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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놀 천사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며칠전에 본 티비 오락프로그램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세상을 바꾸는 퀴즈', 이름하야 <세바퀴>라는 프로그램에 아이돌 그룹 '슈퍼 주니어'의 한 멤버가 출연하면서 색소폰을 들고 나왔다. 한 중견 기업의 대표이사라는 그의 아버지가 취미생활로 색소폰을 불어보고 싶다고 해서 자신이 선물해 드렸다는 것. 그것을 방송출연을 위해 빌려나왔다고 했다. 그때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개그우먼 '조혜련'이, "우리 아버지는 색소폰 대신에 병나발을 부셨다"는 조크를 던진다. 웃자고한 이야기였고, 실제로 모든 출연자들이 이 한마디에 자지러질듯 웃어댔다. 그런데 한동안 같이 웃던 조혜련이 갑자기, 우리 아버지는 돌아가실때까지 병나발 불고 계셨다면서 감정이 북받혔는지 정말로 울기 시작한 것이다.
"목구멍까지 치미는 또다른 말을 행여 한마디라도 입밖에 냈다가는 울어버릴게 틀림없다. 그래서 히로시는 여름방학이 끝나던 날 에비스 역 개표구에서 했던 대로 계속 "안녕"이라는 말만 했다."
-두번째 단편, <차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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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묘하게 배치된 저녁놀이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아름다운 표지. 좋은 소설을 읽었다. 말못할 사연이 있는 듯한 수수께끼의 아가씨가, 일하던 식당에서 어느날 훌쩍 사라지는 표제작을 시작으로,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할아버지와 단 둘이 살게 된 '히로시'가 친한 이웃 누나와 안타까운 이별을 하는 <차표> 등, 모두 6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표제작인 <저녁놀 천사>는, 도쿄 변두리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페이소스를 그려내고 있다. 어느날 갑자기 식당에 나타나 이들 부자와 함께 살게된 정체불명의 젊은 여자. 부자의 배려로 식당에서 착실하게 일을하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나타날 때처럼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녀에게 깊이 정이 들어버린 부자는 이내 상심하고 만다. 그리고 일년 후, 난데없이 경찰에게서 한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그리고 찾아온 씁쓸한 재회... 누군가를 너무나 그리워 하면서도 그 그리움조차 마음대로 드러낼 수 없는 무기력한 안타까움이 인상적이었다. 같은 여자와의 서로 다른 기억을 두고 생면부지의 두 남성이 자전거 한대를 같이 타고 달리면서 몰래 울고 있는 대목은 정말이지 두고두고 기억될만한 명장면이다.
눈물 나는 이야기의 대명사인 '아사다 지로'인 만큼 이번에도 같은 노선이다. 그시절 그무렵의 평범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저자의 자서전적인 이야기도 포함해서 대체로 궁핍하던 그 시절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작품이 많다. 평범한 사람들의 인생 어느 한장면을 '아사다 지로'가 쓰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가슴이 짠하다. 그것 뿐인데 눈물이 날 것 같다. 아사다 지로는 장편도 두말할 나위 없이 훌륭하지만, 짧은 이야기 안에 인생의 깊이가 농축되어 있는 단편도 놓치기 아까운 주옥같은 것들이 많다. 그러고보면 유명한 <철도원>도 단편이었다.
아사다지로의 소설이 가슴을 짠하게 만드는 이유는, 시간의 흐름속에 묻혀버린, 혹은 애써잊고 지내던 감정을 되살아 나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개그우먼 조혜련에게 있어서 '병나발'이라는 단어가(이 뉘앙스는 저자에게 실례인 것 같지만) 그랬듯이, 아사다 지로의 소설은 독자가 살아 오면서 지나쳐 왔던 수많은 시간대를 다시금 연결해주는 매개가 되어준다. 좋은 이야기는 시간을 잊게 한다. 그 감동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기쁨을 가져다 준다.
쉴세없이 변화하는 세상이지만, 문득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저녁놀은 그때 그 벅찬 광경 그대로다. 지금 읽고 있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지만 저자가 보여주는 그 감정만은 붉게 물든 저녁놀처럼 너무나 보편적이고 친숙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그리움이든, 기어코 그때 그 시절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고야 만다.
언제고 추억을 다시 꺼내볼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다시 살아가라는 격려가 되어준다. 이것이야말로 소설의 묘미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