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벽 트루먼 커포티 선집 5
트루먼 카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트루먼 카포티의 세계에 입문하는데는 이 단편집이 최적일지도 모른다. <생일을 맞은 아이들>과 같은 어린시절 자기자신의 전기적인 작품에서부터, <미리엄>이나 <차가운벽>같은 , 차가운 도시의 어둠이 엿보이는 듯한 것들까지, 이 한권으로 카포티의 여러가지 시선과 그 정신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항상 비애감을 머금고 있는 특유의 유머와 순수함과, 그것들에서 비롯되는 잔혹함. 전편에 감도는 부유감, 손바닥에 느껴질 것 같은 섬뜩한 촉감. 카포티의 작품은 소설이라 하기보다는 한편의 시, 때로는 한장의 그림과 같기도 하다. 무서우리만치의 아름다움으로 채워져 있다.

과연, 단편집이란 이런 것도 될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한다. 이 책은 특정 주제의 작품들만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카포티의 다양한 면을 모두 맛볼수 있도록 편집된 작품집이지만, 만약 다른 식으로 편집했다면 또다른 형태의 단편집도 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카포티의 생각의 파편들이 여기저기 마구잡이로 흩어져 있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각 단편들은 모두 어떤 특정한 주제하의 닮은꼴 작품들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들 중 최고 걸작만을 선별해서 즐길수도 있을 터이고, 공통되는 주제의 작품들만을 뽑아내어 읽는 것도 좋다. 카포티였다면, 본인의 소년 시대가 모델이 된 작품들만을 모아낸다거나, 뉴욕이 무대가 된 것들을 모아낸다거나 하지 않았을까.

<에덴으로 향하는 길 사이>는, 표표한 맛이 있고, 유머러스하기도 하지만 조금은 블랙. 카포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기뻐할만한 작품일 것 같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머리없는 매>. 머리카락을 소년처럼 짧게 자른 기묘한 행색의 여자, D. J. 차가운 쇠붙이가 피부에 와 닿을때와 같은, 섬뜩한 감촉이 있는 단편이다. 미스터리어스한 분위기가 있어서, 읽고 있으면 왠지 미궁속을 헤맨고 난듯한 감각이 남는다.

만약 내가 편집을 한다면 이 단편들을 어떤식으로 조합해 낼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읽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이 책에 실린 스무편의 단편들 중에서 개인적으로는 어린시절 카포티 자신의 자전적 요소가 강한 몇몇 작품들이 특별히 마음에 든다. <어떤 크리스마스>에서의 아버지를 향한 생각도 감동적이지만, <추수감사절에 온 손님>, <크리스마스의 추억>등에 등장하는 버디와 숙의 교류가 매우 감동적이다. 버디라는 이름의 주인공 소년에게는, 카포티 자신의 모습이 현저하게 투영되어 있다. 숙은 버디와는 할머니라도 해도 좋을 정도의 나이차가 있는 먼 친척뻘, 버디도 그렇지만 숙 역시도 60이라는 나이를 넘기고서도 때묻지 않은 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그런 인물이다.

부모님에게 버림을 받은 카포티는 네 명의 사촌들이 사는 집에 맡겨지게 되고, 그곳에서 숙과 사이좋게 지내게 된다. 그런 체험이 이 단편들의 소재가 되고 있다. 11월 하순의 어떤 아침, 숙이 "과일 케이크를 만들기에 좋은 날씨네!" 하고 외친다. 그 때부터 버디와 숙은 크리스마스에 모두에게 나누어주기 위한 과일 케이트를 만들기 시작한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자르러 숲으로 간다. 서로에게 줄 선물을 준비한다. 이 <크리스마스의 추억>에는 유독 가슴이 반응한다. 그동안 잊고 있던 어린시절의 순수함을 떠올리게 해주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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