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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처에게 바치는 레퀴엠
아카가와 지로 지음, 오근영 옮김 / 살림 / 2010년 7월
평점 :
꽤 오래전에, 베스트셀러 제조기라 불리던 '아카가와 지로'의 매력에 빠져서 저자의 책을 닥치는대로 모은 적이 있었다. 근데 한 두권이 아니라 한번에 다섯권, 열권씩 묶음으로 사들이는데도 감당이 안되서 곧 관두었다. 절판된 책이라도 손에 넣으면 텀블링이라도 하고 싶어질만큼 공들여 모았었는데, 발표한 작품이 몇백편이나 되는 외국작가의 책을 체계적으로 모으기가 쉽지 않더라. 이미 손에 넣은책인데도, 있는지 없는지 헷갈려서 또 구하기도 하고 목록까지 작성해가면서 관리했지만 결국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정작 모으는데에다 에너지를 다 쏟고, 읽은 건 한 서른권 남짓?
아무리 읽어도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화수분같은 작가.
내가 아카가와 지로라는 작가에게 가지고 있는 인상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일본 미스터리소설 붐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소개되는 작가가 바로 아카가와 지로일 거라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잠잠하더니 이제서야 본격적으로 소개되려는 모양새다.
이 책은 저자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악처에게 바치는 레퀴엠>이라는 제목의 소설이다.
공동으로 소설을 집필하는 4명의 남자가, 각각 아내와의 관계에 이런저런 문제를 떠안고 있는 와중에, '아내를 죽이는 방법'이라는 주제로 소설을 써보기로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네 남자가 써내려가는 각각의 이야기가 현실과 오버랩 되어 간다는 내용.
큰 줄거리는 하나지만 출신성분이 제각각인 네 남자가 써내는 각각의 스토리는 저마다 개성이 있어서 마치 옴니버스 소설처럼 모듬요리를 즐기고 있는 기분이 난다.
1984년에는 베스트셀러 1위에서 4위까지를 모두 자신의 작품으로 채운 적도 있는 베스트 셀러 작가지만, 아카가와 지로의 소설은 어느 쪽이냐 하면 오히려 가벼운 편에 속한다. 그래서 술술 잘도 읽힌다. 작가가 되기 전에는 드라마 작가 수업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때문인지 발단 전개 절정 결말 반전까지 잘 짜여진 플롯으로 마치 티비 드라마의 대본을 보는 기분으로 읽어내려가게 한다. 또 하나의 특징은 남성작가이면서도 드라마의 주 시청자인 여성, 특히 막 결혼한 젊은 주부들의 심리에 어필할만한 이야기가 많다는 점이다.(개인적인 생각이다) 아마 그런 것들이 저자를 베스트 셀러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나잇살이 많이 붙어 중후한 모습이지만, 젊었을 때는 호리호리하고 잘생긴 미남 작가이기도 했다.
추리 코미디 공포 온갖 장르 가리지 않는 아카가와 지로지만, 정말 그중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어느 이야기에도 유머가 빠지지 않는다는 점.
작품에 따라서 유머의 농도가 어느정도냐 하는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인물들이 엉뚱하고 천연덕 스러운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아카가와 지로의 아직 번역되지 않은 것중에 <맑음, 때때로 살인>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다. 이 제목에서 느껴지는 뉘앙스가 바로 아카가와 지로 소설의 이미지 그대로라고 생각한다. 살인을 그저 오늘의 날씨와 동격 정도로 취급하는,
심각한 것을 대수롭지 않게... 라기보다는 심각하긴 한데 뭔가 조금 핀트가 어긋난듯한...
예를 들자면,
나 오늘 일찍 집에 들어가 봐야 돼.
어머 왜?
아침에 남편을 죽이고 그냥 나왔는데, 내일 손님이 온다고 해서 다른데로 옮겨둬야 할 것 같아.
저런 많이 힘들겠구나?
이런 대화의 느낌?
귀엽기도 하고 경쾌하기도 하고 또 어떤 작품에서는 그렇지만 기막히게 감동적이기도 하고, 다재다능한 센스를 지닌 작가다. 이제는 전성기가 지나 예전같은 모습은 기대하기 힘들겠지만...
여하튼 무엇부터 손댈까 고민하지 않고 깔끔하게 대표작 중 하나인 이책을 선택할 수 있는 지금이 바로 아카가와 지로를 접해보려는 사람에게는 적기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