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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미궁
티타니아 하디 지음, 이원경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역사책이나 교과서에서나 만날수 있는 인물이나 사건을 재조명하고, 비록 픽션에서나마 그것들을 가까이서 지켜볼수 있다는 점이 팩션의 매력이자 묘미라고 생각한다. 실제 역사와 허구가 교묘하게 결합되어 만들어진 이야기에서는, 때로는 숨겨져 있던 비화를 듣고 있는 듯한 흥분과 쾌감을 선사받게 되기도 한다. 장미의 미궁은 지금으로부터 약 사백년 전 르네상스 시대의 인물인 존 디와 그가 남긴 문서의 비밀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모험담. 지금까지 보지 못한 독보적 스타일의 팩션이라는 홍보문구가 단연 호기심을 자극하는데다가, 다빈치 코드의 성공 이후에 우후죽순 처럼 쏟아지는 이런 류의 소설에 슬슬 질려가고 있기도 해서, 과연 어떤 소설이기에? 하는 궁금증이 고개를 쳐들었다.
16세기말경에 실존했던 존 디 박사라는 인물이 자신의 가문의 딸들에게 고문서가 들어있는 비밀상자를 남긴다. 이야기는 사백년 후 존디의 후손인 윌에게서부터 시작된다. 어머니로부터 열쇠와 수수께끼 같은 글귀가 담긴 양피지 문서를 물려받은 윌. 윌은 돌아가시기 직전에 어머니가 그에게 보낸 엽서를 뒤늦게 발견하고 엽서에서 가리키는 장소인 샤르트르 성당으로 향한다. 성당에 도착한 윌은 상당 바닥에 미로를 발견하고, 미로를 직접 걸으면서 자신이 물려받은 문서와 열쇠의 수수께끼를 풀게 된다. 그러나 비밀을 풀었다는 기쁨도 잠시, 의문의 사고사를 당한 윌. 그의 유품은 이 번에는 형인 알렉스에게로 전해진다. 사랑하는 동생을 잃은 알렉스의 앞에 등장한 비밀조직. 월터스라는 인물이 이끄는 이들은 존 디 박사가 남긴 문서의 비밀을 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알렉스와 그의 환자인 루시를 협박해 온다. 한편 이들을 피해 문서의 비밀을 파헤쳐 가던 둘은 휴거라는 광신도 집단의 존재를 알게 된다.
장미의 미궁은 알렉스와, 그의 환자이자 연인으로 발전해가는 루시가 사백년전부터 대대로 물려져 내려온 문서의 비밀을 풀어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비밀을 밝혀내기 위한 과정은, 단순히 퍼즐이나 수수께끼를 푸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당시에 대립구도를 형성하고 있던 종교들, 신화와 문학, 그리고 점성술, 천문학등 수많은 학문들을 아우르는 방대한지식이 동원된다. 조금 과장하자면 지식의 총합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이야기는 지적 호기심의 충족이라고 하는 면에서 소설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는 묵직함이 있다.
고문서에 얽힌 비밀을 풀어가는 스토리가 베이스이지만 그 외에 알렉스와 심장 이식 수술을 받은 루시와의 로멘스가 단연 볼거리이다. 그렇다고 메인스토리에서 갈라져 나오는, 양념같은 사이드 스토리로서가 아니라, 타인의 심장을 이식받은 루시에게 일어나는 '세포기억' 이라는 현상과 그것으로 인해 문서의 비밀에 한발짝 다가서게 되는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나중에 한갈래에서 만나게 되는 전체 스토리의 한 축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만 뚝 떼어내어도 하나의 개성있는 스릴러를 만들어 낼수있을 것 같은 흥미로운 소재인데, 이렇게 다양한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그 인기만큼 팩션은 진보하고 있구나 하는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독보적 팩션이라는 말은 독특하다라는 의미보다는, 기존의 작품들보다 업그레이드 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다. 다양한 시도와 작가의 박식함이 돋보이는 소설이였다. 그것들을 이야기 안에 녹여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수많은 팩션을 찾아 읽으면서, 최후에 밝혀지는 놀라운 비밀이라는 것에 면역이 되어서일까, '세포기억' 과 기억의 전이라는 부분이 더욱 인상에 남는다. 표지에서 받게 되는 고풍스럽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이야기에서 고스란히 느낄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다만, 역사속의 인물이라고는 하지만, 존 디라는 생소한 인물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었는 만큼, 거기에서 오는 재미를 모두 만끽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