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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코넬 울리치 지음, 이은경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코넬 울리치"라는 이름이 생소한 독자라도 "윌리엄 아이리시"라고 하면 금새 아~ 환상의 여인!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윌리엄 아이리시의 본명이 바로 코넬 울리치다. 사실은 윌리엄 아이리시라는 필명보다 본명이 더 유명한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코넬 울리치라는 본명보다는 윌리엄 아이리시라는 필명을 먼저 알았다. 이 작가를 알게 해 준 작품이 바로 윌리엄 아이리시라는 이름으로 소개된 <환상의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환상의 여인이 저자의 대표작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왔기 때문에, 아무래도 <밤은 천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라는 제목의 이 소설이 그보다는 못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막상 읽어보니 흡입력이라는 면에서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이 쪽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단숨에 읽어버렸다.
어두운 밤, 형사 톰 숀은 강가를 걷다가 막 다리에서 뛰어내리려 하고 있는 여자를 발견한다. 눈치채지 못하게 살금살금 다가가 자살을 방해한다. 덕분에 죽지 못한 여자의 이름은 진 레이드. 부잣집 외동딸로 부족한 것 없이 자란 그녀가 차가운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으려 한 이유가 무엇인가? 식당 구석자리에 앉아 그녀는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진의 아버지 할란 레이드는 사업 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출장을 가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하녀 하나가 혼자 있는 진에게 다가와 아버지의 출장을 미루면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돌아오는 비행기 편에서 안좋은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하녀의 말에 코웃음치는 진, 결국 자꾸만 신경쓰이게 하는 하녀를 해고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계속해서 왜 자꾸 그 말에 신경쓰게 되는 것인지. 결국 비행기 시간을 늦추자는 제안을 하기 위해 아버지가 묶고 있는 호텔로 다급히 전화를 걸어 보지만, 아버지는 이미 비행기 탑승을 위해 호텔을 떠난 뒤였다.
홍보문구나 후기에서 느와르를 강조하고 있는데, 느와르하면 총격전부터 연상되는 나로서는 이것이 느와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어두운 우울한이라는 사전적 의미와는 아주 잘 부합한다. 현실이면서도 어쩐지 아득한 꿈길을 걷고 있는 것 같은 독특한 분위기는 이 작품에서도 여전하다. 특이하게도 예언이라는 미신에 가까운 소재를 이야기에 중심에 두고 있지만, 호러나 판타지로 흐르지 않고 교묘하게 현실의 경계선에 걸쳐있는 모양새가 감탄사를 자아낸다.
흡입력은 정말 굿이다. 처음 자살을 시도하는 여자의 특이한 분위기부터 흥미롭기 시작하더니, 하녀가 다가와서 불길한 예감을 펼쳐놓고는 눈치보면서 자꾸만 아버지를 못가게 하는 초반부에서 벌써 긴장감이 짙은 안개처럼 몰려든다.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전화기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진의 심정이 고스란히 내것이 된다. 아 나 왜 전화를 안받냐고, 빨리좀 받으라고 다리를 떨면서 중얼거렸던 것 같다.
예언이 정말로 실현될 것인가. 형사들은 그것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의문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나라면 어떻게 행동 할 것인가? 예언을 믿고, 혹은 의심하고, 그것을 쫓아 진실 여부를 확인하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완전히 실감나는 상황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만약 누군가에게서 죽음의 예언을 들었을 때 과연 나는 말도 안되는 일이라며 일축할 수 있을 것인가 하면 꼭 그렇다고 만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입장에 놓였을 때의 미묘한 갈등이 오히려 어떤 현실보다도 몰입하게 만든다.
시종일관 수상한 공기가 떠돌아 댕긴다. 현실이면서도 왠지 꿈속을 걷는 듯한 음습한 분위기, 안개 저편으로 저세상이 보일 것 같은. 운명은 바꿀수 없는 것일까. 그건 모르겠다. 내가 지금 정해진 운명을 스케줄대로 살고 있는지, 아니면 내 의지에 의해 수시로 바뀌고 있는지는 두가지를 다 살아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나는 그냥 주어진 지금을 묵묵히(가끔은 말도 하면서) 살아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