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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화를 그리는 화가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김수진 옮김 / 시공사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는『뒤마클럽』, 『알라트리스테 시리즈』 등으로 잘 알려진, 미스터리, 역사, 모험 소설 작가지만, 최근작 『전쟁화를 그리는 화가』는 일단 넓은 범주에서는 미스터리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 맛은 거의 순수 문학이다. 차분하게 그려넣어진 세계는 결코 설렁설렁 읽을 만한 것이 아니고, 독자의 문학관이나 가치관을 시험하는 듯한 중후함이 있다. 게다가 주요인물은 왠걸, 고작 세 명. 그런데도 지루하거나 어렵지 않게 잘 읽히기 때문에 대단한.
전직 카메라맨이었던 화가 ‘파울케스’가 지중해가 보이는 망루에서 전쟁화를 그리는데 몰입하고 있으면, 한 남자가 나타나 10년전의 구 유고 분쟁 중에 찍은 한 장의 사진을 화제에 올린다. 파울케스에게는 카메라맨으로서의 명성을 가져다 준 사진이지만, 사진의 주인공, 크로아티아 민병대 소속이던 남자 ‘마르코비츠’에게는 고문과 비극을 연쇄적으로 몰고왔다. 남자가 찾아온 목적은 파울케스를 죽이기 위해서.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증오하고 있는지, 과연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두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그 진상이 떠오른다. 거기에 가로놓여 있는 것이 파울케스의 연인이었던 ‘올비도로’.
파울케스는 그녀와의 3년간의 생활을 회상하면서 천천히 수수께끼의 핵심, 과거의 어느 시점을 향해 다가간다.
놀라운 것은 전쟁과 관련한 고찰이다. 레베르테 자신, 전쟁 기자로서 21년 경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그 전쟁론은 극히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저자는 소설속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예전에 누군가가 솜씨좋은 사진가라면 어떤 대상이든 잘 찍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는데, 파울케스가 보기에 그는 전장에 한번도 나가보지 않은 사람이 틀림없었다. 위험성과 죄책감 같은 것은 도저히 사진 속에 담아낼 수가 없었다. 두개골을 관통하는 총알 소리도, 총검으로 임신한 여자의 태아를 끄집어내 여안인지 남아인지 맞추는 내기에서 이겨 담배 일곱개비를 차지한 남자가 신이나서 웃어대는 소리도 담아낼수 없었다. _ 온통 먼지로 뒤덮인 시신의 처연한 고독. 그 누구도 나서서 시신의 먼지를 털어주지 않는다.”
비참하고 냉혹하고, 잔혹한 지성과 광기에 물들여진 전쟁의 현실을 담담히 이야기 해 나간다. 그것들이 연결되서 한 장의 그림으로 그려져 가는 과정에는 비할 데 없는 긴장감이 감돈다. 카메라맨과 피사체, 살인자와 피해자라는 대칭적인 관계에 놓여있는 두 남자에 의해 그려지는 전쟁의 구조와 여러가지 사정들. 그것들이 다시 다양한 선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이야기의 마지막에 밝혀지는 진실의 잔혹함은 한층 더 두드러진다.
그런 추상적인 재미를 제외해도, 이 책에는 전장에서 죽이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을 눈앞에 두고 셔터를 누르는 행위의 의의에 대한 지극히 흥미로운 사색으로 가득 차 있다. 촬영자와 피사체의 관계, 나아가서는 현실과 픽션의 관계, 지식과 감정의 끝에 있어야 할 것을 보여주는 작품으로서는 더 이상의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든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멋진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