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책
기예르모 마르티네스 지음, 김주원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독특한 스타일의 심리 미스터리라고 하는게 가장 좋을것 같다. 천편일률적인 추리, 스릴러물에 식상함을 느끼는 사람들이나 고도의 심리 전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단연 추천하고 싶은 작품. 일단은 추리소설적인 요소가 강조되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딱히 어느 특정 취향의 독자들만을 만족시킬 소설은 아니다. 가능하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한권씩 나눠주고 그 감상을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나뿐만 아니라,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아마 누구라도 그런 마음이 들게되지 않을까. 그런 특별한 요소가 이 소설에는 분명 있다. <옥스포드 살인 방정식>의 기예르모 마르티네스 작품. 

주인공에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오는 장면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뜻밖에도 십년전, 잠시 주인공에게 타이피스트로 고용된 적이 있었던 '루시아나. B' 라는 이름의 여자. 주인공과 루시아나의 인연은 이렇다. 십년전 소설가인 주인공은 팔을 다치는 바람에 글을 쓸 수 없어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었고, 이 때 마침 해외에 나가 부재중이였던 당대 최고이자, 천재, 괴짜작가인 클로스터의 타이피스트였던 루시아나를 출판사의 소개로 임시로 고용하게 된다. 젊고 매력적인 루시아나와 함께 작업을 하면서 애틋한 감정을 가지게 된 주인공은 어느날 키스를 하려고 하지만 그녀는 의외로 크게 반발하면서 그대로 작업실을 나가 버렸다. 그것이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의 전부. 

그렇게 잠깐의 인연으로 스쳐지나갔던 그녀가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와 지난 십년간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차례차례 죽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범인은 대작가인 클로스터라는 황당한 말과 함께. 주인공의 집을 방문한 그녀는 예전에 싱그러운 모습을 도저히 찾아볼수 없을 정도로 흉하게 변해버린 외모와, 잔뜩 겁에 질려 히스테릭한 상태였다. 주인공과 헤어진 다음, 어떤 사건을 계기로 그녀는 클로스터의 인생에 큰 타격을 주게 되었다. 그 이후로 십년이라는 세월동안 그녀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씩 사고사로 목숨을 잃었다. 맨 처음은 그녀의 남자친구, 그리고 부모님, 오빠까지. 남은것은 그녀와 젊은 시절의 그녀를 쏙 빼닮은 여동생뿐. 루시아나는 그 일련의 사고사가 모두 클로스터의 교묘한 계획임에 틀림없다면서, 클로스터가 어떤 식으로 사고사로 위장하여 살인을 저지를수 있었는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주인공에게 클로스터를 만나 자신에게 그런짓을 하는 이유를 물어봐 달라고 한다. 주인공은 마지못해 클로스터를 찾아간다. 

이 소설은 특이하게도 사건의 해결이라는 요소가 없다. 보통의 추리소설이라면 일단은 사건이 발생하고, 탐정역을 맡은 등장인물중 누군가가 단서를 모으고 사건을 해결하게 되는게 정석이자, 당연한 과정이다. 방법이나 기교상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찌되었든 독자는 난해하게만 보이던 사건이 해결되어 가는 과정을 보면서 감탄하고 재미를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살인자의 책>에는 그런 탐정역을 하는 인물이 없다. 이 책에서 주인공은 철저하게 독자의 대리인 같은 역할을 한다. 루시아나와 클로스터, 두 인물을 왔다갔다 하면서 독자를 대신해 이야기를 듣고, 질문을 하는 역할. 두 인물에 모순된 주장 사이에서 주인공은 종종 갈등을 하지만, 그것은 곧 그 시점에서 독자가 느낄 갈등이기도 하다. 주인공의 그런 갈등은 그것 자체로 어떤 결론을 끌어 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점에서의 독자의 생각을 정리하고 환기시키기 위한 시츄에이션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과거 어느 시점의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 대립하고 있는 두 인물이 각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상반된 견해. 그들의 미묘한 심리 변화를 관찰하고, 거기에 양면성이라고 할만한, 각 인물의 숨겨진 면을 교묘하게 보여주면서, 거기에서 받게되는 인상으로 독자가 자신만의 심증을 만들어가게 하는 일련의 과정이 굉장히 치밀하다. 사람을 믿을 것인가, 상황을 믿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철학과 기하학에 근거한 확률을 신뢰 할 것인가. 모든 것은 독자의 몫이다. 굳이 이 책의 느낌을 이야기하자면, 내가 직접 중재자가 되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 입장, 혹은 판사나 배심원이 되어 판결을 내려야 하는 입장에 놓여있는 것 같다. 다른 소설에서는 독자가 등장인물의 생각과 판단을 따라가는 입장인데 반해서, 이 책에서는 독자가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상당히 능동적인 입장에 놓이게 된다. 그런만큼 그 흡입력도 대단하다.     

사람이 사람의 죄를 판단해야 하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증거가 확실하게 존재할리 만무하다. 결국은 판결을 내리는 자가 어떤 인상을 받고 어느쪽으로 마음이 움직이게 되느냐가 큰 영향을 끼칠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법적인 시스템이 존재하고는 있지만, 변호사의 실력에 따라 판결에 차이가 나는데서 보듯이 역시 인상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 판결이 과연 타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세상에는 죄를 짓고도 버젓이 돌아다니는 사람들, 혹은 저지르지도 않은 죗값을 억울하게 치루고 있는 사람들이 상상이상으로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일이라도 벌어질수는 있다. 보이지 않는 진실에 대해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그 어떤 일중 하나를 찍는 것과 다를바가 없는 것 같다. 여운이 오래 남는 소설은 있었지만, 책을 읽고 난 뒤에 이렇게 오랫동안 머리를 굴리게 한 책은 없었다. 내가 간과한 부분은 없는지, 혹여 잘못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 있지는 않은지, 다른 사람은 어떤 결론을 내릴런지, 다른 독자의 감상이 너무 궁금하다. 읽은 사람끼리 한데 모여서 토론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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