증"이라는 대사의 뉘앙스처럼, 부와 권력을 추구하며 살던 이들이 어떻게 흥하고 어떻게 몰락하는지, 탐욕과 부로 쌓아올린 귀족사회의 허상이 그려집니다.
각각의 등장인물들은 개성이 뚜렷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인공인 쉴드가 동경하게 되는 두 여성, 아름다운 프랜트가의 젊은 미망인과 커스월가의 사생아인 아가씨의 매력이 상당합니다.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여성과 톡톡튀는 사랑스러운 여성, 서로 다른 타입의 두 귀족 여성이 대비되면서 이들과의 시츄에이션이라던가 주인공의 마음의 동요가 또한 볼거리입니다. 묘하게 로맨스 심리를 자극하는 이런 요소가 의외로 사건의 향방만큼이나 마음을 끕니다. 그러고보면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한편의 드라마로서 읽는 방법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소설의 또 하나의 주인공은 에드거도 쉴드도 아닌 19세기 초의 영국이라는 시대배경 그 자체입니다. 당시의 거리의 모습이나 생활상 뿐만 아니라, 귀족, 서민, 노예, 자유노예, 혹은 남녀간의 신분에 따른 가치관과 살아가는 방식, 군인들의 발언권이 높았던 시대상 등,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서 그 분위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저택의 피고용인들 끼리의 몰래연애 라던가, 말똥이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거리의 풍경, 숙녀의 드레스 끝자락이 흙바닥을 쓸고 다니는 광경 등, 많은 것을 체감해 볼 수 있습니다. 19세기 영국 마니아라면 놓칠수 없는 작품입니다. 역사물로서도 추리소설로서도, 또한 드라마로서도 즐길 수 있는 포인트가 다양합니다. 다만, 후딱후딱 사건의 진상부터 알고 싶은 성질 급한 독자라면 시종 진중한 분위기의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풀 컨디션으로 견뎌내기는 조금 버거울수도 있겠습니다.
저자 '앤드루 테일러'는, 2009년에 영국 추리 작가 협회(CWA)가 추리소설 발전에 공적이 있는 작가에게 수여하는 '다이아몬드 대거상'을 수상했습니다. 데뷔작인 <Caroline Minuscule>로 '존 크리시상(신인상)'외에, 두 번에 걸쳐 '엘리스 피터스 히스토리컬 대거상(역사 미스터리상)'을 수상한 거장이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이 <아메리칸 보이> 이전에는 작품이 소개된 적이 없는 관계로 아직 그 지명도는 미비, 소년시대의 '포'가 등장하는 이 역사 미스터리가 앞으로 앤드루 테일러라는 작가의 대표작들을 줄줄이 읽어볼수 있게 되는 단초가 되어주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