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의 불행학 특강 - 세 번의 죽음과 서른 여섯 권의 책
마리샤 페슬 지음, 이미선 옮김 / 비채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사람의 뇌는 하루에도 수만개의 단어를 떠올린다고 합니다. 생각하고, 상상하고, 묘사하고, 심지어는 자신과 대화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실제로 혼잣말이 되어 입밖으로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온갖 문장이 만들어졌다 사라집니다. 그렇게 쉴세없이 떠벌이고 있는 다른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볼수 있으면 참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것을 소설로 써낸다면 아마도 본서<블루의 불행학 특강>과 비슷한 느낌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블루의 불행학 특강>이라는 수상한 제목도 그렇고, 표지도 그렇고, 첫인상만으로는 무슨 내용인지 도통 그 방향을 짐작하기가 힘들더군요. 게다가 홍보문구가 무려, "문학의 새로운 혁명인가, 아니면 난해한 문제작인가? 칠백여권의 주석과 이백여권의 참고도서가 거미줄처럼 얽힌다!" 입니다. 이래서는 정말로 난해하고 까다로운 책으로 오해하기 쉽상입니다. 800여 페이지나 되는 두께의 압박을 감안하면 더욱 그럴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막상 읽어보면, "아니 이런 소설이 있었단 말인가!!!" 할 정도로 너무너무 재미있고 개성있는 책입니다.

기본적으로는 미스터리 소설입니다. 교수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풍부한 문학적 소양과 지식을 갖추고 있는 천재소녀 "블루" 가 주인공입니다. 나비전문가였던 블루의 어머니는 오래전에 교통사고를 당해 고인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각지를 떠돌아 다니며 유랑생활을 해오던 블루는 스톡턴이라는 곳에 정착합니다. 이곳에 있는 세인트 골웨이 고등학교로 전학을 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이곳에서 블루는 미모의 여교사를 중심으로 한 귀족학생들의 정예모임에 초대받아 끼게 됩니다. 한동안 이들과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일상들을 그려나가는 것 같던 이야기가 멤버중 한명의 죽음을 발단으로 해서 본격적으로 미스터리로 변해 갑니다.

죽음뒤에 감추어진 진실을 블루가 파헤쳐갑니다. 가상의 단체, 사건들이 자연스레 뒤섞여 만들어내는 결말이 흥미롭습니다. 여기까지 도달하는 동안 제임스 조이스의 난해하기로 유명한 고전 율리시스를 위시해서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언급됩니다. 우선은 각 장의 제목부터가 오셀로에서부터 실낙원, 레이먼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 소설인 빅슬립에 이르기까지 36권의 문학 작품의 제목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습니다. 제목뿐만 아니라 그 작품들은 각 장의 모티브가 되고 있기도 합니다. 대충 분위기는 상상이 갈런지요. 문학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소녀탐정 이야기? 그것도 틀리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것만으로는 그리 난해하다고까지 할만한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애매모호한 문구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느냐. 참 설명하기 쉽지 않은 특이함이 있는 책입니다. 일단 주인공은 아이큐 175의 천재라는 설정입니다. 이런 설정일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작가는 주인공의 입을 빌려서 쉴세없이 박식함을 쏟아냅니다. 문학작품을 필두로 해서 수학, 과학, 역사, 사회문제에 이르기까지 온갖 잡학들이 꽉꽉 채워져 있습니다. 베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잠이 솔솔 들것 같은 두께의 책안에서 지식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그런 해박한 지식이 묘사나 비유, 설명하는 도중에, 혹은 재기발랄한 유머속에 섞여서 시시때때로 묻어나옵니다. 다만 그런 지식들이 이야기 진행에 있어서 필수가 되거나 깊숙히 파고드는 것은 아닙니다. 주석이라고는 하지만 따로 지면을 할애해 흐름을 끊는다거나 하는 식도 아니구요. 박학다식한 주인공의 이야기하는 방식이 그렇습니다. 예를 들자면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사소한 것까지도 만화 주인공이나 에피소드들과 비교해서 이야기 하듯이, 조금은 장황할 정도로 다른 지식(특히 문학작품)과 연관지어 사물을 묘사하고 상황을 설명한다면 맞을까요. 소설의 스타일에 대해 정의를 내리기가 난해한 면은 있지만 결코 스토리 자체가 난해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게 이 소설의 매력입니다.  

그런면에서는 인터넷 블로거들의 글쓰는 방식과도 비슷합니다. 좋아하는 이야기를 하다보면 사소한 것 하나에도 자신에 생각에 대한 부연설명이 붙죠. 그러고나면 또 거기에 대한 설명이 하고 싶어집니다. 아는 것이 있다면 남김없이 다 쏟아내고 싶어하죠. 잡설이라든가 다양한 생각들을 집어넣고 나면 분량은 늘어나지만 본래의 주제를 떠나서 읽는것 자체가 즐거운 글이 됩니다. 애초에 작가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즐기면서 썼다는 인상이 강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분위기에다, 사색이 많은 조금은 내성적인 주인공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작가의 쾌활함이 전해져 오는 것 같습니다. 활짝 웃고 있는 미녀작가의 사진을 미리 본 탓에 선입관이 자리잡고 있는 탓지도 모르지만요. 문장마다 참신한 표현이나 기발한 묘사들이 속출하기도 하구요. 신세대적 발상이 돋보이는 소설입니다. 다만 그 해박한 지식에서 기인하는 무게감만은 여느 기발함이나 참신함 만으로는 흉내낼수 없는 본서만의 확실한 차별화 요소입니다.

외국 청소년들의 스쿨라이프를 들여다보는 재미, 낸시드류 같은 소녀탐정이야기를 떠올리게도 되구요, 문학모임에라도 슬슬 다녀온것처럼 지적으로 충만한 느낌도 있습니다. 사회문제와도 얽히는 깊이있는 미스터리를 즐길수도 있고, 다 읽고나면 잡학사전 하나를 통째로 읽고 난듯한 포만감마저 느껴지네요. 다양한 감상이 공존하는 소설입니다. 이것저것 다 들어있다고 해서 결코 B급소설의 그것처럼 난잡하지도 않구요, 혹여 실험적이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상당히 안정적이고 완성도가 높습니다. 사소한 것부터 큰것까지 반전이라 할만한 극적전환도 여러번 등장하지만 결코 머리 아프게 꼬여있지는 않습니다.

섣불리 다가가기 힘든 첫인상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 넘어서면 새로운 경험을 할수 있습니다. 이렇게 읽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 책을 읽지 못했다면 이 작가의 후속작이 나오지 않는 한은 절대로 이것과 같은 재미를 맛볼수 있을리가 없거든요. 박식함과, 문학적 재능과, 신세대적인 감각을 모두 갖추고 있지 않으면 쓸수 없는 재기 넘치는 소설입니다. 활자하나, 문장 하나 하나에도 개성이 묻어나옵니다. 지적이면서도 발랄합니다. 기말고사 있는 소설 보셨나요? 이야기가 모두 끝난뒤에는 독자를 상대로 한 기말고사 문제가 출제됩니다. 전체적인 내용을 얼마나 숙지하고 있는지 확인하는(소설안에서 언급되는 다른 문학작품에 관한 것이 아니라 스토리에 관한) 테스트이기 때문에, 만점을 목표로 하는 사람은 몇번이고 또 읽고 싶어질지도 모릅니다. (센스!) 이런 소설이 또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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