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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걷다 - 2010 경계문학 베스트 컬렉션 ㅣ Nobless Club 21
김이환 외 지음 / 로크미디어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작년에 나왔던 국산 장르 소설 단편집은 거의 다 읽어보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이 바로 <꿈을 걷다 2009>였다. 작가층이 얇은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한 장르에만 치중하는 것 보다는 판타지, SF, 무협까지 다양한 장르를 맛볼 수 있는 이와 같은 모듬 요리 형태의 단편집이 더 형편에 맞지 않나 싶다. 2009년도 판은 엔터테인먼트라는 측면만 놓고 보면 동급 최강이었다는 인상이 있었기 때문에, 2010년판이 나오자마자 냉큼 집어드는 것은 당연지사. 이번 <꿈을 걷다 2010>년판에 수록된 작품은 모두 11편. 무협의 비중이 꽤 높은 것이 <꿈을 걷다> 시리즈의 특징이다.
개학 날
이건 뭐가 어떻게 되었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 개학 날 아침에 못 일어나고 있는 주인공을 배게가 막 내려쳐서 깨우고, 신문이 저혼자 터벅터벅 걸어와서는 주인공 앞에 풀썩 쓰러지고, 그러더니 갑자기 환상세계가 어떻다는 둥, 이사람 저사람과 만나고 다니면서 썪은 사과가 어떻다는 둥 알 수 없는 대사를 연발하는 시츄에이션 끝에, 급기야는『지금까지 이 많은 일도 다 해냈는데 앞으로 못할 건 또 뭐람』이라는 수수께끼같은 대사를 뇌깔리면서 급하게 다시 잠을 청하는 걸로 마무리....
뭘 했다고! 뭐냐 이거 컬트 소설인가.
페르마의 부탁
라면을 끓이다가 느닷없이 악마가 좋아져서 쓰게 됐다는 소설. 악마의, 일종의 저승사자로서의 일면을 조명한다. 악마가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악마의 대리인격인 페르마의 설명에 의하면, 만약 사람이 사자에게 잡혀먹혀서 배설물이 되어 나왔는데도 악마가 인간을 벌하지 않으면 영혼은 그대로 남아있어 영구히 배설물인채로 살아가야 한다. 그 배설물은 또다시 다른 생물의 먹이가 되고 이렇게 분해되고 또 분해되고 세균이 득실득실한 상태가 되어서도 어떻게든 그냥 살아가야 한다. 그것보다도 먹히고 있는 도중에도 의식이 여전히 살아있을 것을 생각하면... 아 무섭다. 악마님 고맙습니다. 라면끓이는 것만으로 떠올린 발상이 이정도라면 이 작가님이 스테이크를 굽다가 영감을 얻는 작품은 과연 어느 정도일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진다. 짧고 코믹한 작품.
아내를 위하여
타임머신을 발명했으나 사채빚에 허덕이게 된 가련한 남자의 이야기. 어째서 이 남자는 타임머신을 발명했으면서도 암흑가의 일원이 될 수 밖에 없었는가?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간 미래의 아들은 어떻게 알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가? 참 사람의 앞일이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당장의 좋은 결과가 성공으로 이어지리란 보장없고, 안좋은 결과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인생의 실패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미래를 보고 와도 그 결말은 변함없다면 타임머신같은 것은 의미없는게 아닐까. 어차피 그럴거라면 타임머신 따위를 발명하는 것보다는 사채를 끌어다 쓰지 않는게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일검쟁위 一劍爭位
『사랑으로 삶을 사랑온 허풍검사의 꿈, 대붕검.
이 검은 일찍이 영웅이었던 한 검사가 영웅이 되기를 스스로 포기하고 성취해낸 위대한 검이었다.』
강호의 절정 고수와, 허풍쟁이 소리를 들으면서도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는 한 무도가의 세기의 맞짱,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허풍쟁이 사부의 제자. 고수들의 무공이 장난 아니다. 그리고「검의」란 무엇인가, 진정한 검사는 어떤 마음가짐을 해야 하는가 등등을 두고 거창한 철학들을 몇차례 주고 받는데, 무슨 말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직 내가 깨달음이 부족한 탓인가 보다. 역시 꿈을 걷다 시리즈는 무협이 중량감이 있다. 이번에도 역시 재미있었다.
2010년 한해동안 아껴가면서 읽어야 할 책을, 앉은 자리에서 순식간에 11편중 4편을 읽어버렸다. 나중에 이 시리즈가 좀 더 유명해지고 잘 나가면 분기별로 나와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일년에 한번 읽으려니 이거야 원 감질나서. 2010년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런식으로. 그리고 수록된 작가들의 반가운 이름들을 장편으로도 모두 만나볼 수 있게 되기를 고대한다. 그날이 올 때까지 음지에서 묵묵히 응원.
마지막으로 <일검쟁위>의 마지막에 나오는, 협객을 자처하는 피끓는 남성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명언 하나,『죽음으로써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할 수 있다면, 그대의 죽음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번 죽음으로써 영원히살 수 있다는 뜻이지』
선천적으로 가늘고 길게 사는 체질인 나에게 고수의 길은 요원한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