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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트 - 연쇄살인범 랜트를 추억하며
척 팔라닉 지음, 황보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2월
평점 :
다양한 인물들이 연쇄살인범(?) "랜트" 사후에, 랜트에 대해 이야기하는 구술전기 형식의 특이한 소설입니다. 무대는 아마도 가상의 근미래. 소설 속에서 연도를 언급하고 있지 않은데다가, 특별히 과학문명의 발달에 대한 묘사가 없는 만큼 일종의 현실세계의 패러렐월드로 생각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정부의 엄격한 통행금지 정책에 의해, 정상적인 "주간활동자"와, 질병뿐 아니라 광범위한 영역에서의 전염, 악영향의 여지가 있는 "야간활동자"로 분류됩니다.
저자는 <파이트클럽>, <서바이버>, <인비저블 몬스터>등 써내는 작품마다 기존 소설의 개념을 깨부수는 파격적인 방식을 채용해 온 "척 팔라닉". 그런 팔라닉의 2007년도판 작품입니다. 팔라닉의 팬이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번에는 과연 또 얼마나 기상천외한 모습을 보여 줄 것인가 하는 기대감으로 걷어낸 베일속 <랜트>는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대단히 특이한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파이트클럽>이 처음 발표된 것이 1996년. 세월은 흘렀지만 기예는 여전히 기예. 팔라닉의 독특하고 기발함은 전혀 퇴색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맛을 보고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는 이상한 감각과, 동물들에게 자신의 신체를 물어뜯게 하는 기괴한 성향의 소유자인 "랜트 케이시"는 고향인 미들턴을 벗어나, 폭주족을 연상케 하는 "자동차 충돌 파티족"이라는 위험한 게임그룹의 리더가 됩니다. 서로의 차를 들이받는 이 생사가 걸린 무식한 게임을 반복하던 랜트는 결국 사고로 사망합니다. 전설처럼 되어버린 그런 생전의 랜트에 대한 주변인물들의 증언은 단순한 회상에서 시작해서 랜트가 도시 전체에 전염병을 퍼뜨리고, 심지어는 시간여행을 했다는데에까지 흘러갑니다.
굉장히 독특하고 기상천외한 이야기지만 결코 꿀꺽꿀꺽 넘어가는 소설은 아닙니다. 책을 열면 처음에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그 실체가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주인공격인 랜트가 직접 등장하지도 않을 뿐더러, 한 페이지 안에서도 화자가 수시로 바뀌는 만큼 집중하기가 쉽지 않고, 구술자들의 증언도 시간순서대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시간여행이라 느껴질만큼 수시로 오락가락합니다. 그리고 소재 또한 대단히 다채로워서 독자는 언제나 지그소 퍼즐의 조각들처럼 뿔뿔이 흩어져 있는 단편들만을 쫓아다니게 됩니다.
이 가상의 세상과 랜트의 행적을 통해서 팔라닉이 말하고자 하는바가 무엇인가를 짐작하기는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워낙 조각이 잘게 나누어져 있어 퍼즐의 난이도가 높다고나 할까요. 다만, 다양한 각도에서의 증언들을 통해서 종교의 본질이라던가, 질병의 감염경로, 정부의 정책, 사회체계등을 포함하는 여러가지 주제에 대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게 하는, 말하자면 음모론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으로는 에이즈나 매독같은 질병이 동물에게서 인간으로 옮겨온 경로, 그리고 그 최초의 전염원이 된 사람은 누구일까? 라는 평소의 의문에 대해 일말의 실마리를 제공해준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괴이한 발상의 파편들을 읽고 난 듯하지만, 다 읽고 나면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과 함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소설입니다. 한편의 블랙코미디 같은 <랜트> 속 세상을 읽고나면 그게 또 소설 속 이야기인 것만은 아닌 것 처럼 여겨지니 이상합니다. 현실이 바로 코메디라는 반증이 아닐까요. 신종플루가 제약회사의 음모에서 비롯되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도는 요즈음 <랜트>속 이야기는 더욱 체감온도가 높게 느껴집니다. 너무나 기괴하지만 흥미진진한, 좀처럼 겪어보기 힘든 특이한 경험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