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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의 사각 - 201호실의 여자 ㅣ 오리하라 이치 도착 시리즈 2
오리하라 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약 십년쯤 전, 특정 영화를 관람하려는 사람에게 브루스 윌리스가 유령이라는 사실을 미리 이야기 하는 것은 가히 정신적인 테러에 가까운 행위였던 때가 있었다. 반전이 있을거라는 것을 넌지시 암시하는 것만으로도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큰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찬가지로 반전이 생명인 서술 트릭계열의 미스터리 소설은 가능한한 그런(반전이 있는) 작품이라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상태에서 읽는 것"이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다. 따라서, 이런 소설의 감상을 쓰고자 할때는 어쩔수 없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수준의 인내심을 발휘하게 되고 만다. 이것도 말할 수 없고 저것도 말할 수 없고, 제목과 작가 이름을 밝히고 난 뒤에는 도무지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 지 고민스럽기 짝이 없다.
다만, "오리하라 이치"의 소설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이 작가의 소설은 특이하게 독자는 물론이고 저자도 작정을 하고 싸움터에 나서는 장수들 같다. 한쪽은 필사적으로 들키지 않고 새로운 마술을 선보이려는 마술사가 되고, 한쪽은 관람석의 맨 앞에 앉아 눈에 불을 켜고 속임수를 간파해 내려는 집요한 관객이 된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모르는 사람도 많이 있겠지만, 이책의 저자인 오리하라 이치는 일단 이름 앞에 서술 트릭의 명수라는 수식어가 붙는 작가다. 때문에 독자도 애초에 기발한 속임수가 있을 것을 기대하고 읽게 되고, 혹은 단순히 읽는 것을 넘어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거나 헛점을 찾아내는 것이 독서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기도 한다. 작가도 마찬가지다. 알아낼수 있으면 어디 한번 알아내봐라 하는 식으로 비틀고 또 비틀어서 트릭의 존재를 미리 안다고 해도 손쉽게 간파할 수 없을 정도로 레벨이 높은 이야기를 툭 내어놓기 때문에, 뭐 숨기고 자시고 할것도 없다. 안심하고 "서술 미스테리다" 라고 미리 밝힐수가 있다. 이책 <도착의 사각> 역시 먼저 소개된 <도착의 론도>나 다른 오리하라 이치의 소설들처럼 철저하게 계산된 서술트릭이 사용된다.
이 책을 손에 넣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봉인이다. 밸린저의 <이와 손톱>처럼 마지막 십여 페이지가 봉인되어 있다. 이걸 보고 있으니까 마치 니까짓게 미리 결말을 보지 않고도 나를 이길수 있겠느냐는 작가의 도발같은 느낌이 들어서 의욕을 불태운 것인데 결과적으로는 이번에도 참패였다. 니까짓거가 되고 말았다.
번역가 요시오는, 어느 날 자신의 집 2층에서 우연히 근처의 맨션 201호실에 사는 여자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상경해 201호실에 입주한 독신 여성 마유미.
엿보는 남자와, 항상 누군가 엿보고 있는 듯한 느낌으로 골치를 썩는 여자.
그리고 알콜 중독인 요시오는, 끊었던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하는데...
일기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거기에 힌트가 있을거라 짐작했지만, 끝까지 전혀 몰랐다. 아무튼, 오리하라 이치를 읽을때면 항상 경계심을 바짝 세우고 읽기 때문에 당하고도 놀라움은 적은 편이다. 그런데도 읽고 나면 한판 질펀하게 놀고 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무슨 이유? 구성도 좋고 블랙코미디같은 전개도 마음에 든다. 비틀고 비튼 이야기의 끝자락에서 한손에 커터칼을 뽑아들고 봉인된 페이지를 절개하는 마지막 의식을 치를때는 소설이 아니라 저자와의 2인 게임을 즐기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전체적으로 재밌었지만, 아쉬운 것은 이야기 자체도 그렇고 트릭도 그렇고 <도착의 론도>에는 다소 못미친다고나 할까. 억지스러운 부분들이 눈에 띈다.

어쨌든 이렇게까지 많은 트릭을 담고 있으면서도, 오리하라 이치의 소설은 복잡하지 않고 술술 읽혀서 좋다. 전형적인 사이코 호러물 같은 분위기도 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