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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되어버린 남자
알폰스 슈바이거르트 지음, 남문희 옮김, 무슨 그림 / 비채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요즘같이 눈감으면 코 베어갈 것 같은 칼바람이 난무하는 강추위에는 따뜻한 실내에서 책을 보는 시간이 많아지는데, 그러다보면 정말로 책이 되고 싶어질 때가 있다.(없나?) 그러니까 나는 책이 되서 하루종일 서재에 머물고, 책이 나대신 밖에 나가서 일을 보는 시스템이다. 웃기는 상상.
그래서(는 아니지만) 읽은 책이,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알폰스 슈바이거르트의 2001년 작<책이 되어버린 남자>(원제: Das Buch)다. 어느 애서가가 어느날 책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언뜻 들으면 카프카의 <변신>을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설정.(안그래도 책에 대해 이야기 한 카프카의 말이 나온다.) 책이 되어 버린 남자를 통해 철저하게 책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이 "책 이야기"를 읽다보면, 막상 책이 되어보면 생각처럼 그리 편하지만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름대로 고충이 많이 있는 것 같다.
책이 되면, 좀, 생쥐등의 천적에 노출되는건 물론이고 습기때문에 종이가 부풀고 얼룩지게 된다. 햇볕이 책의 색을 바래게 하고 종이를 누렇게 부식시킨다. 산 성분은 제본의 노화를 가속시켜 먼지처럼 푸석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인간들의 등쌀에 견딜수가 없게 된다. 서가에서 책등을 우악스럽게 잡아당겨 책에 손상을 입히고 가구의 기울기를 맞추는데 책을 밑받침으로 쓰거나, 툭하면 집어던지기 일쑤다. 불결한 손으로 만지작대고 억지로 홱 펼치는가 하면, 양 페이지가 만나는 가운데 부분을 주먹으로 쾅 내리치기도 한다. 책장에 마구 낙서를 하고 자기 얼굴 위에 장시간 덮어두기도 하고, 야외에 펼쳐둔채 눈비를 맞히고, 불쏘시개로 쓰기라도 하면 그날은 그야말로 최악이다. 이렇게 만신창이가 된 뒤에는 접착제 칼, 실, 바늘등으로 수술을 받는 지옥과 같은 고통을 맛본다. 이 과정에 기절하기도 한다.
애서가인 비블리 씨는, <그 책> 이라는 제목의 정체불명의 낡은 한권의 책을 벼룩시장에서 발견한뒤 신체적으로 이상을 겪는다. 좋아하던 책에 대한 관심도 떨어지고 기이한 현상들을 겪은 뒤에는 어느새 책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책이 된 뒤에는, 이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자행하던 책의 절단, 스크랩 등의 사소한 행위에 상처입고, 책을 비난하는 비평가의 발언에 가치를 잃고 고통을 받는다. 결국 (책 상태의) 비블리씨는 자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들, 위협을 가하는 독자, 편집자, 비평가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복수를 자행한다. 그리고 땅속에 묻혔다가 다시 벼룩시장으로 돌아온뒤에는...
어렸을 적 책을 읽으며 느꼈던 희열과 새로운 세상과의 만남에 대한 비블리씨의 회상이나, 애서가로서의 습관등,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혹은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공감할 만한 다양한 생각과 에피소드들이 책에 대한 대가들의 명언과 함께 나열되고, 한편으로는 책이 되어버린 비블리씨의 눈을 통해 책의 입장에서 체험해 보게 된다. 책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직접 책이 되어 보는 것 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
어찌보면 무서운 이야기이지만, 책에 대한 애정이 없이는 쓸 수 없는 소설이다. 책에 대한 세심한 관찰, 애서가로서의 오랜 경험에서 오는 책에 대한 진지한 고찰에서 비롯된 이 소설은, 화려한 기승전결로 무장한 스토리는 아니지만, 책을 바라보며 누구라도 한번쯤은 생각해 보았을 공감 백프로의 이야기가 되고 있다. 책을 라면냄비 받침으로 사용하는 평소의 내 습관을 반성한다. 상처투성이 내 책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미안하다 이제 안 그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