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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고래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이윤정 옮김 / 손안의책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메피스토상 수상작가인 츠지무라 미즈키의 세번째 작품. 데뷔작인 <차가운 학교의 시간은 멈춘다>가 고등학생의, 두번째 작품인 <밤과 노는 아이들>이 대학생들의 학창 생활과 사적인 이야기들을 담아내고 있었다면, <얼음 고래>에서는, 신진 여류 사진가인 '아시자와 리호코'의 고교시절을 그리고 있다.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아이들의 생활과 내면의 갈등을 그려내는데에 탁월한 모습을 보여주던 작가의 특징은 그대로이지만, 앞선 두 작품이 미스터리에 중점을 두고 있었던데 반해서, 이 책에서는 어떤 사건들을 겪으면서 주인공인 리호코가 정신적으로 성숙해져 가는 모습이 주가 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실제로는 SF적인 요소, 미스터리적인 요소등 다양한 장르의 특징이 공존하는데다가, 후지코 F 후지코(도라에몽의 원작자)라는 대작가에 대한 경의를 표현하는데 많은 공을 들이고 있기도 한, 조금 이상한 SF(sukoshi-fushigi, すこし ふしぎ)소설이지만, 어쩐지 나는 보통의 성장소설로서 이 책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작가의 장점인 십대들의 감정 묘사는 더욱 현실적이고 세밀해졌다. 솔직히 다른 요소들을 모두 배제하고 순수하게 청춘소설이나 성장소설로 썼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데뷔작을 읽었을 때까지만 해도 츠지무라 미즈키라는 작가의 작풍은 미스터리와 아주 궁합이 맞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작가가 쓰는 아픈 심리 묘사는 너무 진지하고 소녀취향인 면도 있어서 조금은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어서, 현실에서 어느정도 떨어진 상황에 놓였을 때에야말로 비로소 그 예리함이 빛을 발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다. 그러나 얼음고래를 읽고 나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츠지무라 미즈키의 묘사 능력은 이미 어느 한정적인 상황에서만 제대로 발휘되는 단계를 넘어서고 있다. 굳이 미스터리나 SF라는 형식을 빌려오지 않아도 충분히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의 작가로 성장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츠지무라 미즈키가 그리는 미스터리도 읽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미스터리 작가로서의 능력은 대단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데뷔작인 <차가운 학교의 시간은 멈춘다> 만 해도 적당히 참신하고 재미있는 소재였지만, 두번째작품이나 이 소설에서의 미스터리적인 요소는 그다지 눈에 띄는 부분이 없는 것 같다. 차라리 미스터리를 떼어내고 순수하게 강점인 소설속 인물들의 성장해가는 이야기를 그려보면 어떨까하고 생각했다.
이 책에서는 여고생인 주인공의 특유의 생각하는 방식을 세밀하게 그리면서,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람들과의 만남에 의해 그녀가 잘못된 것들을 깨닫거나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거나 하는 청춘 소설, 혹은 성장소설을 기본으로 거기에 약간의 미스터리 적인 요소가 덧입혀진 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미스터리에 대해서는 앞서 말한대로 크게 감명깊지는 않지만, 청춘소설, 성장소설로서는 상당히 좋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세세한 부분들을 제외하면 소설로서의 전개는 최상이다. 특히 주인공과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엄마의 관계가 부각되는 클라이막스 부분에서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정을 느낄수 있었다. 아마 내가 어린 소녀였다면 어쩌면 이부분에서 실제로 울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도라에몽의 주머니속 신비한 도구들을 매개체로 해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방법도 꽤 재미있었고, 무엇보다 이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참신한 요소이다.
심리 묘사로 말할 것 같으면,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고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성향을 가진 주인공이 주위와의 작은 위화감에 사로잡혀 갈등하는 모습을 더이상 세밀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려내고 있다. 스스로 생각이 깊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 게다가 자신이 머리가 좋다는 점까지 잘 알고 있는 경우에,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한 발 앞서 생각하게 되고, 그것이 자신만의 생각과 척도에 얽매여 무의식 중에 타인을 무시하고 경시하게 되는 과정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리호코를 응원하는 친구로서의 시선과 그녀의 성장을 바라는 어른의 시선 양쪽 모두를 경험 할 수 있었다. 사람들과의 관계로 고민하는 리호코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마치 내가 리호코 또래의 고교생 친구가 되어 듣고 있는 것처럼 리얼리티가 느껴지지만, 그녀가 자진해서 위험한 상황 속으로 말려들어 가는 장면과 마주하면, 그때는 또 내가 어른의 입장에 서서 한 소녀의 심리적인 방황을 걱정스레 지켜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인물에 감정에 깊이 몰입하면서도 결코 객관성을 잃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소설가로서는 노련한 경지에 도달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작품을 쓰던 당시에 불과 이십대 중반이였던(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작가의 젊음이 발휘되어 만들어진 결과가 아닐까 싶다.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 왔기에 그 나이에 이런 역량을 지닐수 있게 되었는지, 조금 불가사의 (SF sukoshi-fushigi)한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을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