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하카와티 - 유쾌하고 불손하고 매혹적인 지상 최고의 이야기
라비 알라메딘 지음, 이재경 옮김 / 예담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하카와티(hakawati)'란 옛날이야기나 신화, 우화 등을 들려주는 사람을 뜻한다. 즉 이야기꾼이자 여흥거리를 제공하는 예능인이다. 일종의 음유시인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허풍 섞인 이야기로 청중을 즐겁게 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다. '말', 또는 '대화'를 의미하는 레바논어 '하키(haki)'에서 유래했다. (책 속에서)
"하지만 이거 하나는 꼭 명심해!
이야기를 믿을 뿐, 결코 이야기꾼을 믿어서는 안 돼!"
<아라비안 나이트>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사실 우리에게는 이슬람 문화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낮설게 느껴지기 마련이지만, 이 아라비안 나이트만은 유독 예외다. 이 이야기를 읽을때만은 그 문화적 차이, 종교적 이질감에서 오는 거리감이 모두 어디로 사라지는지 모르겠다. 세상의 모든 인류, 모든 종교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 이 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이 아닌가 싶다. 천일야화의 화자인 세헤라자데처럼 거침없이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꾼들, 이 책의 제목인 <하카와티>란 바로 그런 "이야기꾼"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슬람 문화권의 이 이야기꾼 전통은 유명하다고 하는데, 생각해보면 우리나라도 결코 이에 못지 않다. 할머니 무릎을 베고 듣던 옛날 이야기들, 호랑이와 산신령이 단골로 나오는 전래동화들, 말하는 사람마다 미묘하게 내용이 달라지던 구전동화들. 우리나라 사람들의 피 속에도 이슬람 문화권 사람들 이상의 이야기꾼 정서가 섞여있는게 틀림없다. 그래서 더 이런 하카와티들의 이야기 보따리가 친근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아라비안 나이트가, 세헤라자데가 왕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들려주는 천일야화였다면, 이 하카와티는 이 시대 마지막 하카와티를 자부하는 한 남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아라비안 나이트와 다른점이라면 옛날 옛적, 어느 먼 나라에...로 시작하는 이야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 하나의 이야기가 채 매듭되지 않은 사이에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고 또 그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를 낳는다. 시대를 건너뛰고 때로는 현대시대로 거슬러 올라오기도 한다. 현대판 천일야화라고나 할까. 책은 800페이지 가량의 두꺼운 한권이지만 그 깨알같은 글씨로 총 4장으로 구성된 내용을 보면 1장이 아라비안 나이트와 같은 책 1권 분량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아라비안 나이트 완역본이 10권인 것을 감안하면 이 단 한권이 얼마나 방대한 이야기를 담고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이책의 실린 잠 못 이루게 하는 이야기들을 이런 짧은 글 안에서 모두 소개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낼일이다.
자, 들어보라 . 나를 그대의 신으로 생각하라. 내가 그대를 상상치도 못했던 이야기 속으로 인도하리라.
옛날옛날 어느 먼 나라에 모든 것을 가진 군주가 살고 있었다. 아름다운 도시, 엄청난 재산, 건강과 만인으로부터의 존경, 게다가 아름다운 아내까지. 사랑스러운 공주도 열두명이나 낳았지만, 단 하나,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대를 이을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고민하던 군주는 총리대신을 불러 이 문제를 상의하기에 이른다. 두번째 아내를 얻으라 조언하는 총리대신. 그러나 군주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은 오직 아내 한사람 뿐이라며 그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린다. 그렇다면 노예중 한명을 골라보라는 차선책마저 거절하지만, 아내의 설득으로 결국 군주는 이집트 출신의 "파티마"라는 노예와 잠자리를 가지기로 한다. 그런데 불려온 파티마가 뜻밖의 제안을 한다. 자신의 고향에 대단한 주술사가 있으니 부인의 머리카락 한줌을 가지고 가 처방을 받아오겠다는것. 여인의 처방은 실패 한 적이 없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이렇게 해서 파티마는 왕자를 생산할 치료법을 얻으러 먼 길을 떠난다.
2년이나 지속된 내전의 상흔으로 폐허가 된 베이루트 시내. 내가 베이루트에 온 것은 이슬람 문화권의 가장 큰 명절인 이드 알아드하를 가족과 함께 지내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도착하고보니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 오랜 친구인 "파티마"를 태우러 가던 길에, 나는 예전에 살던 집앞에 발을 멈춘 채 온가족이 공습을 피해 피난하던 당시를 회상한다.
파티마는 가장 용맹한 병사 다섯과 마구간지기 청년 자와드와 함께 도시를 나섰다. 여행에 나선지 나흘째 되던 날 염려하던 도적떼의 습격을 받았다. 위기일발의 순간 파티마는 도적들의 질투심을 자극해 서로 싸워 죽이게 한 후 그들의 재물마저 차지한다. 도적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이들과 일행이 된 자는, 파티마가 아닌 청년 자와드에게 반해버린 카얄이라는 남자. 카얄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자와드를 유혹하기로 한다. 카얄은 이레라는 시간동안 하루에 하나씩 자와드를 유혹하기 위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옛날 이야기와 현대의 이야기가 번갈아 가며, 또 그 안에서 이야기꾼에 의해 또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는 이야기의 향연이다.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는 앞으로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감히 예측도 되지 않는다. 자, 이들의 앞길에는 과연 어떤 놀라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모든 것은 하카와티 마음 가는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