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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편지의 기술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오근영 옮김 / 살림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수중에 만보기 같은게 없어서 직접 재보지는 못했지만 전체적으로 대략 몇백회에 걸쳐 콧물을 동반한 폭소가 뿜어져 나왔던 것 같다. 사실은 만보기는 아무 의미 없는 조크이지만.
찌질한 청춘을 그리는데 있어서는 가히 당대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모리미 도미히코의 신작은 전편에 걸쳐서 반복적으로 편지의 내용이 열거되는 서신형태의 이야기. 한동안 괴기, 환상담에 전념하는 것 같더니 다시 교토의 찌질이들 이야기로의 복귀다. 원점으로의 회귀라고나 할까. 단순한 ‘본연의 자세로 돌아오다’는 아니고 그 형식면에서 지금까지의 모리미 도미히코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는 만큼, 새로운 시각에서 찌질이들의 일면을 지켜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런면에서 이 작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스페셜 아이템격인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정말 불가사의한 세계관, 특유의 장난스러운 문체.
서신형태의 소설 그 자체가 특별히 드문 것은 아니지만, 주고받는 이유, 편지의 행선지등 역시 어딘가 이상하다. 교토에 있는 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모리타 이치로’는 노토반도에 있는 임해 실험소로 옮겨와 해파리 연구에 전념하게 된다. 한없이 해파리를 노려보거나, 음산한 액체로 해변에서 묵묵히 정력증강에 열을 올리고 있는 다니구치 선배와 함께 온천에 찾아가 더러운 꼴을 당하거나, 뜬금없이 UFO를 찾아 가거나 하는 생활이 반복된다.
그 노토 반도에 고립된 모리타는 ‘서신왕래의 무사수행’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내걸고 교토에 있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는데...
상대방의 면면을 살펴보면,
모리타와 같은 연구실의 ‘고마쓰자키 도모야’
모리타의 천적이자 교토의 연구실에 군림하는 여왕 ‘오쓰카 히사코’
모리타가 한때 가정교사를 한 적이 있던 초등학생 ‘마미야군’
모리타의 대학 선배이자, 소설가인 ‘모리미 도미히코’ (이 사람 뭐냐고)
모리타의 사랑스런 여동생 ‘가오루’
모리타가 동경하는 ‘이부키 나츠코씨’
그 서신 왕래의 대상별로 하나의 단편이 완성되는 형식을 하고 있다.
온갖 말장난이 난무하면서도 전혀 가볍지 않게 느껴지는, 저자 특유의 내공 충만한 맛깔난 문장들의 향연이다. 게다가 편지들이 시간대별이 아닌 편지상대별로 정리되어 있어서, 상대가 바뀌면 다시 먼저 쓴 편지들이 나오기 때문에, 똑같은 사건을 두고 다른 시선에서 몇번이고 즐길수 있다.
탄탄한 문장력의 날개를 달고 뿜어져 나오는 개그본능은 모리미 도미히코 소설의 가장 큰 매력포인트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는 문어체가 뒤섞인 이상한 문장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코드가 안맞는다면 이 만큼 의미 불명하고 어처구니없는 시간낭비 소설도 없을 것이지만, 이 문장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모리미 도미히코의 트레이드마크인 남자즙을 체감하는 매순간마다 눈으로부터는 감격의 수분을, 입으로 부터는 환희의 외침을 토해내지 않을 수가 없다.
고마쓰자키는 마리라는 여성을 좋아하는데, 그 마리는 마미야군의 가정교사가 된다. 그리고, 마리는 ‘젖’이 크다.(젖가슴도 아니고 그냥 젖이다!) 집요하게 이어지는 젖에대한 고찰이나, 모리타는 이부키씨를 짝사랑 하고 있는데 그 짝사랑의 상태가 심상치 않고, 연애편지를 쓰고 싶은데 좀처럼 잘 쓸 수가 없다. 혹은 오쓰카 여왕님의 괴롭힘 초등학생 수준의 컴퓨터 감추기 보복, 모리미 도미히코의 여성팬들로 이루어진 아가씨회(이름이 뭐더라) 지금 다시 생각해도 웃지 않을 수가 없다.
모리타가 상대를 바꿔가며 쓴 편지를 읽는 것만으로, 등장 인물들이 어떤 인물인지,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사건의 전말을 눈에 보이는 것처럼 알 수 있는 초유의 스토리텔링 기술을 구사한 편지 문학의 정점이다. 과장이 아니라 저자의 장난기만 아니라면 문학적으로도 상당한 성취가 아닐까 싶은데 어떨런지. 그저 팬의 입장에서의 무조건적 애정에서 비롯된 발상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렇게까지 장황한 이야기를 마지막에 깔끔하게 정리해 내는 것도 과연 모리미 도미히코다. 편지글의 특성상, 특유의 입담이라던가 언어유희를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극한까지 구현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새로운 시도를 통해 저자는 지금 자신의 몸에 가장 잘 맞는 옷을 찾아낸 것 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