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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진 수어사이드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8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이화연 옮김 / 민음사 / 2025년 2월
평점 :
N25048
자살의 반대말은 살자라고 한다. 예전에는 어차피 언젠가는 죽을텐데 왜 자살하지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좀 바꼈다. 얼마나 힘들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으로 말이다. 누군가의 아픔의 크기는 타인이 감히 평가할수 있는게 아니라고 본다.
이번에 <버진 수어사이드>를 읽으면서, 아 자살이 절실한 사람도 있겠구나 라는걸 다시금 깨달았다. 남아있는 유일한 선택지가 자살일 만큼 궁지에 몰린 사람의 고통을 감히 상상할 수 없지만 말이다. 이 책은 다섯자매의 자살을 다루고 있는데, 첫 문장부터 강렬하다.
[그날 아침은 리즈번가에 남은 마지막 딸이 자살할 차례였다. 이번엔 메리였고, 터리즈처럼 수면제를 삼켰다, 집에 도착한 두 구급 요원은 이젠 칼이 들어 있는 서랍이며 가스 오븐, 빛줄을 맬 만한 지하실의 들보가 어디 있는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훤히 알고 있었다.] P.11
시작은 다섯재매의 막내 서실리아였다. 책에 이유는 나오지 않지만 열세살이던 그녀는 손목을 그어 첫번째 자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다행히 자살은 미수로 끝나고 그녀는 입원한다. 그동안 리즈번 가족은 다섯자매를 철저히 통제했었다. 다섯 자매의 취미, 사람들과의 만남, 복장 등 모든 분야에서 말이다. 그들이 여자여서 그랬던건지, 아니면 종교적인 이유 때문인건지 그들에게는 자유가 없었다.
["열세 살의 서실리아에겐 친구들과의 유대를 위해서도 그 또래 소녀들이 좋아하는 화장을 하도록 허락해야 한다. 공유된 관습을 따라 하는 것은 정체성을 찾아 나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단계이기 때문이다."] P.33
서실리아의 자살기도 사건 이후 리즈번가는 변한다. 의사의 조언에 따라 잠시나마 약간의 자유를 주고, 남편은 아내를 설득해서 집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파티를 열어주기까지 한다. 하지만 파티날 서실리아는 창문밖으로 투신한다. 저번이 구조신호 였다면 이번에는 진짜였다. 그녀는 왜 그런 선택을 한걸까?
["아가. 여기서 뭐 하는 게나? 너는 아직 사는 게 얼마나 끔찍해질 수 있는지 알 만한 나이도 아니잖니." 그제야 서실리아는 유일한 유언이라고 할 만한 말을 내뱉었다. 이미 고비를 넘긴 그 시절엔 필요가 없었지만 말이다. "분명한 건요, 선생님은 열세 살 소녀가 돼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P.16
이후 리즈번가(특히 부인)는 남은 네자매를 더 통제하기 시작한다. 급기야는 학교도 못가게 하고 집에만 가둬둔다. 주위사람들의 시선도 무겁다. 주위사람들은 리즈번가의 가족을 진심으로 위로하지 못하고, 그저 머뭇거리고 구경하기만한다. 자신들에게 안좋은 영향을 줄까봐 피하기만 한다. 좀 더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렇게 리즈번가는 이웃으로부터 소외당하고, 한참 꿈많았을 네자매는 그저 집에서만, 네 자매끼리만 지내게 된다.
["ALS(자살로 죽은 청소년)의 형제들이 슬품을 극복하려는방편의 하나로 자학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다. 한 가정 내에서 자살은 반복될 확률이 높다." ] P.205
누군가의 자살은 가족에게 큰 악영향을 준다. 가족중 누군가가 자살을 하면 남은 가족도 자살의 위험에 노출되기 쉽다. 하지만 이는 일반적인 상식일뿐, 중요한건 남아있는 사람에 대한 이해와 치료다. 하지만 누구도 네자매에게 이를 해주지 않았다. 특히 리즈번가 부모는 모든 원인을 외부에서 찾으려고 하었는데, 사실 가장 큰 원인은 집안, 부모에게 있었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자살은 러시안룰렛과도 같다. 총알은 오직 한 개의 약실에만 들어 있다. 리즈번 자매들의 경우에는 모든 약실에 총알이 들어 있었다. 부모의 학대라는 총알. 유전적 성향이라는 총알. 시대적 병리라는 총알. 피할 수 없는 관성의 법칙이라는 총알. 나머지 두 개의 총알에는 딱히 이름을 붙일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약실이 비어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P.320
결국 견디다 못한 네자매의 유일한 탈출구는 자살이었고, 네자매는 같은날 다른 방법으로 함께 자살을 시도한다. 그렇게 해야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나갈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끝에는 과연 뭐가 있을까?
[중요한 건 오직 우리가 그들을 사랑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부르는 소리를 과거에도 듣지 못했고 지금도 들지 못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나무 위 집에서, 가늘어저 가는 머리카락과 물렁한 뱃살을 하고, 그들이 영원히 혼자 있기 위해 간 방, 홀로 죽음보다 더 깊은 자살을 한 곳, 퍼즐을 완성할 수 있는 조각들을 영원히 찾아낼 수 없을 그곳에서 나오라고 그들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P.322
타인의 아픔을 감히 재단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죽는것 보다는 살아있는게 좋다고 말하고 싶다. 주변 누군가가 자살을 생각한다면, 자살의 징조가 보인다면 먼저 손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 그들의 시도는 자신들을 이해해 달라는, 도와달라는 구조 신호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Ps. 자살이라는 소재여서 처음에는 무겁게 느껴질수 있는데, 읽다보면 엄청 심각하지는 않고 희극적인 요소가 많아서 나름 재미있다.