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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큐에게 물어라
야마모토 겐이치 지음, 권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녹차 한잔 생각이 간절해져서 물을 끓였던 것 같은데 어찌 된 일인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 마저도 한 두 모금 홀짝거린 뒤에는 읽고 있던 책 위에 몽땅 엎어버렸으니... 졸지에 봉변을 당한 것은 <야마모토 겐이치>」의 『리큐에게 물어라』라는 제목의 책.
<텐도 아라타>의 『애도하는 사람』과 함께 「140회 나오키상」을 공동 수상한 작품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미’를 두고 결코 타협하지 않고 그것을 위해라면 목숨을 버릴 수도 있는,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의해 할복한,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센 리큐>는 일본 전국시대 다도의 명인이자, ‘풍신수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두를 맡았던 인물이라고 한다. 그 직책상 역사에 전면에 부각되거나, 후대에 전해지는 일대기가 풍부하게 남아있는 인물은 아니지만, ‘다도’라는 소재를 중심에 두고 저자의 상상력의 살을 덧 입혀서 만들어낸 ‘리큐’는 극히 예술적이고 누구도 넘볼수 없는 천재의 고고함을 지닌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져 있다. 그 ‘리큐’의 생애를 할복 직후부터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가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서 진정한 예인으로, 아름다움의 정점에 올라서는 과정을 전 생애에 걸쳐 보여주는 변칙적인 구성이 우선 눈에 띈다.
무릎이 맞닿을 정도로 좁은 다실 안에 다 큰 어른들이 들어앉아 조용히 차를 나누어 마시는 답답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도, 머릿속으로는 활자로는 쓰여져 있지 않은 장대한 그림이 그려진다. 한없이 정적인 이야기 속에서 터질것 같은 역동감이 느껴지니 이상하다. 마치, 고요한 듯 보이지만 물밑에서는 쉴세없이 물을 차고 있는 고니의 모습이다. 한송이 무궁화가 백마디 말을 대신하는가 하면, 다완속에 잔잔하게 담겨있는 차 이야기를 한두마디 주고 받는 것 만으로 천하를 논하기도 한다. 다도의 그 정적인 ‘미’로 ‘리큐’를 비롯한 역사속 인물들의 성정을 표현해내는 방법이 인상적이다.
내내 신경이 쓰였던 것은 조선이라는 나라는, 이런 ‘아름다움’을 스스로 내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 권력다툼의 희생자가 되어 일본으로 팔려온 조선여인의 빛나는 기품이나, 조선의 막사발이 일본의 국보가 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미’의 우월함으로 연결지어서 으쓱해야 할지, 옆에 두고서도 소중함을 모르는 무지함을 한탄해야 할지, 어쩌면 그저 안목의 차이 일지도 모르겠지만...
왜인들의 눈에 두 파로 나뉘어져 집안싸움을 하는 민족으로 비쳐지는 것 역시 정말로 안타까운 대목이지만, 그렇다고 저자가 조선에 대해 특별히 왜곡된 인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어디까지나 사실의 전달 수준이고, 오히려 조선을 침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인물의 일인자의 자질은 인정하면서도, 그 옹졸한 인간성에 반감을 드러내는 부분이 더 커 보인다.
일본의 당대 최고의 실력자를 소인배로 만들어 버린 어떻게 해도 넘을 수 없는 ‘리큐’의 심미안. ‘리큐’가 마련한 다도연은 언제나 평온함을 주지만, 어째서 번번히 그렇게 되는지 천하를 손에 쥐고도 ‘리큐 ’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는 듯한 기분에 빠져 버리는 ‘히데요시’의 초조한 열등감이 공감을 부른다.
‘리큐’가 그런 ‘히데요시’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은 것은 역시 ‘미’에 대한 자존감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을 완고하게 지켜 나갈 수 없게 된 현실이, ‘리큐’를 ‘히데요시’의 칼에 순순히 목숨을 잃도록 했을 것이다. ‘리큐’는 아마 완전히 지쳐 있었던 게 아닐까. 인생의 모든 것을 다도에 응축해 표현하려 한 ‘리큐’와, 권력의 수단으로서 다도를 생각하는 ‘히데요시’의 확집은, 어느 쪽이든 미래가 그리 길지 않을 것임을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주위를 둘러보면, 어느 일정한 아름다움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미’의 대량생산 체제 시대가 되었지만, 이런 획일화된 ‘미’에도 고매함은 남아 있는 것일까?
“중요한 것은 생명의 우미한 광채다.”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여기가 바로 세상의 중심이다라고 말하는 듯한 ‘리큐’가 사랑한 조선 여인의 자태와 같은 것은 찾아볼수 없게 된지 오래이다. ‘미’의 가치도 점점 저렴해지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든다. 여기서 한번 더, ‘미’를 탐구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리큐’에게 배우고 싶다.

고요하고 정적이라는 설명이 문학적인 깊이나 따분함을 떠올리게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오키상」이라는것이 본래 대중적인 작품에 주어지는 상이다. 『리큐에게 물어라』는 역사소설이지만 고리타분함과는 거리가 멀다. 적절한 비교인지는 몰라도, 오락적인 요소가 강한 <유메마쿠라 바쿠>의 『음양사』의 분위기를 연상하면서 읽었을 만큼, 인물의 매력이나 문장의 흡입력등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장점이 많은 소설이다. ‘다도’라는 소주제로 다른 시각에서 역사의 한부분을 재조명한다.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했지만, 이렇게 친근하면서도 감정선이 살아있는 대중적인 역사소설의 존재는, 책을 덮고 난 뒤에도 두고두고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