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리에이 베소스'는 북유럽 문학을 얘기할때 빼놓을 수 없는 노르웨이의 국민작가라고 한다. 저자의 다른 소설인 <마티스>를 읽었을때는 확실히 굉장히 문학적이고, 그 한폭의 유채화같은 풍경하며 서정적인 이야기에서 북유럽의 깊은 정서가 느껴진다는 인상을 받았었다. 어디까지나 북유럽 사람이 아닌 독자의 주관적인 인상이긴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책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알고보니 <마티스>나, 이 <얼음성>이 나온 '살림 Friend'는 청소년 향의 소설을 지향하는 브랜드였던 것 같다. 마티스를 떠올려 보면 다소 의외지만, 얼음성은 틀림없이 그 나이 또래의 헤아리기 힘든 특유의 감수성을 활자가 아니라 그대로 그림으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소설이었다. 친구들에게 인기 많은 리더십 작살의 열한살 소녀 '시스'가 있는 반에, '운'이라는 신비한 분위기가 감도는 소녀가 전학 온다. 시스와 운은 첫눈에 서로에게 이끌리지만, 좀처럼 친구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운의 까다로운 성격 때문에 다같이 어울리지 못하고 멀찍이서만 교감하며 우정을 쌓는다. 어느날 시스는 이모님과 단둘이 살고 있다는 '운'의 집에 초대받아 놀러간다. 설레이는 시스. 그런데 운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무언가 비밀이야기를 꺼내려 한다. 긴장된 분위기를 견딜 수 없어 시스는 도망치듯 집으로 후퇴한다. 그리고 다음날 운은 학교에 오지 않는다. 온 마을 사람들이 운을 찾아 헤매지만 운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 시기의 예민한 감수성은, 한때 그 나이였던 어른들도 그 시기가 지나고 난 뒤에는 이미 헤아리기 힘들다. 시스가 느끼던 막연한 두려움의 원천은 무엇인지, 운이 결석을 하면서까지 시스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인지. 눈으로 보여지는 사건의 전개만을 통해서는 알기 힘들다. 운과 시스의 사이에 감도는 그 미묘한 감정의 기류를 읽어내야만 하는데 성인 독자의 고체화된 감수성으로는 힘든 일일지도 모르겠다. <얼음성>은 어쩌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해야 하는 소설이다. 그리고 이 소설의 대사 하나하나, 사물 하나하나가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읽어내는 데는 시스와 운을 이해할 수 있는 또래의 아이들이 적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서 그리고 있는 이야기가 곧 그네들의 감수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얼음성은 떨어지는 폭포가 그대로 얼어붙어 만들어진 순수한 자연의 힘에 의한 공간이다. 운이 걸어 들어 간 그 얼음성 앞에서 마을 사람들은 속수무책이다. 자연의 웅장함 앞에 서면 인간은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 감정 하나하나까지도 대자연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게 된다.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느낀다. 그렇지만 거기에 주눅들어서는 아무것도 나아가지 않는다. 언제까지고 주저앉아 있을수는 없다. 시스는 결국 돌아온다. 딛고 일어선다. 그렇게 아이는 성장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