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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리시 페이션트
마이클 온다치 지음, 박현주 옮김 / 그책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심각한 화상을 입어 얼굴조차 알아볼수 없는 한 영국인 환자가 사막에서 만난 유부녀와의 슬픈 사랑을 회상한다. 지금은, 사막에서 멀리 떨어진 피렌체의 어느 폐허가 된 수도원 건물에서 젊은 간호사의 간호를 받고 있는 신세. 영화에서는, 이미 지난 과거가 되어버린 이 영국인 환자의 사랑과, 폐허에 찾아온 인도인 공병과 간호사의 현재진행형의 젊은사랑이 마치 협주곡처럼 공명하면서 전자가 후자로 재생되어 가는 듯한 스토리였던 것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설렁설렁 별생각없이 감상하느라 다른 부분을 놓쳐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부분에 초점이 맞추어진 로맨스영화였다는 인상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그런데, 소설이 안고 있는 주제는 이보다 훨씬 광범위하다. 때는 제 2차 세계대전의 종반이다. 영국인 환자와 캐나다인 간호사 해나가 머무르고 있는 장소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연합군의 병원으로서 활용되고 있던 수도원 건물로, 나치스나 이탈리아군에 의해 수많은 폭탄들이 설치되어 있다. 둘밖에 없는 이 곳에 두 남자가 찾아온다.
한사람은 해나의 아버지의 친구인 카라바지오. 해나가 어릴적부터 아저씨라고 부르며 따랐던 그는 우연히 해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찾아 왔다. 직업은 도둑. 손재주가 있는 덕분에 연합군의 스파이로 일하고 있었지만, 나치에 붙잡혀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손을 붕대로 빙빙 감고 있지만, 상처를 입은 곳은 육체뿐만이 아니다. 또 한명은, 인도인이면서 영국군으로 참전한 킵. 폭탄 처리의 전문가이다. 깨어있는 동안에는 어디에 어떤 장치가 설치되어 있을지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항상 죽음과 인접한 긴장감 속에서의 작업으로 황폐해져 있던 그는 해나와의 사랑을 통해 점차 잃었던 인간성을 회복해 간다.
상처투성이의 환자와 단둘이 이곳에 남기를 선택한 해나 역시,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뱃속의 아이를 잃고, 수많은 병사들의 죽음을 지켜봐왔다. 영국인 환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치유하는 입장의 간호사인 그녀 역시 서서히 상처가 아물어 가는 것처럼 보인다.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모두가 전쟁으로 인해 상처입은 "환자"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이다. 이들 남녀가 처한 입장과 삶의 이야기들이 모여 하나의 큰 언덕을 이룬다. 이들은 어떻게 상처를 치유해 갈까? 오랜 전쟁을 끝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원폭에 대한 저자의 생각과 그 의미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러한 분쟁이 인종의 격차를 벌린다는 생각도 넌지시 드러낸다. 단순한 로맨스 이상의, 세계라는 큰 흐름속에서의 개인을 이야기하려는 의식이 있다. 예술적이라 할만한 서사시같은 문체가 특징이지만, 그래서 더 그에 대비되는 잔혹함이 무겁게 마음을 덮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