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로 밴스의 정의 - 스카라베 살인 사건 / 겨울 살인 사건
S. S. 밴 다인 지음, 김상훈 옮김 / 북스피어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첫번째 이야기: <스카라베 살인 사건>
이집트 고대 유물 박물관에서, 자선가이자 예술후원자인 카일씨가 조각상으로 머리를 맞아 살해당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발견자는 박물관의 기술 전문가로 일하고 있는 스칼릿. 스칼릿은 현장에서 곧바로 빠져나와 명탐정 파일로 밴스에게 달려온다.

파일로 밴스는 마컴 검사, 히스 경사들과 함께 현장에 도착하지만, 현장에 남겨진 스카라베를 비롯한 상황 증거가 모두 어느 특정한 한 인물을 가리키고 있다. 사건은 곧바로 해결되는가 싶었지만, 그러나 밴스는 범인의 무서운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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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재미있어요. 밴 다인 소설의 재미는, 무엇보다도 파일로 밴스의 캐릭터에 있습니다. 문장을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듯한 능수능란한 말솜씨나 수수께끼같은 행동, 현학적인 말씀 등을 즐겁게 읽고 있다 보면 페이지가 쭉쭉 넘어가 버립니다.
밴스의 입만 바라보고 있는 등장 인물들처럼, 읽고 있는 사람도 또 그 장광설 안에서 줄곧 놀아납니다. 이야아, 재미있다.

이 책은 "스카라베 살인 사건"과, 밴 다인 최후의 작품인 "겨울 살인사건" 이 함께 수록된 "스카라베 살인 사건/ 겨울 살인 사건" 합본입니다. 고풍스러운 장정에 홀딱 반해서 집어드는 사람이 많을거라 생각하지만, 이미 내용을 알고 있는 독자들도 재독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멋들어진 책으로 읽으면 더 재미있다는 식의 이유가 아니라, 외서는 번역의 질에 따라서 그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을 처절하게 실감하게 해 준 책입니다. 기존의 책과 비교하면 마음이 뿌듯해져 오는 것을 막을 길이 없네요. 게다가 무려 전집으로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밴다인의 작품을 소장하고 싶어하는 독자들에게는 이래저래 반가운 소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너무너무
마음에 드는 탐정 "미스터 파일로 밴스". 일단은 내용보다 탐정의 소개입니다. 파일로 밴스로 말할것 같으면, 실제로 옆에 있으면 화가 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친구삼고 싶은 남자입니다. 뉴욕 이스트 38번가에 있는 옥상 정원이 딸린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으며,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아서 악착같이 일할 필요는 없는 것 같고, 그럼 뭘 하고 사느냐 하면 관심 있는 문헌을 번역하거나, 흥미 있는 사람의 전기를 집필하거나, 흥미가 사라지면 관두거나... 뭐, 요컨데 취미생활을 하며 보내고 있습니다. 왠지 부러운 신분입니다.

운동은 쓸데없는 체력소모에 지나지 않는다던가 그런말을 한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이건 기억이 좀 가물가물하네요), 그런 대사에 비해서는 못하는 운동이 없는 만능 스포츠맨이기도 합니다. 스포츠 만능에, 핸섬하고, 박식한데다, 부자이기까지... 좋다는 조건은 모두 갖추고 있는 인물입니다. 멋지다! 그렇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이런 파일로 밴스를 비위에 거슬리는 아니꼬운 놈! 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분명 있을 듯 합니다.

본격추리 작가들 중에서는(최정상급 작가 포함) 밴 다인이 창조한 이 매력적인 명탐정의 모조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열과 성의를 다 바치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또 그것대로 괜찮은 것 같다고 생각해 왔지만, 지금와서 오랫만에 파일로 밴스를 다시 만나보니 역시 원조의 벽은 높다는 걸 실감하게 되네요. 따라올테면 따라와봐라고나 할까요.

"스카라베 살인사건"이라고 하면, 밴 다인 작품 중에 그런 것도 있었나 다소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딱정벌레 살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는 바로 그 작품입니다. 원제는, "THE SCARAB MURDER CASE"이기 때문에, 심플하게 번역하면 스카라베 살인 사건이 됩니다. 그러나 "스카라베"라고 하면 일반 독자에게는 의미가 잘 통하지 않으므로 다르게 번역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스카라베란 "쇠똥구리"를 말합니다. 그것을 그대로 "쇠똥구리 살인 사건"이라고 해 버렸다가는 틀림없이 개그소설 비슷한 것 쯤으로 생각하게 되겠지요. 거기서 역자의 머릿속에 쇠똥구리와 비슷하게 생긴 딱정벌레가 번뜩 스치고 지나갔고, 그래서 이 작품이 딱정벌레 살인사건이라는 애매한 제목을 달고 소개되게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지금에 와서야 추측해 보는 것입니다.

물론 쇠똥구리고 딱정벌레고 간에 정작 본인들은 소설속에 전혀 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의 스카라베란 쇠똥구리 모양으로 만들어진 이집트 시대의 장신구를 말합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부적에 스카라베가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스카라베의 유충이 대변 속에서 부화하는 모습을 목격한 고대 이집트 인들이 스카라베에 재생 능력이 있다고 믿게 되고, 더 나아가 스카라베를 죽음으로부터 매일 부활하는 태양신의 심볼로까지 여기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스카라베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이 작품의 플롯에서도 그대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스포일러가 되므로 자세한 언급은 피하지만, 범인이 꾀하고 있는 계획이 바로 그런 스카라베가 지닌 의미와 부합하고 있습니다. 밴스는 범인의 그런 목적을 알아차리고 억울한 피해자가 나오는 것은 막을 수 있었지만, 밴스 가라사대 "가설만 가지고서 사람을 체포할 수는 없어" (400쪽) 라는 사태에 빠집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속, 과연 이집트의 신들은 지켜만 보고 있을 것인가! (초자연적인 미스터리 아닙니다. 오해없으시길).

그러한 배경을 생각하면 이 작품의 제목은 딱정벌레일 수 없으며, 반드시 스카라베 살인 사건이어야만 합니다. 원전에 충실하다는 것과 함께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다는 점에서도 이 책은 의미가 있네요.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이중 삼중의 논리에다 이집트학의 미학까지 더해져서, 그 과도할 정도로 지적인 분위기는 역시 고전 미스터리로서 널리 구전되기에 적합한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다음은 겨울살인사건의 간략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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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이야기: <겨울 살인 사건>
절벽에 둘러싸인 산골짜기 대저택에 뉴욕 사교계의 일원들이 모여들었다. 파일로 밴스도 초대받아 간다. 가자마자 사망자가 생긴다. 그리고 에메랄드 목걸이 도난사건 발생. 때마침 빙상에서는 가련한 미소녀가 심혈을 기울여 피겨 스케이트를 타고 있으며(팁: 김연아를 연상하면서 읽으면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파일로 밴스가 정교함이 극에 달한 치밀한 논리를 전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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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초 간략한 소개가 되어버렸습니다. 자, 거장 S. S. 밴 다인 최후의 작품입니다. 파일로 밴스 마지막 사건이자, 저자에 있어서도 유작이 된 이 작품은, 뼈대라고 할까 초안의 단계까지 밖에 완성되지 않았고, 장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중편에 가까운 분량입니다. 밴 다인은 어느 시기부터인가 작품의 평판이 나빠지다가, 끝내 그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고 고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밴 다인 후반부의 작품이 전반의 작품에 비해서 낮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조금 달라보이기는 합니다. 이 "겨울 살인사건"에 경우에는 당시의 시류에 따른 것인지, 우연히 그렇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미스터리적인 면보다는 통속 소설이나 서스펜스에 가까운 터치가 느껴집니다. 후반부가 되면 갑자기 밴스가 논리적인 설명을 시작하는데, 순간순간 번뜩임은 있어도 전체가 거기에 미처 따라 오지 못한다는 인상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짠돌이처럼 굴어서 야박하게 말하면 그렇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는 것이고 솔직히 말하면 재미만 있네요. 저자의 발언도 있고 해서 억지로 분석해 보았습니다.

밴 다인은 "어떤 탐정 소설 작가도 걸작을 여섯편 이상 쓸 수는 없다" (600쪽)는 바보 발언을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혹시 독자들이 작가본인의 이 말에 집착해 끌려가게 된 것은 아닌지. 즉, 최고 걸작 6편을 제하고 나면 나머지는 저평가를 해야만 한다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하자면 밴 다인에 발언에 대한 끼워맞추기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밴스나, 친구인 마컴 검사, 사랑스러운 히스 경사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한데 말이죠.

마지막으로, 겨울 살인 사건 뒤에 붙어 있는 "탐정소설을 쓰기 위한 스무가지 규칙"은 여러 가지 의미로 재미있네요. 말하자면 당시의 추리소설 작법의 관습에 대한 명문화를 시도한 것인데요, 다른 사람도 아닌 밴 다인 자신이 그 금기를 깨고 있거나, 직업적인 차별 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거나, "탐정소설에서 시체가 빠질수 없으며, 시체는 최대한 확실하게 죽어 있어야 바람직하다."고 쓰여져 있는 등, 단순한 자료 이상의 제법 흥미로운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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