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의 땅 ㅣ Medusa Collection 5
니키 프렌치 지음, 노진선 옮김 / 시작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MRI나 CT같은 의료기기가 아직 도입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군대에서 허리디스크로 통증을 호소하다가 꾀병이나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요즈음에도 그와 비슷한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다. 증상이 눈에 보이는 경우라면 그래도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라는 병명같지 않은 병명이라도 얻게 되지만, 증상이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 환자의 경우는 정신과 치료를 권유받는 경우가 많이 있는 듯 하다.

이런 환자중 십중팔구는 어김없이 '심인성'으로 시작하는 병명을 얻게 된다. 한마디로, 있지도 않은 병을 심리적인 요인에 의해 환자가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저지르지도 않은 죄로 억울하게 하게된 옥살이라면 그래도 끝까지 믿어주는 가족이라도 있을수 있지만, 의사의 진단을 받은 환자는 더이상 반박에 여지가 없는 명백한 정신질환자 반열에 올라서게 되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논란이 되어오고 있는 것처럼 이런 정신과적 발상은 참으로 위험하다. 이 세상에는 어떤일도 벌어질수 있는 것이건만 사람들은 보이는것, 확인된 것만 믿으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당사자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아닐수 없다. 이 소설속 여주인공이 처한 암담한 상황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는 한 여자가 결박된채 눈은 가리워지고 입에는 재갈이 물린 상태로 어둠 속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여자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 심지어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녀의 이름은 애비. 서서히 기억은 돌아오지만 자신이 왜 여기에 이렇게 놓여있게 된 것인지 그 시점의 기억만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다. 그때 귓가에서 들려오는 낮선 남자의 목소리. 애비는 이 남자에 의해 자신이 이곳에 납치 감금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정체불명의 범인은 납치의 목적은 밝히지 않고 이따금 그저 물을 먹이고 대소변을 처리해주러 와서는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듯 애비가 처한 상황을 지켜보며 즐기고 있을 뿐이다.

밀폐된 공간에 갇혀 보이는 것도 없고, 들리는 것도 없고, 기억도 희망도 사라진 공포. 이 초반부 진행의 임팩트는 대단히 강렬하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이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범인을 회유하기도 하고 혐상을 시도하기도 하고 용감하게 저항도 해보지만 결국 모든것이 무의미함을, 결국 자신은 이 자의 손에 죽게 될 것임을 애비는 깨닫는다. "애비, 열심히 노력하는 애비. 언제나 울었던 켈리. 그리고 노력하는 애비. 운율도 딱딱 맞는걸. 울고, 노력하고, 죽다cried tried died. 네가 어떻게 나오든 내게는 마찬가지야. 결국에는 다 똑같지." (50쪽)

그러다 뜻밖에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고, 애비는 필사의 탈출을 감행해 결국 성공한다. 그러나 극도로 숨막히는 장면이 지나고 이제 모든 악몽에서 벗어나게 되는가 싶던 애비에게 곧바로 또다른 형태의 악몽이 찾아온다. 병원에 실려와 사건에 대해 증언하는 애비를 보면서, 이제 남은 것은 정체불명의 범인과 경찰과의 쫓고 쫓기는 추격적일 것이라는 독자의 예상은 무참히 빗나가고 만다. 증거라고 할만한 것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애비는 여전히 어떠한 기억도 떠올리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기억이 없는 그 시간에 실재했던 것으로 밝혀진 일련의 에피소드들은 애비가 현재 심리적으로 상당히 흔들리고 있는 상태임을 암시하는 것들 뿐, 거기에 뒤늦게 밝혀진 정신과 병력까지 더해져서 피해자로서의 진술들은 신빙성을 잃어간다. 기억의 공백을 채워넣기 위해 혼자 잃어버린 날들을 조사하면서 애비는 끊임없이 자문한다. 왜 이런 끔찍한 일이 내게 일어난 걸까?  내게 일어난 일이 내 탓은 아닐까? 내가 이 끔찍한 사건을 자초한 것은 아닐까? 과연 나에게 그런일이 실제로 일어나긴 한걸까?

정체불명의 적, 자기자신에 대한 의문, 주위의 시선, 삼중고와 싸워야하는 애비의 투혼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수 없는 울창한 숲속에 나침반도 없이 홀로 버려진 듯한 긴장감이 시종일관 계속된다. 자신을 바라보는 주위의 조심스러운 시선들, 애비에게는 그것 자체가 하나의 심리적인 공포다. 상식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는 진실을 사람들은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마지막 애비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봄이 오고 있어요.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죠."

애비에게는 한없이 가혹하지만 대신에 독자로서는 최상의 스릴을 만끽할 수 있었으므로 작가를 비난할 마음은 들지 않는다. 재미있는 사실은 니키 프랜치라는 이름은 한명의 작가가 아니라 공동작업을 하는 니키 제라드, 숀 프렌치 부부의 각자의 성과 이름을 따서 만든 필명이라는 것. 그래서 그런지 산자의 땅은 스피디 하고 선굵은 남성작가의 면모와 여성특유의 섬세한 심리묘사가 공존하는 중성적인 소설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그런 점도 있어서 이 소설의 재미는 독자의 취향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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