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내가 죽은 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영미 옮김 / 창해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는 가장 좋아하는 작가중에 한명이라 최근에 나온 작품은 빼놓지 않고 반드시 챙겨본다. 그런데 작가의 경력을 반으로 나누어 전반부의 작품들을 보면 후반부에 나온 작품들에 비해서 솔직히 투박한 감이 없지 않다. 실제로 독후의 감상에서도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이 사실이고. 전에는 이 작가의 책은 모조리 읽어주겠다고 혼자 목표를 세우기도 했었는데, 그런 이유로 지금은 왠만하면 초기작은 피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 옛날에 내가 죽은집만은 예외로 이렇게 읽게 된 이유는, 의미심장한 제목, 그리고 문고판 원서의 표지디자인이 인상에 강하게 남아있어서 언젠간 꼭 읽겠다고 오래전부터 벼르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나카노는 지금은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는 옛 연인 사야카로부터 갑작스레 연락을 받는다. 오랫만에 만난 그녀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에서 발견한 한장의 지도와 열쇠를 보여주면서 이 지도가 가르키는 곳으로 함께 가달라는 뜻밖의 제안을 해온다. 이곳에만 가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어린시절의 기억을 어떻게든 되찾을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기억을 되찾을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기대로 무작정 찾아간 집. 이미 그 집은 폐허처럼 변해 있는 상태. 집 안 곳곳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들이 잇달아 출몰한다. 수북이 쌓인 먼지, 빛도 제대로 들지 않는 어스름하고 축축한 실내, 모든 시계가 11시 10분에 멈춰버린 공간. 마치 안개 속을 헤매는 듯한 답답한 심정과 등골이 오싹해지는 한기에 휩싸여 있는 그곳에서 그들은 오래된 일기장과 봉투가 없이 내용물만 남은 편지 더미를 발견하고 베일에 싸인 수수께끼를 하나씩 풀어나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어렴풋하게 비극을 예감하게 되고, 마침내 드러나는 집의 정체와 수수께끼의 진상은...

등장 인물은 나카노와 사야카 단 두명(물론 상상하는 장면이나 회상신에서는 다른 인물도 등장하지만). 무대는 거의 이 수상한 집안에 한정되어 있고, 전날부터 다음날의 아침까지라는 역시 매우 한정된 시간 안에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이렇게까지 제한된 요소들이 많다는 점에서는 본격추리에서도 멋지게 진가를 발휘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성향으로 봐서 얼핏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시리즈 같은 밀폐된 공간에서의 살인사건을 떠올릴수도 있겠다. 으스스하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이 집은 그런 특수하게 설계된 구조물은 아니다. 게다가 단지 둘밖에 없는 마당에 살인사건따위를 일으켰다가는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집안에서 단서들을 발견해내고 거기서 알게된 정보들을 통해 사야카의 과거를 유추해내는 식으로 진행된다. 필요 최소한의 등장 인물과 한정된 무대, 만 하루라는 짧은 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정된 재료안에서 계속해서 튀어나오는 의문점들, 그리고 그 누적된 수수께끼가 단번에 풀려나가는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긴장감이 상당하다.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의 소설에는 헛되거나 의미없는 문장이 없다. 등장 인물의 사소한 행동이나 대사. 또는 그저 스쳐지나가면서 보게 된 것등등, 읽고 있을 때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듯 하던 것까지도 반드시 결말에서 하나로 모아진다. 아니 그런것까지 복선이었나 할 정도로 복선, 복선의 대행진. 이과계 출신 작가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미지처럼 군더더기 없이 철저하게 계산된 글을 쓴다는 느낌이 강하다. 호러, 미스터리,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가 되고 있는 묵직한 소재와 거기서 비롯되는 안타까운 전말. 이 소설은 단막극과도 같다. 이 상태 그대로 무대의 각본으로서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정말로 어느날 대학로 어딘가에서 "옛날에 내가 죽은집"이라는 제목의 연극포스터를 보게 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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